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지금 당장 ‘마케팅 프로세스’를 검색해보라. 정석으로 여겨지는 필립 코틀러의 방법론부터 다양하게 변형된 프로세스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필립 코틀러의 R-STP-MM-I-C 프로세스 각 단계 중 코틀러의 순수 창작은 없다. 이미 존재했던 개념을 결합해 ‘마케팅 프로세스’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수학 공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방법론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다. 마케팅의 역사를 알면 익숙한 여러 기법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본질을 이해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스스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어설픈 컨설턴트를 걸러낼 능력도 생긴다.
이 연재 ‘마케팅의 역사’가 형식보다는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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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너럴 모터스에 대한 공격입니다!
공산주의자보다 더 악랄하단 말입니다!”
쉐보레(Chevrolet) 사업부의 책임자 마빈 코일(Marvin Coyle)은 들고 있던 책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슬론과 드러커의 만남
책 표지에는 [기업의 개념, The Concept of Corporation]이라고 적혀 있었다. 1946년에 [기업의 개념]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독자 대부분은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GM)에 대한 찬사라 생각했다. 하지만 GM 임원들은 [기업의 개념]이 결코 GM에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1942년, GM 사장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 사진)은 [산업인의 미래, The Future of Industrial Man]를 읽고 크게 감명받는다. 저자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였다. 피터 드러커는 산업인의 미래에서 히틀러의 패배를 예언했으며, 기업이 새로운 사회 기관으로서 산업사회 구성원들의 지위와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론은 내용에 크게 공감했고, [산업인의 미래]를 GM의 사내 필독서로 정한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를 GM에 초대했다.
슬론이 드러커를 초대한 목적은 경영 컨설팅이었다. 드러커의 혜안을 통해 GM의 현재에 대한 분석과 미래의 비전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덕분에 드러커는 GM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속속들이 조사할 수 있었다. 조사는 1943년 1월부터 18개월간 진행되었다. 조사가 끝나자 드러커는 약 2년여의 집필을 통해 [기업의 개념]을 완성할 수 있었다. [기업의 개념]은 GM에 대한 피터 드러커의 보고서였다.
[기업의 개념]에 대한 초기 반응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드러커는 당시 버몬트 주의 베닝턴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동료 교수들은 책의 출간 자체를 반대했다. 정치학도 아니고 경제학도 아닌 애매한 책은 커리어를 망치는 것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드러커는 경영이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선배 교수들은 경영이 무슨 학문이냐며 늦기 전에 경제학에 집중하라 충고했다.
GM 임원진의 전반적인 반응은 마빈 코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기업의 개념]을 통해 GM의 정책을 바꾸라고 말하는 드러커를 가소롭게 여겼다. 강의나 하고 글이나 쓰는 책벌레 따위가 현실을 알겠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신 경영해봤어? 나는 해봤어!
이 정책은 무조건 옳아! 왜냐고?
이것들은 모두 실전에서 증명된 것들이니까!
이런 인식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혹시 컨설팅의 대명사 맥킨지가 직접 스타트업을 경영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스티브 잡스에게 조언해줬던 돈 밸런타인이 직접 애플을 경영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경험으로 컨설팅을 누르는 게 바보 같은 짓임을 지목하기 위해서다.
산업혁명, 세계대전, 시장경제의 발달은 천재적인 비즈니스맨을 탄생시켰다. 선전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 현대 광고의 아버지 데이비드 오길비, 현대 기업의 아버지 알프레드 슬론. 이들의 업적이 자서전 수준으로 끝났다면 세월에 쌓여 잊혀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들의 업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이들의 업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책을 내는 것에 평생을 쏟아부은 책벌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실전이 중요한 만큼 거리를 어느 정도 두고 조망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전에 뛰어든 영웅은 직접 검을 휘둘러 적의 생살을 가르고 피와 내장을 봤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승리했는지 뚜렷하게 체감한다.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승리하리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승자의 함정이다. 영웅 대다수는 자신이 이긴 방식으로 똑같이 승부하다 최후를 맞는다. 그런 패턴을 평생 파고드는 게 학자다. 학자는 직접 경영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경영한 여러 사람들의 패턴을 안다. 그게 방법론이 되고 학문이 되는 것이다.
