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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최진영의 단편집 『팽이』 속 네 작품, [어디쯤] [엘리] [월드빌 401호] [창]에 관하여

최진영의 『팽이』(창비, 2013.)

최진영의 『팽이』를 언급하기에 앞서, 내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반 독자의 위치에서 내게, 문학은 무당이 쏟아내는 방언이자 디스토피아를 삼킨 유토피아와도 같다. 가슴이 답답할 때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줄 이가 필요했다. 이 막막한 마음이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형태를 드러낼 때, 무색무취의 내 사연이 드디어 무당을 만나 방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문학은 아주 손쉽게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탑승권이었다. 하지만 문학이 소개한 세상은 마냥 달콤하진 않았다. 오히려 현실의 차가움을 응축시켰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1. 모두 마조히스트인가

문학이 소화해 놓은 차가운 현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은 조명을 끄고 어둠의 시간으로 접어든다.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을 이 세계를 곰곰이 되돌아본다. ‘원룸·비정규직·편의점’으로 일컫는 가난한 청춘의 삼 요소가 현실의 나와 똑같을 때, 난 이들의 세계를 그린 소설에서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읽는다고 현실이 달라지지 않을뿐더러, 구차하게 자신의 사연만 주절댈 뿐이라는 허무함도 따라온다. 대체 난 이러한 문학에서 무엇을 보려 한 것이며, 무엇을 취하려고 한 것일까.

편의점 (사진: TomEats, CC BY NC ND)
편의점 (사진: TomEats, CC BY NC ND)

“만약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었다면, 애초에 문학은 존재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넘나들 수 없는 인간의 한계야말로 문학이 타인의 고통에 드리워진 은밀한 프라이버시를, 알면서도 침해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90쪽)라고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말했다. 그러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바로 나와 지척에 있는 인물들이라면,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게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여기서 ‘고통’은 과연 누굴 향한 공감이며, 누구와의 교감일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 누군가와 교신한다. (사진: cso237, CC BY SA)
우리는 문학을 통해 누군가와, 혹은 나와 내밀하게 교신한다. (사진: cso237, CC BY SA)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 여러분은 예술을 잃는 셈이다. 예술은 도덕 너머로 나아간다. 여러분의 공감의 범위가 곧 여러분의 예술의 범위다”(『신화와 인생』402쪽) 라는 신화확자 조셉 캠벨의 뜻대로 ‘예술적 대상’은 ‘교정을 위한 교훈’을 갖춘 작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장 속에서 ‘여러분이 만약 선과 악을 구분할 경우’를 ‘여러분이 만약 나와 타인을 구분할 경우’로 바꾼다면 우리는 문학을 잃는 셈이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선 공감의 범위가 곧 예술의 범위이며 문학의 범위에도 속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학자들이 언급한 문학에서의 공감이란, 나와 타인과 세상을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획득하는 고통의 공유일지도 모른다. 순서를 바꿔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읽기를 통해 고통을 마주한다는 건 고통의 안팎이 어디에 있든 이미 예술이라는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과 다름없다.

2. 이 공터의 미친년은 나야

이렇다 할 사건도 스펙터클한 서사도 없는 ‘잉여’의 일상이 문학으로 들어오면, 잉여의 마음은 발언권을 얻는다. 마치 든든한 변호사를 만난 것 마냥 유려하고 자의식 넘치는 필체로 생각이 기록된다. 시간을 죽이며 흘러가던 우리의 일상도 문학적 틀 안에서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며 형체를 얻는다. 그러다 내 마음을 딱 집어주는 문장을 만나면, 우리는 그 문장을 블로그에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적고, 내 마음(가치관)을 알아주길 바란다. 21세기에, 소설의 미문이란 대중적 공감 지표를 나타내는 온도계이며, 현대인의 감성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활자로 된 이모티콘이다. 음식평론가가 국물 한 수저로 음식의 맛을 가늠하듯, 우리는 미문이란 상처의 조각으로 작품이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수위를 짐작한다.

