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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폭스뉴스 진행자 메긴 켈리가 ‘산타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백인’이라고 해서 미국이 좀 시끄러운 모양이다. 이에 반발하는 이들은 ‘브라운 지져스 블랙 산타’를 외치며 아래 그림을 공유하고 있다.

“이 흑산타 그림을 공유해요. 그럼 메긴 켈리가 열 좀 받을 겁니다.”
출처: 페이스북 ‘The Other 98%‘를 통해 공유되고 있는 흑할배 산타

발단은 연말 분위기의 자유 복장을 허용한 어느 고등학교에서 산타 복장을 하고 온 학생에게 표현의 자유보다는 확고한 국가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어느 교사가 이렇게 야단친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노노! 너는 흑인이므로 산타 복장은 곤란. 산타는 백인임!” (한 미국 고등학교 교사)

이에 열 받은 학생 아버지가 방송에 알리고 항의하자 학교 측은 가족에게 사과하고 해당 교사에게는 정직 처분을 내렸다. (관련 기사: 한글 , 영어) 이 와중에 한국에서 조선일보가 받는 취급과 비슷한 유복한 처지에 있는 폭스 뉴스의 앵커가 불에 기름을 끼얹은 발언을 해 SNS는 물론이고, 오프라인도 술렁이는 중이다.

“예수가 백인이듯 산타도 백인이며 이건 팩트임! 애들 똑바로 가르치셈!!” (폭스뉴스 앵커 메긴 켈리, 의역)

예수의 피부색을 둘러싼 논의야 이전부터 쭉~ 있어왔고, 영국의 다큐멘터리 작가가 만든 [신의 아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포렌식(감식)기법을 동원하여 예수의 모습을 재구성한바, 예수는 아래와 같은 친근감 가는(!) 인물에 가까웠음을 과학적으로도 제시한 바 있다. (관련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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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나가 예수여, 예수랑께!
성전에서 장사라니! 독사의 자석들 루돌프 녹용 따는 짓거리하고 자빠졌네.
(출처: philosophistry.com/)

과학적인 복원이고 뭐고, 상식적으로도, 예수는 딱 북아프리카인, 혹은 중동인인 것이 맞겠다. (사실 ‘중동’이라는 단어도 참 그렇다..누구 입장에서 중간 동쪽이냐. 아시아에 속했으면 아시아 기준으로 ‘서아시아’라고 하면 몰라도.)

하여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교회에 파란 눈의 백인 미남자로 그려진 예수의 그림을 볼 때마다 코웃음을 쳤더랬다. 우상숭배가 따로 있나. 예수를 그림으로 그린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네 마음속 온화한 백인 미남자가 현현한 우상이란 말이다. 그것도 변방 주제에 중심의 시선으로 보는 우상!

운보 김기창 화백이 토착화된 신앙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예수를 갓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는 시도라면 또 이야기가 좀 다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시도에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는 있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초월하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은 좀 억지스럽고, 나름 친숙하고 어리숙하기도 하며 좋은 역할도 하는 도깨비를 사탄으로 묘사한 것도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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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 한번 바꿔봐! 내일 아침 밥상 반찬이, 아니 이 땅 중생들 시선이 달라져!
출처: 운보 김기창

그러나 조선시대 복식이나 도깨비의 역할은 각론에 해당하는 문제고, ‘토착화’의 본질적 문제는 엉터리 번역의 일본 해적판 만화를 보며 일본의 문화와 관습을 내 것인 양 헷갈려 할 위험성과 통한다.