경영은 쥐 뿔도 안 해본 책벌레들이 만든 책들은 어떤 결과를 낳았나? 피터 드러커의 [기업의 개념]을 읽은 청년은 잭 웰치(Jack Welch)가 되었다. 존 브룩스(John Brooks)의 [경영의 모험]을 읽은 청년은 빌 게이츠(Bill Gates)가 되었다. 이는 알렉산더와 한니발의 전략을 읽은 코르시카 촌뜨기가 나폴레옹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폴레옹이 읽은 책은 알렉산더나 한니발이 직접 쓴 것이 아니었다. 군대 지휘를 한 번도 못 해본 자가 그들의 전투를 분석하여 기록한 것이었다.
경영이 실전이라면 경영학은 그 실전 결과를 실험 결과로 삼는다. 경영학은 사회과학인 셈이다. 경영학 없이는 경영이 지금처럼 고도화하고 전문화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경영학이 있어야 경영도 발전할 수 있다.
슬론의 분권화
GM의 정책이 실전에서 검증된 것은 사실이었다. GM은 슬론의 분권화 정책으로 강력한 조직화에 성공했고, 그 힘으로 감히 넘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포드(Ford)의 아성에 도전하여 승리했다. 슬론이 현대 기업의 아버지라 불릴 근거도 분권화에 있었다. 분권화는 오늘날까지도 대기업 조직의 기본 모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마케팅의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점이 그 부분이라 생각한다. 조금 의외일 수 있지만, 슬론의 분권화 정책은 마케팅의 필요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이야기는 1920년 11월 30일, 방만한 경영으로 윌리엄 듀랜트( William Durant)가 GM 사장에서 쫓겨나고 피에르 뒤퐁(Pierre Dupont)이 취임한 때로부터 시작한다.
뒤퐁이 취임할 당시 자동차 업계는 포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포드는 ‘모델 T’라는 이름의 자동차 단 한 종류만 대량 생산해 저가로 판매했다. 그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GM은 쉐보레, 오클랜드(Auckland), 올즈(Olds), 스크립스-부스(Scripps-Booth), 셰리단(Sheridan), 뷰익( Buick), 캐딜락(Cadillac)의 7개 계열사를 보유했는데,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는 모두 포드보다 비쌌다.
계열사들은 매우 독립적으로 경영됐다. 저가 시장은 포드 때문에 진입할 엄두도 못 냈고, 중간 가격대 시장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예를 들어 캐딜락이 잘 팔리면 뷰익은 안 팔리고, 뷰익이 잘 팔리면 캐딜락이 안 팔리는 식이었다. 정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사인 GM 입장에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뒤퐁은 이런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4인 체제의 집행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4인 중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이 바로 슬론이다.
슬론은 듀랜트가 사장일 때도 GM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듀랜트에게 여러 번 건의했지만, 듀랜트는 슬론의 의견을 무시했다. 슬론은 그의 생각을 [조직 연구]라는 이름으로 정리했고, 이는 분권화 정책의 기초가 됐다. 슬론은 사업부의 기능을 명확히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지금처럼 각각의 사업부가 같은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사업에 중복 투자해서는 안 됨을 의미했다.
이를 위해서는 본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본사는 각 사업부의 사업이 회사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통제하는 힘을 가져야 했다. 슬론은 집행위원회가 정책을 만들고, 운영위원회를 설치하여 사업부를 평가하는 것이 해결책이 된다고 주장했다. 정책 통일과 일관된 정책 실행은 본사 내에 부서를 만들어 각 사업부를 자문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슬론의 주장이 담긴 [조직 연구]는 사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뒤퐁은 슬론의 주장대로 GM의 조직을 개편하기로 결정한다. 먼저 가격을 기준으로 시장을 6단계로 세분화했다. 가장 저가 시장에는 쉐보레 사업부를 배치하여 포드와 경쟁시키기로 했다. 그다음은 저가에서 고가 순으로 오클랜드, 뷰익 4, 뷰익 6, 올즈, 캐딜락을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셰리단을 매각했고, 스크립스-부스를 해체했다. 가격 정책을 수립하여 각 사업부가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고, 사업부가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고 각자의 시장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슬론의 정책이 시행되자 GM은 점차 정상화되었다. 1923년 뒤퐁은 GM 사장 자리에 슬론을 추천하고 자신은 사임했다. 뒤퐁은 처음부터 적당한 리더가 나타나면 사임하겠다고 밝혔던 터였다. 뒤퐁은 GM 외에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체가 있었다. 사업체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뒤퐁이었다.