하나의 소설에 가슴을 확 파고드는 문장이 없다는 건, 관찰력의 문제인가 문장력의 문제인가. 헛헛함을 채워주지 않는 문학 앞에서 우리는 이 헛헛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리송해진다. 그런 점에서 최진영의 『팽이』속 단편들은, 보통의 단어와 단문으로 구성된 서사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밑줄 그을 기회를 넉넉히 주지 않는다. 최진영의 『팽이』는 말이 수려하지 않다. 오로지 서사적 형식의 힘으로 하나의 분위기와 세계를 만들어낸다. 팽이는 쳐야 돌아간다. 팽이 접시에 붙은 두 가지 색깔의 종이가 속도를 만나야만 계획했던 색채를 드러낸다. 일상의 단어와 단문이 속도를 만난다. 최진영의 단편 속 세계는 그렇게 독자를 몰고 가다 미완의 세계를 보여준다. 독자를 출구 앞으로 데려다 놓은 후 그 앞에서 창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드넓은 공터, 하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다. (사진: thomasheylen, CC BY NC ND)
드넓은 공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른다. (사진: thomasheylen, CC BY NC ND)

[어디쯤] [엘리] [월드빌 401호] [창]은 여행이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미완의 결말로 구성되어 있다. [어디쯤]은 아버지가 준 약도를 들고 미로 속에서 헤매는 ‘나’가 내리막길 앞에 당도하면서 “아직이냐”는 아버지의 물음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엘리]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28세 ‘나’가 50살 먹은 암컷 코끼리 엘리와 어둠 속에서 여행을 떠나며 끝이 난다. [월드빌 401호]는 애완견 종철이를 학대하는 히키코모리 ‘나’가 집에서 나온 뒤 세상의 종말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창]에서는 정규직 사원들의 따돌림에 못 이겨 직장을 그만둔 비정규직 ‘나’가 자취방 창으로 이웃집 커플의 섹스를 훔쳐보다 괴한의 침입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끝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열려있지만 차마 ‘해피엔딩’을 꿈 꿀 수 없는 끝이다.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일련의 단편들은, 온전한 여행기를 통해 내가 변신할 기회를 좀처럼 선사하지 않는다.

특히 이 네 단편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어디쯤]의 나는 남들이 무시하는 회사에 다니는 남성으로 부모님은 그에게 공무원 시험을 종용하며, 여자 친구는 결혼을 닦달한다. [엘리] 또한 영화감독을 꿈꾸며 가족들 몰래 코끼리를 키우는 28세 남성이 주인공이다. [월드빌 401호]와 [창]에서도 이들이 히키코모리와 비정규직 여성이라는 간단한 이력만 드러날 뿐, 옷차림, 집안, 학력, 직장의 업무 등 캐릭터의 현실성을 살려줄 배경들이 대거 생략되어 있다. 인물들에게 끼어 맞출 구체적 배경이 없다는 건 소설 속 주인공이 괄호 안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

서사적 문맥 중간에 ‘나’라는 괄호가 있고, 독자들은 그 괄호 안에 자신을 새겨 넣는다. 주인공의 배경을 단순화함으로써 독자들은 수월하게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한다. 더욱이 최진영의 단편들은 1인칭 독백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의 서사’를 상징성을 띈 공간적 서사로 전환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단편 속 주인공들은 마치 동화나 민화 속 주인공처럼 통과제의 앞에 놓이게 된다. 통과제의에서 주인공은 떠나고 만나는 과정을 통해 ‘변신’의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최진영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가장 먼저 ‘공간’을 떠날 것을 요구받는다.

3. ‘프리퀄’이거나 ‘프롤로그’이거나

[어디쯤]의 ‘나’는 아버지가 준 약도 속 ‘성원빌딩(아버지의 글씨가 정확치 않아 선원빌딩으로도 보인다)을 찾아 길을 헤맨다. 길을 헤매고 있는 그가 자신의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도달 못 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은 아버지,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할 때이다. 왜 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아버지가 준 약도 하나만 들고 길을 가야만 하는 나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네, 아버지 근데요.
말해라.
……
못 찾겠니?
…… 거기 꼭 가야 합니까?
왜, 힘들어?
왜 가야 합니까?
가보면 알아. 손해 보진 않아.
아버지 약도가 이상해요.
니가 못 찾으니 그런 거지.
아뇨. 사람들도 다들 모른다 그러고.
못 가본 사람들이니 모르는 거지.
아버지는 가보셨어요?
서둘러라. 많이 늦었어. 도착하면 전화해.
– [어디쯤] 79쪽

