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년에 달하는 장기 계획.
- 확고한 의지를 가진 8,598명의 인재들.
- 그들은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 6년이 지났다.
- 833명이 낙오했다.
- 낙오자들은 6년 동안 한 가지에 집중하다 실패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 3년 후 2,481명이,
- 다시 3년 후 2,641명이,
- 다시 4년 후 2,000여 명이 낙오했다.
완주한 사람은 단 100여 명. 수천 명이 최대 16년의 세월을 소진하고 실패했다. 실패자들은 절망감과 함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8,400여 명의 인생은 약 1%를 길러내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했다. 장기 계획의 이름은 이랬다.
“한국에서 프로 축구 선수 되기”
축구 강국의 유소년 훈련 방법
대한민국 축구 꿈나무들은 어릴 때부터 모든 시간을 축구에만 쏟아붓는다. 오전에도 축구, 오후에도 축구, 심지어 방학 때면 새벽에도 축구를 한다. 한국만의 독특한 학원축구 문화다. 목표는 한국의 리오넬 메시(Lionel Messi)가 되는 것. 그러나 정작 메시는 그런 식으로 훈련하지 않았다.
FC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아카데미 라 마시아(La Masia)는 일주일에 네 번 훈련한다. 분량은 30~90분 정도. 훈련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진행된다. 학업을 소홀히 하면 유급되고, 유급이 계속되면 축구를 할 수 없다. 메시는 라 마시아 출신이다.
또 다른 클럽인 비야레얄 CF의 경우 라 마시아와 훈련 시간은 같고 일주일에 세 번 훈련한다. 스페인만 이런 것이 아니다. 클럽마다 차이는 있지만 영국, 독일, 브라질 등 모든 축구 강국의 클럽들이 비슷한 훈련 시간을 가지고 있다.
1995년 아르헨티나. 여덟 살 소년 메시는 뉴얼스 올드보이스 유소년팀에서 본격적인 축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열한 살 때 성장호르몬 장애 진단을 받은 것이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한 달에 약 1,000달러가 필요했다. 치료를 포기하면 축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메시의 재능을 알아본 FC 바르셀로나가 메시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치료비 전액을 지원했다. 만일 십 대 후반 무렵에 치료가 잘 안되어서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면 메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메시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학교생활을 해왔다. 축구 외에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했더라도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 본 아이들, 못 두드려보고 패배한 아이들
축구 강국의 유소년 클럽에는 축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이와 축구를 취미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뒤섞여있다. 아이들의 인생의 길에 있어서 축구선수는 수없이 많은 문 중에 하나일 뿐이다. 축구를 진지하게 생각하던 아이들도 커서는 축구가 아닌 다른 스포츠 선수가 되거나 법조인 혹은 경영인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문을 찾아다닌다. 흥미 있는 문을 발견하면 문에 다가가기 위한 짧은 계획을 세우고 문을 두드려본다. 문이 열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른 문에 도전할 충분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자신에게 적합한 문을 찾아낸다.
문이 열리면 그때부터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사이 아이는 성인이 되고, 자기의 일을 즐길 줄 아는 전문가가 된다. 어린 시절 여러 방면의 문을 두드려본 경험은 고스란히 자기 분야와 결합하여 통섭의 능력이 된다. 전문 분야 내에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낼 수 있는 T형 인재가 되는 것이다.
1999년 포춘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경영자 잭 웰치(Jack Welch). 그는 치열한 경쟁과 빠르게 패배를 인정하는 방법을 고등학교 하키 선수 시절에 배웠다. 1, 2위가 아닌 것은 패배로 규정하고 미련 없이 치워버리는 그의 경영방침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최고의 회사로 만들었다.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의 대학시절 미식축구 코치 경험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임직원들은 테이블에 가족사진 대신 경쟁사의 라이벌 사진을 올려놓는다. 마치 미식축구 선수의 라커룸에 라이벌의 사진이 붙어있는 것과 비슷하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와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허브 켈러허(Herb Kelleher)도 학창 시절에 미식축구 선수를 했었다. 월마트의 샘 월턴(Sam Walton)은 농구를 했었고 한국 GM의 세르지오 호샤(Sergio Rocha)는 축구를 했었다. 이들은 모두 프로 선수가 되지 않았지만 절망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이들에게 스포츠는 어렸을 때 두드려보는 여러 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아이 뒤에는 인생을 안다고 자부하는 부모가 서있다. 부모는 아이의 적성을 발견하고 목표를 세운다. 예를 들면 메시다. 그다음엔 제2의 메시가 되기 위한 치밀하고 원대하고 완벽한 중장기 계획을 세운다. 아이는 자신의 전 인생을 그 완벽한 계획에 쏟아부어야 한다. 다른 문을 두드려볼 여유는 없다. 그럴 시간에 경쟁자는 한 발 더 앞서 나간다는 강박관념이 부모를 지배한다.