뒤퐁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나일론이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나일론 소재를 발명한 회사가 바로 뒤퐁이다. 뒤퐁의 회사는 중앙집권적인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슬론에게 감명받은 뒤퐁은 자신의 회사에도 슬론의 분권화 개념을 적용한다. 분권화는 그 시점부터 여러 기업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타일링’ – 디자인을 위한 엔지니어링
GM 사장에 취임한 슬론은 가격으로 시장을 세분화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가격 외에도 제품면에서 차별화되는 요소가 더 있어야 포드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슬론은 포드와 가장 크게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를 색상으로 보았다.
당시 자동차들은 무조건 검은색이었다. 마차용 페인트와 니스를 자동차에 그대로 사용했는데 검은색 외에 다른 색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용 페인트는 품질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마차에 바를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자동차는 마차와 달리 엔진에서 열이 발생했다. 엔진 열은 자동차에 칠한 페인트가 쉽게 떨어지게 만들었다. 슬론은 사장 취임 전부터 페인트가 쉽게 벗겨지는 것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상당한 것을 파악하고 이미 뒤퐁연구소에 신소재 개발을 의뢰해 둔 상태였다.
1920년 7월 4일, 드디어 뒤퐁연구소에서 ‘듀코’라는 이름의 니트로 셀룰로오스 래커가 개발되었다. 듀코는 여러 가지 색을 혼합해서 사용할 수 있었고 엔진 열에 의해 벗겨지는 일도 없었다. 1921년에는 본사에 ‘페인트 & 에나멜 부서’가 설립되었다. 슬론이 GM의 사장으로 취임한 1923년에는 듀코로 칠해진 최초의 자동차가 출시됐다. 선명한 푸른색을 띤 그 자동차의 이름은 ‘트루 블루 오클랜드’였다.
슬론은 컬러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은 외관이었다. 하필이면 마침 그때 경쟁사 크라이슬러 Chrysler가 선수를 쳤다. 슬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24년에 출시한 ‘크라이슬러 B-70’이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인기몰이를 한 것이다. 슬론의 가슴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슬론은 캐딜락 사업부 책임자였던 로렌스 피셔(Lawrence Fisher)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크라이슬러가 왜 성공했는지 아시오?
단 한 가지 때문이오! 디자인!”
당시 자동차 산업은 엔지니어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기술적 역량을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지만, 소비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동차 산업에서 뛰어난 엔지니어링은 얼마나 멋진 기술이 적용되었는지가 척도였다. 사용자 편의나 미적 디자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혹시 그럴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기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었다. 광고나 영업도 마찬가지로 엔지니어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핵심 포인트였다.
하지만 슬론의 생각은 달랐다. 슬론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들이 어떤 자동차를 원하느냐였다. 소비자 취향에 중점을 두었을 때 우선순위는 디자인이나 편의성 같은 것이었고, 기술은 그다음이었다. 어차피 차 만드는 기술은 거기서 거기였다. 슬론이 보기에 자동차 산업에서 뛰어난 엔지니어링은 아름다운 디자인에 기계를 어디까지 맞춰줄 수 있는지가 척도였다. 슬론은 그것을 ‘스타일링’(Styling)이라 불렀다.
GM, 할리 얼이라는 ‘날개’를 얻다
슬론은 소비자 취향을 중시했지만, 자동차 스케치를 보여주며 시장 조사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슬론은 포드와 경쟁 관계였고,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달랐지만, 시장 조사에서만큼은 포드와 의견을 같이했다. 시장 조사와 관련하여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가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다면, 사람들은 제게 더 빠른 말이 필요하다고 했을 겁니다.”
슬론은 시장에 물어보기보다 시장이 원하는 것에 대한 통찰력과 감각을 가진 인재를 원했다. 피셔는 슬론이 원하는 인재를 수소문하던 중 캘리포니아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자동차를 만난다. 그 자동차는 흔히 볼 수 있는 공장에서 양산된 물건이 아니었다. 차주의 취향에 따라 주문 제작된 것으로 할리 얼(Harley Earl)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할리 얼의 고객은 주로 부자들이나 할리우드 스타들이었다.
