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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한때 지하철에서 한 학생에게 “친구가 되자. 영어회화 실습을 해준다면 나도 당신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경희대 강사였던 박 교수는 그에게 한국어로 “내 영어 솜씨로 누굴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고, 그 대답을 들은 학생은 실망스러워하면서 떠났다고 말했다. (한겨레 1999년 5월 25일자 9면)

알다시피 박 교수는 러시아 출신의 한국인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일단 서양인을 보면 미국인일 것이라는 고정 관념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정작 해외에 나가서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하는 질문을 들으면 기분 나빠 하면서 말이다.

이런 식의 대접을 한국을 방문한 소수의 비영어권 출신들 무명 인사들만 겪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나 한 세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도 한국에서 겪는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권 국가 출신이 아닌 한,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

외래어 표기법 이야기가 아니다. 로망스어(라틴어에서 갈라진 남유럽 언어)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나오는 경음(된소리)화 이야기도 아니다. 단순히 모든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는 문제가 이 나라에는 있다.

알베르 카뮈, 앙리-카르티에 브레송 Albert Camus, Paris 1947, ©Henri Cartier-Bresson
알베르 카뮈, 앙리-카르티에 브레송
Albert Camus, Paris 1947, ©Henri Cartier-Bresson

올해는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탄생 100주년이다. 이를 앞두고 카뮈 전집을 냈던 책세상은 일러스트 특별판을 출간했다. 카뮈 100주년이라면 유명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이벤트라도 벌여 판매에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터이다.

사실 카뮈는 몇 년 전에도 국내 언론에 등장할 기회를 잡은 적이 있다. 2008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서울대생과 하버드대생이 즐겨 읽는 책 100선을 뽑아 비교했을 때 하버드대생 쪽 목록 16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넘으면 게임도 못 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이 목록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친절하게도 링크를 단다. 여기서 확인하기 바란다.

목록에서 카뮈를 찾지 못했다고 자신을 스스로 탓할 필요는 없다. 알베르 카뮈는 그 목록에 있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카뮈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작가 앨버트 카무스이며, 그 작가의 작품은 플레이그(Plague)다 (당연히 ‘프레이그’는 카뮈의 [페스트]를 가리킨다).

열혈 저그 유저 앨버트 카무스? (사진은 스타크래프트 저그 유닛 디파일러의 ‘플레이그’ 기술)
©Blizzard

카뮈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면서 1950년대 국내 전후 문학에 끼친 영향도 큰 인물이다. [이방인]이나 [페스트]와 같은 작품명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인물이 앨버트 카무스로 취급받는 나라, 그곳이 한국이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노벨상 수상자가 또 있다.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망명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기는 하지만, 독일 태생이다. 그러므로 그는 앨버트 아인스타인이 아니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라고 불러야 맞다. 앨버트 슈바이처도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옳다.

다른 노벨상 수상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는 군터 그라스로,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진-폴 사르트르로,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헨리 벅슨으로 불리기 일쑤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월터 벤자민,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에릭 프롬이 된다.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Vincent Cassel)은 빈센트 캐셀, 에스파냐(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는 안토니오 고디다. 나라 이름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불어권 국가인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마다가스카가 된다. 믿기지 않는다고? 구글 검색창이나 포털 뉴스 검색창에 저 이름들을 검색해보라.