그곳에서 만난 젊은 남자와 나는 언쟁을 벌인다. “뭘 알고나 가는 겁니까, 그쪽은/나도 돈 없어요. 다 쓴지 오래야/어디가 어딘지 알고나 가는 거냐고 그쪽은/당신이 따라오고 있잖아”(87쪽) 남자를 따라가며 두려움이 엄습해 올수록 아버지의 전화는 잦아진다. “아버지는 가보셨어요?/시간이 많이 늦었다/아버지는 가보셨냐구요/……/아버지는 어디 계세요?/내 걱정은 마라. 난 괜찮다./아뇨.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느냐구요”(89쪽) 그리고 이러한 통화 내용은 소설 말미 ‘나’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아직이냐? 아버지가 묻는다”(92쪽)

[어디쯤]이 공포의 전초전이라면 [엘리]는 동화적 전초전에 해당한다. 차이라면 [어디쯤]의 주인공이 도달했음에도 더 나은 것을 찾아 떠날 것을 강요받는 인물이라면, [엘리]는 다 비워버린 후 암코끼리와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하는 자발적 여행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엘리]의 ‘나’는 대든다. 나는 엘리의 똥을 치우며, 가족들에게 ‘실패자’ ‘개차반’으로 낙인찍힌 현실을 받아들이며 ’운명은 상호배반적이다’라는 명제를 품에 안고 산다.

엘리도 화가 나면 나를 밟아 오징어포처럼 만들어 질겅질겅 씹어 먹을지도 모른다. 아, 생각만 해도 입안이 쩍쩍 마른다. 엘 리가 신경질을 낼 때마다 나는 잔뜩 졸아서, 하지만 오기로 똘똘 뭉쳐서 소리 지른다.
먹어! 먹어보라고, 자식아! 나 술 담배 엄청 하는 거 알지? 먹어봐! 당장 먹어치우라고!
– [엘리] 128쪽

그러나 그런 나에게 가족과 애인은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똥처럼 한가득 싸 놓고 간다. 부모와 형제 애인이 요구하는 질문에서 몸은 도망칠 수 있어도 마음은 도망치지 못하는 상태. [어디쯤]과 [엘리] 화자의 공통점이다. 엘리의 ‘나’는 “막내아들이 산 아래 버려진 집에서 코끼리와 살고 있다는 걸 안다면 엄마는 심장을 토하며 울 것이다. 정신병원에 데려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엄마를 생각하면 죽고 싶다.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게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지긋지긋한 죄책감. 애인한테도 이런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너무 좋아하면 죄책감과 원망은 옵션으로 붙는 걸까?”(138쪽) 라며 제 마음속 가족의 존재를 죽이지 못한다.

“내가 영화를 만들어내더라도 형은 나를 실패자라고 하겠지.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이상, 형한테 나는 영영 실패자다. 정말 웃기는 짬뽕이다”(138쪽) 시작한다 해도 ‘실패자’로 불릴 수밖에 없음을 알지만, 나는 떠난다. “그들이 나와 엘리를 충분히 의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꿈을 의심하고 진심을 의심했듯(139쪽)”라며 사람들이 의심할 만한 뭔가를 해내기 위해 엘리와 아프리카로 간다.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믿을 건 엘리뿐이다” [어디쯤]과 [엘리]는 ‘오르막길 끝에 내리막길’ ‘액정에 까만 화면’에 다다르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의 ‘변신’은 만남이 아닌, ‘그곳’이라는 좌표에 도달해야만 이뤄진다. 그렇기에 [어디쯤]과 [엘리]는 아직 만남을 통해 변신이 이뤄진 적 없는 전초전으로서의 여행기이며, 영웅 서사가 시작되기 전의 프리퀄일 뿐이다. 그것도 프리퀄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아주 적게 가진, 프롤로그로만 끝날지도 모르는 전초전. 입장은 가능하지만 출구가 없는 여행기.