피셔는 할리 얼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리고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듯한 충격에 빠졌다. 할리 얼의 자동차 제작 과정이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공장 양산형이든 주문 제작이든 간에 보통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 때는 모형을 먼저 제작했다. 모형을 만드는 이유는 디자인을 확정하고, 이를 구현하는 데 있어 기술적인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모형은 일반적으로 나무와 못을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할리 얼은 모형 제작에 전혀 다른 소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점토였다.
나무로 표현하는 모형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디자인에 각이 질 수밖에 없었고 딱딱한 느낌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점토는 곡선은 물론이고 그 어떤 형태라도 표현할 수 있었다. 할리 얼이 만든 자동차가 세련되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피셔는 얼을 슬론에게 소개했다. 슬론은 얼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신차 ‘캐딜락 라샬(Cadillac Lasalle)’의 스타일링을 맡겼다.
1927년, 할리 얼의 라샬이 출시되었다. 라샬은 세계 최초로 슬론의 스타일링 개념이 적용된 차였다. 기술에 디자인을 입힌 게 아닌, 디자인에 기술을 맞춘 차였던 것이다. 라샬은 2년간 5만여대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개최된 메모리얼 데이 500 레이싱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하여 성능면에서도 월등함을 증명했다. GM의 ‘페인트 & 에나멜’ 부서는 ‘아트 & 컬러’ 부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서장에는 할리 얼이 임명되었다.
GM의 스타일링 혁신, 포드를 무찌르다
라샬은 성공적이었지만, 다음 해 7월에 출시된 뷰익은 GM에게 있어서 재앙이었다. 너무 급격하게 바뀐 디자인이 원인이었다. 얼이 스타일링한 새로운 뷰익은 벨트라인 밑이 불룩한 모양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디자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새로운 뷰익에는 금세 ‘임신한 뷰익'(Pregnant Buick)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놀림감이 됐다.
슬론은 이것을 오히려 스타일링이 시장에서 먹힌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스타일링이 좋으면 잘 팔리고 스타일링이 나쁘면 안 팔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급격한 디자인 변화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1930년, ‘아트 & 컬러’ 부서는 ‘스타일링’ 부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할리 얼과 같은 디자이너는 ‘스타일리스트’로 불리게 되었다. 슬론은 스타일링에 여성의 취향을 적용하기 위해 여성 스타일리스트도 고용했는데 이는 자동차 업계 최초였다. GM에서 정의한 스타일링과 스타일리스트 용어는 이때부터 자동차 산업 용어로 정착한다.
할리 얼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 혁신을 원했다. 그는 이를 위하여 미래의 디자인을 미리 선보이고 시장 반응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보일 형태는 스케치나 모형이 아닌 실제 자동차여야 했다. 소비자는 직접 실물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꼭 실물이어야만 정확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938년, 얼은 오랜만에 공장 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것은 과거에 그가 자동차를 주문 제작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소비자의 미래 취향을 예측하여 제작된 얼의 자동차에는 ‘와이 잡'(Y-Job)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와이 잡은 세계 최초의 컨셉트 카였다. GM이 개최한 최초의 모터쇼에서 와이 잡이 공개되었다. 얼은 이때의 시장 반응을 관찰하여 1940년대에 양산할 뷰익과 캐딜락의 스타일링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었다. 1940년, 할리 얼은 GM의 부사장이 된다.
할리 얼이 GM의 스타일링을 선도하는 동안 포드는 뭘 하고 있었을까? 포드는 여전히 엔지니어에게 힘이 쏠려 있었다. 포드는 성공의 주역이었던 저렴한 보급형 자동차 컨셉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승자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승리의 방식으로 또다시 승리할 것이라 굳게 믿었던 포드는 결국 폭삭 망했다. 포드는 뒤늦게서야 GM의 스타일링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할리 얼의 제자들을 스카웃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휴일에 여가를 즐기는 여유로운 문화가 확산되었다. 얼은 이러한 시대적 풍조에 맞추어 자동차를 ‘휴가’라는 컨셉으로 스타일링한다. 그렇게 탄생한 자동차가 바로 뷰익 르사블(Buick LeSabre)과 쉐보레 콜벳(Chevrolet Corvette)이었다.
