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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는 국정농단으로 인한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있다. 더구나 그러한 국정농단의 배후에는 여러 종교를 혼합한 ‘사이비 종교’(?)의 창립자인 최태민 목사와 그 일가가 있다는 점에서 국민이 느끼는 허탈감은 매우 크다. 또한, 대통령과 연관된 종교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여러 이야기가 무성하게 퍼지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과 종교의 관계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곧 종교를 관념의 덩어리보다는 물리적 실체로서 간주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주체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는 자연히 종교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주체의 책임과 의무도 포함된다.

켈로그 형제와 ‘재림교회’   

켈로그 사례는 종교 사용법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윌 케이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 1860~1951)는 오늘날 식품매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리얼을 창안한 인물이다. 그가 시리얼을 창안한 장소는 그의 형,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1852~1943)가 관장하던 배틀크리크 요양원(sanitarium)이었고, 이 요양원을 설립한 기관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이하 재림교회)였다.

켈로그 형제, 동생
켈로그 형제: 동생 윌 케이스(왼쪽), 형 존 하비(오른쪽) 그리고 재림교회

두 형제는 재림교회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형 존 하비는 그 종단의 지원을 받아 미시간 의과대학과 뉴욕시의 벨뷰종합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당대의 최신 의학을 공부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동생 윌 케이스는 빗자루를 판매하는 회사에서 근무하다 형의 권유로 요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로부터 정신적인 힘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원을 받았으니 재림교회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재림교회는 당대의 기성 교회에서는 소위 ‘이단’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주로 재림교회의 특이한 관점과 행위가 지적되곤 한다. 즉, 환시와 계시에 근거한 신학적 관념, 토요일 예배, 채식주의, 커피, 차, 담배 등과 같은 자극적인 식품들의 기피, 신체적·영적 청결주의, 급진적 종말론 등과 같은 것이다. 베틀크리크 요양원도 재림교회의 핵심 창립자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 1827~1915, 아래 사진)가 받은 계시에 따라서 설립된 것이었다.

엘렌 켈로그

‘특이한’ 혹은 ‘이상한’ 교단에 의해 설립되어 당대의 의학적 치료법과도 사뭇 다른 치료법이 실천되는 이 요양원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치유를 내세우는 기도원과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시설에는 토머스 에디슨, 헨리 포드, 존 록펠러, 워렌 하딩, 윌리엄 타프트 등과 같은 저명한 과학자, 기업인, 정치가를 비롯한 조지 버나드 쇼와 같은 작가, 예술가, 영화계 인사들이 즐겨 방문했다. 이 요양원에는 입욕시설, 호텔, 레스토랑, 대학, 종합병원 등이 함께 갖추어져 있었고 질병 치료와 건강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윌 케이스 켈로그 아동복지재단

1876년 요양원에서 근무하던 동생 켈로그는 형과 함께 콘플레이크(corn flakes)를 우연히 고안하게 된다. 이 간편식의 원래 명칭은 시리얼 그래놀라(cereal Granula)였는데 1881년에 콘플레이크로 명칭이 바뀌었다. 콘 플레이크는 두 형제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형제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i_002특히 시리얼 제조법의 공개로 인해 유사한 시리얼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출현한 일은 둘의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생은 시리얼 제조법의 공개를 반대했던 반면에, 형은 자신의 환자에게 시리얼 제조법을 알려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오늘날에 상품진열대에서 켈로그 시리얼과 함께 볼 수 있는 포스트 식품회사를 만든 찰스 윌리엄 포스트(Charles William Post, 1854~1914, 사진)였다.

이 일로 인해 동생은 형에게서 독립해서 1906년 오늘날의 켈로그사(Kellogg Company)를 설립한다. 켈로그사는 동생 켈로그에게 많은 부를 안겨주었는데, 1930년에 켈로그는 오늘날의 윌 케이스 켈로그 아동복지재단(W. K. Kellogg Child Welfare Foundation)으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하고, 1934년에 이 재단에 당시의 금액으로 6천 6백만 달러, 오늘날의 금액으로 대략 12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기금을 기부했다. 이 재단은 아동을 위한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과 관련된 연구와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중심 사업으로 삼고 미국을 비롯한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에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wkkf https://www.wkkf.org/
윌 케이스 켈로그 아동복지재단(wkkf)

6시간 노동제 

현재 문제가 되듯이 정경유착으로 ‘국가를 위한’ 재단 설립이 쉬운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재단 설립과 복지 활동이 뭐 대수냐고 생각된다면, 노동과 삶의 질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살펴보라. 그러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장으로 임명한 루이스 존 브라운의 의견을 바탕으로 일찍이 6시간 노동제를 도입해서 실행해 옮겼다. 그때가 바로 미국이 1930년 대공황에 진입하던 시기였다.