[일격전]을 [권법소년 한주먹]으로 바꾼 경우를 보자. 아무리 기모노를 잠옷으로 바꾸고 일본풍 실내 장식은 지워버려도(링크), 일본식으로 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모습 등등은 바꾸지 못한 와중에 작중 인물, 지명, 학교명을 다 한국식으로 바꿔 놓은 것이 해적판 만화 대개의 특징이다. 이렇게 다른 문화적 맥락을 형식적으로만 합성해 버리는 경우라면, 오히려 ‘일본문화’와 ‘한국문화’를 구별하지 못하게 하고 은연중에 일본문화가 우리 것인 양 착각하게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그래도 운보의 그림은 어떤 ‘토착화’의 시도라고도 치고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이런저런 긴장감이나 상상력을 촉발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치자. 그러나 (당신이 백인이 아닌 다음에야) 왜 굳이 저 사막 근처 히브리 땅의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백인화’시키는 것인가 말이다. (무)의식적 우상숭배가 아니면, 중심의 시선에 정복당한 이방인의 자발적 복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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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백인으로 토착화한 예수랍니다~! (출처)

하지만 이런 입장에서도 이번 산타가 흑인이라는 그림은 솔직히 좀 낯선 게 사실이다. 낯설어하는 나 자신의 무신경을 짐짓 질타하면서, 어이쿠, 그래서 이번에 산타가 흑인일 수 있다는, 흑인이라는, 혹은 흑인이기도 한다는 주장에 적극 지지를 보내면서도, 한편 그러나, 아련하고 가슴이 시리기도 하다.

물론 이는 메긴 켈리처럼 ‘아니 왜 멀쩡한 백인(만)의 산타와 예수(의 역할)에 흑인 주제에 찝쩍대셔? 말세야 말세!”라고 개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한, 어느 흑인 가정에서 아이가 “학교의 산타는 백인인데 왜 우리 집 산타는 흑인이야?”라고 물으니, 아버지가 기지를 발휘하여 “응, 산타는 말이지, 신비롭게도,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딱 그 가정의 피부색으로 변한단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미국 신문에 소개되었다고는 한다만, 학교와 집에서의 산타의 피부색의 차이에 혼란스러워하는 우리 흑동생의 처지가 안타까워서도 아니다.

어차피 유럽의 전통인 것에 굳이 ‘나의 피부색’을 끼워 맞춰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공동체에서 조화를 이루고 평등하게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졌음에도 굳이 나의 인종과 문화도 동참해야만 하는 것인가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이주민을 상대로 한 융화통합정책에서 나타나는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시절, 단군 신화는 불온시 되거나 잊혀감에 따라 일본의 건국신화나 각종 신화를 우리 것으로 여기게 됐다고 칠 때, 거기에 기껏 ‘반도인도 나온다’라고 하면 뭣하나 하는 생각이랄까. 단군 내팽개치고 말이지.

일본 만화 [크레용 신짱]과 [일격]이라고 받아들여도 거기에 흡수되고,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짱구’나 ‘한주먹’, ‘김전일’이나 ‘남도일’이 먹고, 마시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나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마치 원래부터 우리의 것인지 헷갈렸던 과거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머리에 저런 거 두르는 거, 한국문화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사진: [크레용 신짱]이 원작인 [짱구는 못말려], tooniverse )
머리에 저런 거 두르는 거, 한국문화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출처: [크레용 신짱]이 원작인 [짱구는 못말려], tooniverse )
그러나 내가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뭐라 한다면, 정작 우리 흑형들은 ‘어디 동양인 주제에 흑인들의 애환을 이해하는 척 코스프레를 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흑인도 아닌 주제에 대단히 생각해주는 척하며 문제에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흑인 근본주의 워너비’라고 취급할지도 모르겠다. 하여 이미 자신의 문화 한가운데 들어온 산타가 자신과 같은 흑인일 수 있다고 하는 자긍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십분 이해를 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애초에 산타를 대신해서 이미 있던 전통이나 그런 구분법이나 ‘착한 일을 하면 연말에 선물을 준다’는 프레임을 초월해서 이미 있던 수많은 아프리카의 설화들을 복원할 수는 없는 걸까. 왜 꼭 애꿎은 남의 나라 설화에라도 등장해야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만큼 단절과 유실의 시간이 길었으며 타격이 컸던 것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시리고 서글픈 것이다.

산타는 몰라도 산타나는 확실히 백인이 아닌 듯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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