포드에게 승리한 GM의 비즈니스 행보는 업계와 학계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나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시장 세분화 전략과 스타일링에 의한 제품 차별화는 수많은 업체에서 벤치마킹했다.[footnote]세분화와 제품 차별화가 용어로 굳어진 것은 1956년 웬델 스미스(Wendell Smith)가 ‘Product differentiation and market segmentation as alternative marketing strategy’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덕분에 GM의 마케팅은 깊게 연구됐고, 오늘날 STP전략의 Segmentation과 제품 차별화 개념으로 발전했다.[/footnote]
드러커의 경고, 이대로 가면 GM은 망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분권화 정책의 업적이다. 그런데 피터 드러커는 이대로 가다가는 GM이 몰락할 것이라 경고한 것이다. GM의 구성원은 분권화를 중앙집권화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했다. 분권화는 각 사업부의 독립성을 지키면서도 본사 통제로 균형을 지키는 합리적인 조직 이론이었다.
드러커가 보기에 그것은 GM의 구성원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분권화였다. 현실에서 분권화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피셔 바디 사업부는 분권화를 개무시하는 수준이었고, 쉐보레 사업부는 분권화를 교통질서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어느 사업부는 GM 역사상 최대의 계약을 취소했음에도 본사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는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본사와 사업부가 하나의 팀처럼 움직인 적도 많았다. 사업부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본사가 독재를 했다는 의미다.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다.
“제너럴 모터스는 인간 존재가 기능하는 동적인 조직이지 정적인 청사진이 아닙니다.”
GM이 대책 없이 분권화에만 미래를 거는 것은 큰 문제가 있었다. 분권화의 조직 질서는 껍데기 수준으로 지켜지고 있었고, 그 간극을 채우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슬론의 리더십이었다. GM은 수직적인 권력 조직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슬론이 퇴임한다면 GM이 망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설사 분권화가 잘 지켜진다 할지라도 분권화는 조직 이론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조직화가 불가능한 가치들은 다룰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정작 기업에 중요한 것은 조직화할 수 없는 가치들이었다. 드러커는 GM이 그런 가치를 창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러커는 대기업을 사회 제도로 보았다. 대기업 제도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를 단순히 비용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돈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미래에 요구될 창의적 발상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돈으로 동기 부여하려는 조직에서는 바람직한 구성원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리더도 배출될 수 없었다. 실제로 GM의 뛰어난 리더들은 모두 외부 인사였다. 뒤퐁이 그랬고, 할리 얼이 그랬다. 슬론 자신도 외부 인사였다.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리더를 배출할 수 없는 제도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제품 – 노동자의 일 – 기업의 ‘관계’
드러커는 대기업이 사회 제도로서 구성원의 삶의 질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의 성장을 약속할 수 있어야 독창성을 발휘하는 인재가 배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드러커는 기업의 구성원들을 경영적 태도(Managerial Aptitude)를 갖춘 책임감 있는 근로자(Responsible Worker)로 키워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하여 ‘제품’과 ‘노동자의 일’과 ‘기업’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드러커는 그 근거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동안 GM 내에서 벌어진 희망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footnote]이 주장은 이후 지식 근로자(Knowledge Worker) 개념으로 발전한다.[/footnote]
소총 발사 사례
북부 미시간의 어느 지역은 평화로울 때도 높은 이직률과 고의 결근으로 유명했다. 전쟁이 터지자 이곳에 있던 GM의 작은 공장은 카빈 소총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노동자 대다수는 경력 없는 여성 신입이었다. 노동자 각각에게는 먼저 카빈 소총이 주어졌다. 하나는 자신이 만들 정상적인 부품이 들어간 소총이었다. 나머지는 가장 흔한 실수를 했을 때 발생하는 불량 부품이 들어간 소총이었다.