한 노동자의 초상, 1942년 경 촬영. 출처 미상. (재인용 출처: Bill & Vicki T, CC BY)
한 노동자의 초상, 1942년 경 촬영. 출처 미상. (재인용 출처: Bill & Vicki T, CC BY)

켈로그 경영진은 6시간 노동제가 ‘일자리 나눔’을 통한 실업난 완화와 늘어난 여가를 통한 노동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생활을 가져올 것으로 확신했다. 켈로그사의 경영진은 시간당 임금을 올림으로써 노동 시간의 단축에 따른 임금 감소에 대한 노동자의 우려를 잠재우면서 1931년 4월 14일에는 6시간 노동제의 영구화를 발표했다.

6시간 노동제를 과감하게 도입한 켈로그의 방식은 미국 사회에서 ‘해방적 자본주의’의 실현으로 평가되는가 하면, 각계에서 일자리 나눔 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노동계, 재계, 정계로부터 많은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주당 30시간 노동제의 법제화가 대두하자 재계와 정계는 성장 둔화와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비용 문제 등의 이유를 내세우면서 경제성장과 정부 개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루스벨트의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후 일과 여과의 균형을 찾으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를 가동하려는 사회적 열의는 미국 사회에서 소멸하였다. 켈로그사도 경영진이 바뀌면서 점차 8시간 노동제로 전환했지만, 1985년까지 노동자의 일부는 6시간제를 노동제를 지킬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6시간 노동제의 영구화에 대한 초기 경영진의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사회적 책무’는 신의 뜻

윌 케이스 켈로그가 일과 여가의 균형을 강조했던 배경에는 프로테스탄트적인 금욕과 성실과 근면을 강조했던 자기 아버지의 가정교육, 배틀크리크 요양원에서 15시간 이상의 과로로 인한 후유증, 그리고 재림교회의 토요일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직업 활동에 장애를 준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6시간 노동제의 도입을 통해 생기는 여가를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지역 사회와 회사에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운동시설, 놀이터, 공원, 도서관, 수영장 등을 제공했다. 또한, 회사 노동자들에게 땅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질 것을 강조하면서, 회사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텃밭을 가꾸도록 권장했다.

켈로그

그는 자연과의 긴밀하고 활발한 접촉을 통해 치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공공영역의 확장을 통해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의 지속적인 자유와 행복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처럼 그는 종종 ‘이단’으로 지적되는 재림교회로부터 얻은 정신적·물질적 자산을 바탕으로 공공영역의 확장과 복지를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사회적 책무를 신의 뜻으로 인식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종교'(?) 사용법 

나는 국정농단의 허탈함을 느끼면서 주체의 종교 사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종교는 종종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배제하면서 상징적 장치를 통해 맹목적인 신앙과 헌신을 유도하여 인간을 반쪽짜리로 만들곤 한다. 종교에 대한 맹목성은 종교인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켜 사회적 현실을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종교와 권력의 결합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 점에서 켈로그와 우리 대통령의 종교 사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켈로그는 기성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종단의 신자였지만, 그 자신은 그 종교에서 중요한 정신적 가치를 발굴하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공과 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창교자의 자녀들과 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국정의 사익화에 이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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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같은 중요한 공적 책임을 지닌 자들은 잘못된 종교의 사용이 종교 권력의 양산과 사회의 공적 기능을 약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고, 권력의 주위를 맴도는 종교 경영인과도 철저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속물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번 국정농단의 사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종교 사용법을 타자·사회와의 관용과 배려와 정의로움과 나눔에 기초한 관계 속에서 꼼꼼히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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