4. 문이 닫히면 신께서는 반드시 창문을 열어 놓으신단다

When the Lord closes a door, somewhere He opens a window.
(마리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서)

[어디쯤]과 [엘리]가 ‘떠남’에 대한 이야기라면, [월드빌 401호]과 [창]은 ‘머무름’에 대한 이야기다. [월드빌 401호]과 [창]에는 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창’이 나온다. 주인공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이들은 자신의 집에 자기 몸을 가둔다. 그들에게 세상은 ‘창’과 같다. 창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창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지만, 동시에 나를 찌르고, 위협하고, 자극하는 이중적인 탈출구다. 이들에겐 당당히 출입할 ‘문’이 없다. 이들에게 세상의 ‘문’은 당당한 워킹을 허용하지 않는다.

[월드빌 401호]의 ‘나’는 히키코모리다. 주인 있는 개를 데리고 와 제 이름과 똑같은 ‘종철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혼자 있긴 싫어서. 사랑을 많이 받은 개 같아서. 분노가 치솟을 때 나를 부수거나 때리긴 싫고. 비상식량 같은 것도 필요하니까”(157쪽). ‘괴물’ 때문에 집 안으로 숨어든 나는 쓰레기에 엎드려 잔다. 종철이를 죽일 듯이 패고, 종철이에게 자신의 정액을 먹이면서 그렇게 종철이와 싸우면서 살아간다. “나 말고 너 말이야, 이 개새끼야. 비칠비칠 일어나는 종철이가 꼭, 삼년 전 나 같다”(155쪽) 그는 자신과 싸우며 살아간다. 창밖의 정적과 아련한 빛 속에서 ‘나’는 창문을 열어볼까 싶지만,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

창문을 열기 두려운 깜깜한 방 안에서 (사진: Dick Thomas Johnson, CC BY)
창문을 열기 두려운 깜깜한 방 안에서 (사진: Dick Thomas Johnson, CC BY)

종철이는 창에 머리를 박으며 유리를 깨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불길하게 울며 창으로 온몸을 내던지는 종철이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듯이 위협도 해봤지만, 소용없다. (168쪽)

‘나’는 내 세계를 지키고 싶어 창을,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 내가 지키고자 한 세계가 남들이 보기에는 지킬 가치가 전혀 없는, 초라하고, 아무 보잘것없는 폐허와 같은 세계임을 자각한다. 이는 마치 <어디쯤>의 화자가 실업을 걱정하며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사람들이 내가 다니는 직장을 얕잡아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얕잡아보는 그 일마저 뺏으려 해서“(75쪽)라고 억울해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종철이가 머리를 박는 ‘창’은 바로 그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세계를 ‘쿵쿵’ ‘와장창’ 소리로 체감하게 하는 타임 벨이다. 여기서 나의 절망은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마지막 보루였던 ‘나의 세계’마저 긍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 세계마저 빼앗아버리는 현실이다.

나는 내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내 세계엔 도대체 뭐가 있나.
종철이와 쓰레기와 악취와 벌레와 미쳐버린, 아니 이미 죽은 건지도 모를 나.
내가 지키고자 한 것은 뭐였을까. (169쪽)

나는 쓰레기와 악취와 벌레와 미쳐버린 내가 있는 월드빌 401호를 벗어나, 문을 연다. 나는 ‘머리를 질질 끌면서도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종철이를 따라 나도 다시 한 발, 한 발.’ 걷지만 내 앞에는 ‘검은 하늘, 뻑뻑한 대기, 부서진 도시’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망설인다. 죽어가는 종철이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갈 것인지. 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그 경계에서 나는 개새끼 종철이에게, 개새끼보다 못한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똑같아…… 그래도, 나갈래?”

