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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4일, 시리아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 라타키아에는 죽음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ISIS(이슬람국가)는 여성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표적 삼아 총을 쏘아댔다.

Day Donaldson, CC BY https://flic.kr/p/pWLvG8
ISIS(이슬람국가) (출처: Day Donaldson, CC BY)

이날은 문학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던 누어 사이드의 생일이었다. ISIS는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그중에는 누어의 친구도 있었다. 나중에 부모가 몸값을 내고 데려왔지만, 친구는 며칠 후 자살했다. 누어는 쌍둥이 동생인 자와와 함께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누어 사이드(스웨덴, 28)와 자와 사이드(스웨덴, 28)는 한참을 봐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똑 닮았다. 자매는 카메라 앞에서 여느 20대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환하게 웃는다. 누어와 자와는 터키를 거쳐 2013년 스웨덴에 도착해 난민 지위를 얻었다.

“탈출의 경로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터키에서 오래 머물렀다. 갖가지 문서를 위조해야 했다. 난생처음으로 불법적인 일을 해봤다. 나중에 그리스에서 불법 여권 거래를 취재했다. 유럽 국적의 여권 하나에 1~2천만원 정도 한다.

불법 여권 중계상은 그것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난민을 돕는 UN 같은 존재라 여긴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시리아를 떠날 수 없다. 그것이 사지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취재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다.”

누어는 2015년 사회에 공헌한 취재를 한 언론인에게 주는 본니에르상 후보에 올랐다.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상이다.

“ISIS의 유물 밀매에 관한 취재로 후보에 올랐다. 유물 밀매는 ISIS의 주요 자금원 중 하나다. 고대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인 시리아에는 유물이 많다. ISIS 판매상에 접근하기 위해 수도 없이 전화하고 이메일을 보냈다. 신분을 숨기고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하는 법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어렵게 판매상과 접촉할 수 있었다. 비디오로 유물을 보여주며 그중에 고르라고 했다. 유물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았다. 터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직접 사지는 못했다. 그것 역시 불법이니까.

밀수에 대해 취재하며 사실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 세력인지 알게 됐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다반사다. 국경에서는 장기 밀매도 일어난다. 실종되었던 한 아이를 찾았는데 온몸에 수술 자국이 있었다. 찾은 지 얼마 안되어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누어는 스웨덴의 일간지 아프톤블라뎃을 거쳐 지금은 국영 텔레비전인 SVT의 탐사 기자로 일하고 있다.

난 내 고향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고 총 대신 펜을 선택했다. ISIS 역시 미디어를 통해 그 힘을 키웠다. 시리아의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시리아 사람들끼리 죽이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 단체 간의 알력과 세력 다툼이 커져 그렇게 된 것이다. 갑자기 극단주의자들의 나라가 됐다.

그들은 조직된 전쟁꾼이다. 어떤 사회적 이념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돈이다. ISIS가 출몰하기 전 시리아는 천국 같았다.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내가 살던 곳은 해변이 가까워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난 세계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엄마처럼 교수가 되고 싶었다.”

스웨덴에서의 새로운 삶은 어떤가?

“난 고향을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다. 누구도 고향을 등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생필품을 살 수 없고 곳곳에 벌어지는 일이 전쟁통보다 더 참혹하다. 살 수 없어서 떠나는 것이다. 피난민에 관한 통계는 있다. 하지만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트라우마를 겪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곳이 집이다. 내 고민은 어떻게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도록 돕는 것이다.

스웨덴은 난민에게 관대한 나라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사실 스웨덴에서의 삶도 힘들다. 치열한 경쟁 속에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다. 시리아에 있을 때는 죽음 한가운데 있었지만, 가족과 함께였다. 보호받는다는 느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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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인디고서원 

누어는 하늘을 나는 연처럼 계속 어려움을 감수하며 멀리 가려 하고, 누어를 아끼는 가족과 친구들은 계속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기분이다.

누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브라이언 파머 교수가 말했다. 파머 교수는 누어가 언론사에서 일하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 취재 중 신분을 숨기기 위해 누어는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위조 신분증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도 있었다.

“난 어떤 개인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조직화한 범죄에 대항하는 것이다. 물론 위험에 처한 적이 많았지만.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 노력 중이다. 스웨덴 정부가 여러 면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아직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위협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일하고 싶다.”

누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 멀리 날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무얼까.

“가족의 사랑이다. 우리 둘만 시리아에서 나왔다. 나머지 가족이 시리아에 남아있다. 가족과는 아주 가끔 연락한다. 통신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보안의 문제도 있어 자주는 어렵다. 한국의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공부와 부모의 기대로 스트레스가 많다고 했다. 헬리콥터 맘[footnote]자녀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모든 일에 간섭하려는 부모[/footnote] 이야기도 들었다. 난 그런 엄마를 갖고 싶다. 공부 스트레스도 그립다. 우리는 땅과 가족도 잃었다.”

이 말을 할 때 누어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고였다.

“내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부모님과 자와는 변함없이 나를 응원해준다. 그분들은 더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변함없이 나를 사랑한다. 그 사랑 때문에 회복되었다. 지금 떠올리면 시리아에서의 삶은 아예 다른 삶 같다.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고 동생 자와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엄마는 고향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쓰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은 난민을 짐처럼 여긴다. 우리도 생산적일 수 있고 아이디어도 있다. 제 자리에만 배치되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며 기다려달라. 개인마다 역량이 있으며 그러기 전에라도 여전히 존엄한 인간이다. 구걸과 도움만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노력과 시도에 감사한다. 한국은 부유하고 여유로운 나라다. 난민 문제에 좀 더 관심을 보여달라. 유럽만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 아니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 ‘인디고서원’이 주최한 인디고 유스 북페어 참석차 방문한 누어 사이드는 20일까지 한국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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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인디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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