수년 혹은 십여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계획은 성실하게 이행된다. 그리고 단 1%의 아이만이 목표에 다다른다. 99%의 아이들은 다른 문을 두드렸으면 열렸을지 모를 모든 기회를 상실한 채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완벽한 계획? 죽은 계획
위의 이야기에서 아이를 신생기업으로, 인생을 시장으로, 부모를 창업자로, 메시를 페이스북으로 치환해보자. 그러면 영락없이 신규 창업이나 프로젝트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로 바뀌게 된다. 시장이 원하리라 예상되는 완제품을 기획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장기간에 걸쳐 개발하는 것. 많은 기업들이 이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기업의 문제에 스포츠 영재 이야기를 끌어들인 이유는 이 문제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부모가 설계한 중장기 계획에 아이를 강제로 몰아세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짓이다. 그것에 공감한다면 시장이 원하는 완제품을 목적으로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무모한 짓임을 인정해야 한다.
소위 완벽한 계획은 큰 변화 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변하지 않고 오랜 기간 수행되는 계획은 죽은 계획이나 다름없다. 전략의 귀재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이런 말을 남겼다.
“좋은 계획을 망치는 최대의 적은 완벽한 계획을 만들려는 꿈이다.”
그렇다면 좋은 계획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최고의 천재로 칭송받는 에드워드 위튼(Edward Witten)의 삶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 1966년 – 15세에 브랜다이스 대학 역사학과 입학. 언어학 부전공.
- 1971년 – 브랜다이스 대학 졸업. 정치 저널리스트 활동.
- 1972년 – 민주당 조지 맥거번 참모. 조지 맥거번 낙선함.
- 1973년 – 위스콘신 대학 경제학과 입학. 한 학기 후 중퇴. 프린스턴 대학 응용수학과 입학. 물리학과로 전과.
- 1976년 –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받음.
- 1979년 – 프린스턴 대학 정교수로 임용.
- 1987년 –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 교수.
- 1990년 – 필즈상 수상.
- 1995년 – M 이론 발표. 이론 물리학계 일인자가 됨.
위튼은 흥미 있는 분야가 생기면 목표를 향한 단기 계획을 세우고 도전했다. 정치에 입문하고자 했을 때는 뛰어난 정치 저널리스트를 목표로 했다. 그러자 조지 맥거번의 참모가 되는 길이 열렸고 위튼은 그의 당선을 목표로 열심히 일한다.
1972년 조지 맥거번은 낙선했다. 선거 참모로서 위튼의 일정은 끝났다. 위튼에게는 정치 쪽으로 다른 계획을 세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방면으로 도전할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위튼은 닫힌 문에 집착하지 않고 문이 열리는 진로를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의 계획은 항상 살아서 움직였다. 그는 그렇게 아인슈타인보다 뛰어나다 인정받는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었다. 같은 물리학자인 아내 키아라 내피(Chiara Nappi)는 이렇게 말한다.
“에드워드는 생각의 장벽이 없는 것 같아요.”
계획은 한 가지 일에 집중 전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계획 이외의 것을 생각 못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위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계획 따위의 장기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 장기 계획은 일정이 끝나기까지 계획 외의 것을 생각 못하게 하는 아주 긴 장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단기 계획은 일정이 끝난 후 주변 상황을 살피며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좋은 계획이란? 살아있는 계획
좋은 계획이란 살아있는 계획이다. 살아있는 계획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계획이다. 시장이 어제, 오늘이 다르고 심지어 오전, 오후가 다르므로 계획도 시장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계획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계획의 길이는 짧아야만 한다.
장기 계획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수정할 수 있는 기점들을 두면 되지 않느냐 할지 모르겠다. 장기 계획이 왜 장기 계획인가? 목표가 저 멀리 있기 때문이다. 목표가 멀리 있는 한 그런 말들은 허상에 불과하다.
멀리 있는 목표는 그 목표가 달성되기까지 생각의 장벽을 형성한다. 생각의 장벽은 변하지 않는 죽은 계획을 만든다. 그러므로 일정이 빨리 끝나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린 스타트업 방법론은 이 부분에서 좋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 일명 MVP다. MVP는 모든 기능을 갖춘 완성품의 대척점에 있다. 제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통해 제품을 완성해가는 것이 MVP의 목적이다.
처음에는 시장이 만족하리라 예상되는 한 두 가지 기능으로 시작한다. 반응이 나쁘면 방향을 전환하거나 새로운 제품을 모색하고, 반응이 좋으면 제품을 개선시켜 나간다. 이런 사이클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마치 문이 열리는 대로 물 흐르듯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때의 사이클은 단기 계획이다. 사이클 하나가 끝날 때마다 시장의 반응을 듣고 어디로 향할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계획은 살아 움직이게 되고 제품은 점점 시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완성되어간다. 재미있는 것은 완성에 가까워진 제품이 어떤 모습일지 창업자도 소비자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튼도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자신이 물리학계의 전설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이 주먹구구식이라 느껴진다면 한 번 생각해보라. 수년간 변하지 않는 계획대로 제품을 만드는 것과 이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주먹구구인가? 수년 혹은 십여 년 후에야 실패가 결정된다면 기업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신생기업이라면 재기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실패를 하더라도 작은 규모의 실패를 빠르게 경험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격이 작을 경우 기업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살아있는 계획을 세워라. 계획은 짧을수록 좋다. 목표는 가까울수록 좋다. 살아있는 계획은 당신의 팀이 즐기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고객에게는 만족스러운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선사할 것이다. 열린 문으로 나아가라. 그것이 당신의 비즈니스가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 잠언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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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대한축구협회 2015년 자료
- 에릭 리스, [린 스타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