[창]의 ‘나’는 ‘당하고 도망치는 일’을 자기 인생의 본질로 바라본다. 회사의 유일한 비정규직이자 왕따. 나는 통유리 사무실을 쓰는 실장의 바로 앞에 앉아서 일한다. 내 컴퓨터 창은 여과 없이 실장에게 노출되고, 정규직 직원들은 메신저 창에서 ‘왜 사나 싶은데 왜 죽지도 않을까 싶은'(224쪽) 나를 욕한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창’ 앞에 앉아야만 하고, 메신저 창의 안주거리가 되어야 한다. 나를 학대하는 ‘창’이 없으면 난 이 세상에서 기껏해야 몇 개월 정도만 버틸 수 있다. 내 몸은 창 밖에 우두커니 서 있지만, 나란 대상은 창 안에서 더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폭탄 스위치를 누르듯'(225쪽) 회사 컴퓨터의 모든 폴더를 삭제시킨 후 회사를 나온다. 창을 깨뜨리고 세계1을 부숴버린 채 집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피신처인 그녀의 자취방도 평온한 안식처의 역할을 해내진 못한다. 나는 ‘창’ 없이는 이 세계의 결핍을 이겨낼 수 없다. 나는 창으로 건너편 아랫집 창에 비친 연인의 정사를 훔쳐본다. ‘눈을 감고 한 손을 팬티 속에 넣으며 가슴을 움켜잡는데'(230쪽) 문득 수십 개의 눈동자를 느낀다. 누군가가 자신의 창을 엿볼 것을 상상하자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다짐한다. ‘다시는 남의 창을 엿보지 않을 거다. 저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 따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커튼을 치고 집 안의 문을 꽁꽁 잠근다'(230쪽). 창의 이중성 앞에서 나는 자신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그러나 창밖에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리자 얼른 Window를 켠다. ‘귀신이라도, 괴물이라도 좋으니 제발 사람만은 아니길'(232쪽) 빌며 소녀시대 동영상을 튼다. ‘그것이 비록 속에 닿지 않는, 네모난 창 속 0과 1의 세계일지라도'(232쪽)

하지만 그녀가 연 ‘창’ 또한 진정한 의미의 출구가 되지 못한다. 아홉 명의 소녀시대 멤버가 자신의 옥탑방에 놀러 오는 상상을 하며 ‘나’는 이불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린다. ‘조금만내 게친절하 면어때 무뚝뚝 한말투너 무아파난 이런게익 숙해져 가는건정 말싫어 속상해 다. 다. 다. 다다다'(233쪽)하면서 어깨춤을 추지만 ‘슛슛슛’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는 그녀의 자취방 ‘창’을 깨버린다.

와장
창. 창이
깨진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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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빌 401호]가 “똑같아…… 그래도 나갈래?”라는 자문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예고한다면, [창]은 도망가기 위해 창을 열고 닫던 나 앞에서 창이 와장창 깨지는 모습으로 차마 상상하기 싫은 ‘다음일’을 상상하게 만든다. 두 단편 속 ‘창’은 주인공들이 택할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해결안 중 하나지만, 이 해결안들은 온전한 해결안도 아닐뿐더러 해결이 더 절망스런 문제로 치환된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에서 고시원에 살던 딸은 복도의 살인마, 그리고 살인마가 저지른 화재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엌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 밖은 분명 낭떠러지만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생존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월드빌 401호]과 [창] 속의 ‘창’은 출구와 희망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창밖의 세계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온다. [어디쯤]의 약도와 [엘리]의 엘리도 해결책과 위기라는 상징을 동시에 가진 ‘창’일 뿐이다. 여기서 창이라는 운명은 상호배반적이다. 밖의 세계를 목격한 이상 우리는 더 큰 고민에 빠진다. 운명은 ‘창’을 쥐여주며 지금 내가 발붙인 세계를 ‘공포’로 만든다. 그렇게 운명은 ‘공간’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만 공간 밖의 세계 또한 최고의 대안이 아닌 주어진 대안일 뿐이다. 그리고 이 창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독자 차원의 ‘통과제의’에 놓이게 된다.