책임자는 노동자에게 소총을 발사해 보라고 요청했다. 직접 총을 쏴 본 노동자는 ‘자신의 일’과 ‘제품’과 ‘전장’ 사이의 관계를 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개별 상담을 통해 작업 일정을 짰다. 일정 설계의 주체는 근로자 자신이었다. 그 결과 여성 근로자들은 경험이 전무한 신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석률과 생산 일정 모두 평화시 평균 수치를 훨씬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폭격기 방문 사례
2차 세계대전 당시 GM의 어느 작은 공장은 폭격기 부품을 제조했다. 어느 날 군에서 공장으로 폭격기를 보냈다. 물론 공장을 폭격하러 온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폭격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GM 임원은 폭격기를 왜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로 시간만 빼앗고 번거로워서 반대했지만, 군의 요구였으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그날 자신이 만든 부품으로 조립된 폭격기를 처음 목격했다. 군에서 나온 정비사는 노동자 한 명 한 명에게 그들이 만든 부품이 어디에 들어가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군이 다녀간 후 그 공장의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드러커의 경고를 무시한 GM
앞 사례들은 GM에서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 GM은 회사를 경영하는 것에 있어서 앞 사례와 비슷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제품’과 ‘노동자의 일’과 ‘기업’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기업의 장래와는 전혀 무관한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드러커는 분권화도 좋지만, 그보다 GM이 이런 구체적인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빈 코일이 드러커를 향해 공산주의자를 운운한 것은 드러커의 이런 주장들 때문이었다. 그는 드러커의 책을 GM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술수로 보았다. 모든 GM의 임원들이 드러커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임원 중 하나였던 찰스 윌슨(Charles Wilson, 사진)은 드러커의 보고서를 적극 지지했고, 이를 기반으로 ‘나는 왜 이 일을 좋아하는가?’라는 이름의 사내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러나 캠페인은 슬론의 무언의 압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슬론 자신은 드러커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드러커의 보고서를 명백히 무시했다. 슬픈 이야기지만, GM 노조도 드러커의 의견에 반대했다. 노조 역시 노동자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37년, 슬론은 GM 사장에서 사임하고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슬론은 1956년에 은퇴한다. 195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자동차 붐이 일어났다. GM은 독일의 오펠과 영국의 복스홀을 소유했지만, 경쟁자들에게 밀렸다. GM은 유럽에서 포드, 폭스바겐, 피아트, 르노에 이어 시장 점유율 5위로 추락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오하이오주 로드스타운 GM 공장에서 업무태만, 생산성 저하, 품질 저하 사태가 벌어졌다. 사태는 수습되지 못하고, 다른 공장들로 번져갔다.
1972년 GM 회장 후보로 거론되었던 존 드로리안(John DeLorean, 사진)이 GM에 환멸을 느끼고 떠났다. 그가 밝힌 GM을 떠난 이유는 무능한 경영, 기획력 부재, 경직되고 관료화된 조직이었다. 1970년대 후반, GM의 노동비용은 미국 제조업 통상 비용보다 50% 높았고, 생산성은 오히려 경쟁자들보다 더 떨어졌다. 1979년 GM은 드디어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규모 계획에 착수한다.
‘마케팅과 혁신’
GM과 동료 교수들은 [기업의 개념]에 부정적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외 대다수는 피터 드러커에 열광했다. [기업의 개념]은 출간되는 즉시 미국 주요 주립대학들의 재구조화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일본에서의 반응은 미국보다 몇 배로 더 뜨거웠다. 심지어는 일본의 경제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다수 일본 기업의 임원들이 [기업의 개념]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크게 축하할만한 일은 따로 있다. 피터 드러커에 의해 경영이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GM을 관찰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학문적 성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GM 덕분이었다. 드러커는 1954년 [경영의 실제, The Practice of Management]를 출간한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혼란을 느끼는 부분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렸다.
“기업은 단 두 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다. 마케팅과 혁신이다.
마케팅은 영업이 아니다. 마케팅의 목표는 영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케팅은 생산활동 주기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있으며 단계마다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내려진 정의지만 지금도 가려운 부위를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명문이다. 나는 드러커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기까지 GM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생각한다. GM이라는 존재 덕분에 세분화와 제품 차별화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고, 기업과 마케팅의 정의까지 확립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의 어느 날. 드러커는 비영리 단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우연히 마케팅에 관한 뛰어난 통찰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다. 드러커는 저자를 만나 비영리 단체의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필립 코틀러 씨?
피터 드러커입니다.
시간 되실 때 클레어몬트로 한 번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어서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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