5. 통과제의로써 부정의 문학

최진영의 단편들은 미완의 해결을 통해, 해결이 다시 문제가 되는 형식을 하고 있다. 간결해서 더 상징적인 위 단편들은 이런 통일성을 통해 독자를 대서사시의 문 앞으로 몰고 간다. ‘이 희망 없는 결말 앞에서 너는 프롤로그로 네 이야기를 끝낼 것이냐, 아니면 한 편의 프리퀄로 네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이냐’ 열린 결말 앞에서 괄호 안에 들어간 독자들은, 이 게임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통과제의가 되지 못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통과제의 앞에 데려다 놓는다. 죽든, 무릎 꿇든, 후회하든, 상처받든 우리는 이야기를 끌고 가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변신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창에 매달리든, 떨어지든 말이다. 그리고 그 창에 매달린 자신을 상상하면서.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문학’을 통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마주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왜 하나같이 고전문학들은 해피엔딩이 아닌 부조리한 결말을 취하고 있을까. 고전문학 속 운명은 주인공들을 닦달한 뒤 심술궂게도 그들의 손아귀에 행복을 쥐여주지 않는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주인공 팻은 아내의 외도로 우울증을 겪는다. 그는 문학교사였던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서양고전 문학을 탐독한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던 그는 창문 밖으로 책을 집어 던지고는, 부모님 앞에서 책의 결말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빌어먹을 책 같으니. 니키가 저 딴 책을 가르치는 게 믿기지 않아요. 설명해 드릴게요 (중략) 둘은 같이 춤추는 걸 좋아해요. 지루하지만 행복해 보여서 좋아요. 거기서 끝날 것 같죠? 아니, 다른 결말이 있어요. 캐서린이 죽어요. 아빠. 세상은 충분히 험난하고 힘들어요. 충분히 힘들다구요. 긍정적으로 좀 끝나면 안 돼요? 해피엔딩이면 어디 덧나요?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던져진 헤밍웨이의 책, [무기여 잘 있거라]
던저진 책
그리고 영화 말미, 니키는 팻에게 내가 가르쳤던 책들을 모두 읽어줘서 감동했다는 편지를 보낸다. ‘부정적인 면이 있다곤 하지만, 삶의 고난이 잘 반영돼있고 학생들에게 삶을 준비시키는 데는 정말 좋은 작품이야’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문학을 통해 나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일은 창밖의 세상에 잘 뛰어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한국 소설에서 젊은 주인공이 넘나드는 공간의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그 공간마저 아주 작은 곳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주는 ‘통과제의’란 만남을 통한 ‘변신’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사. 타인과의 만남조차 차단된 서사를 우리는 ‘통과제의’로서의 문학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장 루세는 통과제의로서의 글 읽기에 대해 “독자이자, 청취자이고, 관찰자인 나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느낌도 들지만 동시에 부정된다는 느낌도 든다. 작품 앞에서 나는 사람들이 보통 습관적으로 느끼고 살아가듯이 똑같이 느끼고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어떤 변모에 끌려들어, 나는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는 파괴에 참여한다. 작품을 주시한다는 것은 문턱을 넘어서서 시 속으로 들어가 특정한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통과제의와 문학』시몬느 비에른느 144쪽)고 말했다.

변신의 기회를 주지 않는, 공간을 벗어나는 전초전을 그린 최진영의 네 단편들은 ‘부정의 문학’이다. 관찰자인 독자가 ‘읽기’를 통해 아주 쉽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느낌’을 얻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나와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부정되고, 나의 공간마저 부정되고, 탈출마저 부정되며, 변신마저 부정되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그 ‘부정의 상징적 서사’를 통해 독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허물을 벗기를 욕망하고 상상한다. 독자는 ‘슬픈 희망’의 끝자락을 잡아내는 행위를 통해 ‘통과제의’ 앞에 선 자신의 현실을 재발견한다. 높은 가독성은 독자가 ‘통과제의’라는 벽 앞에 부딪힐 때의 충격을 높여준다.

팽이 (사진: Kim Eung-seon, CC BY NC ND)
팽이 (사진: Kim Eung-seon, CC BY NC ND)

[팽이]의 소녀가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고, 구구단을 외우고, 알파벳을 배울 때. 그녀의 오빠는 하나의 의식처럼 팽이를 치고, 그녀와 그녀의 오빠가 자람에 따라 방은 점점 작아지고, 누군가는 떠난다. 팽이가 수차례 채찍질을 견디며 나이를 먹듯, 소녀도 그렇게 어른이 되고 이 방을 떠나야만 한다. 떠나지 않는 팽이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디쯤] [엘리] [월드빌 401호] [창]의 주인공들은 [팽이]의 소녀처럼, 슬픈 성장 동화처럼 ‘떠남’에 습격당한다. 그래서 이 네 개의 단편은 벽에 부딪히는 팽이처럼, 벽을 찧으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끝날 수 없다. 전초전에서, 창에 매달린 우리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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