최근에 영화가 인기를 끈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의 원작 소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이름을 빅터 휴고(Victor Hugo)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어린 시절 이 소설의 축약판 제목으로 흔히 쓰이기도 했던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도 진 밸진이 돼야 하지만 이건 익숙한 탓에 그렇게 읽는 사람은 없다. (영어권에서는 존 밸진이라고 읽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베르(Jabert) 형사와 코제트(Cosette)는 재버트와 코셋이 되는 운명을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가 ‘카잔차키스’가 아니라 ‘카잔차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에게 모든 나라의 고유명사를 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주변의 해당 언어 전공자들을 수배해 봐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약간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 가장 익숙한 영어 이름마저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언어학자이기도 한 고종석은 마시뱅크스(Majoribanks)나 팬쇼(Featherstonehaugh)처럼 흔한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읽는 괴상한 이름들을 소개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레이건(Reagan) 전 미국 대통령마저 배우 시절 국내에서는 리건이라고 불렸다. 대통령이 돼서야 비로소 레이건으로 제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한 축구 선수는 호나우딩요와 호나우디뉴, 호나우지뉴 등으로 각기 달리 불리고 있지만 이 중에 어느 발음이 옳고 어느 발음이 맞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Albert Camus는 인명사전이나 불어사전이 아니라 웬만한 영어사전만 찾아봐도 표제어로 올라 있다. 국내 포털에서 서비스하는 영어사전에도 당연히 있다. 거기 없다면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 용례찾기를 이용하면 된다. 마시뱅크스나 팬쇼는 없지만 상당수 고유명사 용례를 제공한다. 국립국어원의 표기로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Camus를 카뮈로 적을지 카뮤로 적을지 까뮈로 적을지 까뮤로 적을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인류에 뛰어난 작품을 남겨 준 한 프랑스 작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예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유럽에서도 서로의 고유명사를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가령 프랑스 사람들은 조지 부시(George Bush) 전 미국 대통령을 조르주 부쉬라고 읽고, 철학자 헤겔(Hegel)은 에겔,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쉐 게바라라고 읽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같은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경우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말하는 ‘빅터 휴고’나 ‘앨버트 카무스’와는 다르다. 가령 마오쩌둥(毛澤東)을 우리가 모택동이라고 쓴다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풍신수길이라고도 왕왕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을 호금도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습근평이라고 읽는다. 북한까지 갈 것도 없이 휴전선 남쪽에서도 당장 베이징(北京)과 도쿄(東京)를 때로 북경이나 동경으로 읽지 않는가. 그러나 상황을 바꿔서 만약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을 누군가 중국 식으로 리밍보(lǐmíngbó)라고 쓰고 읽는다면, 우리는 그의 발음이 옳다고 할지는 의문이다.

다시 박노자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서울에 온 한 러시아인에게 영어회화 실습을 해 달라는 딱한 학생은 우리가 얼마나 영어에 침윤됐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가 그 답을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일제 시대와 한반도의 이북과 이남을 두루 거친 이인국 박사의 일생을 조명한다. 엄청난 권력의 변화에도 이인국이 쉽사리 적응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민한 상황 판단 능력의 힘일 터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어의 힘이 있었다.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이 그의 자산이라면 자산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어를, 소련이 진주한 평양에서는 러시아어를, 그리고 1.4 후퇴 이후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던 서울에서는 영어를 했다. 평양 시절 아들에게 노어(러시아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는 장면도 나온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우리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영어가 중요한 권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력의 중요성에 비하면 노벨상 정도를 수상한 한 작가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box type=”info”](편집자주: 원어 고유명사 표기 방식에 관해 본 기사에 언급된 내용 너머로도 발생하는 여러 세밀한 논점 관련, 댓글 토론 참조.)[/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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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1. 근데 이 또한 유럽만 보는 건 혹시 아닌가요… 가까이 중국 일본 작가나 학자로 가면 더 안드로메다…

  2. 리서치를 상당히 많이 해서 쓰신 글인 것 같고 좋은 글이긴 한데 결론을 좀 무리하게 도출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마이다스, 허큘리스, 플로렌스 등 원어 발음 대신 영어식 발음으로 표기하는 예가 종종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걸 가지고 단순히 영어 중심이다 미국 중심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기가 애매한 게, 이런 경우는 대부분 원 언어 발음이 이렇고 영어 표기 발음이 저런데 그 둘 중에서 영어식/미국식 발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영어식 표기라는 점을 아예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실수”를 근거로 팍스 아메리카나니 심지어 꺼삐딴 리까지 언급하는 건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최근까지만 해도 번역서 등에서 제목이나 저자명을 포함한 외래어를 표기할 때 원어를 병기하는 예가 굉장히 드물었습니다. 번역서의 경우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죄다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번역서만 보아서는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조차도 원 언어로 어떻게 표기하는지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서를 다시 우리말로 재번역하던 시절에 나온 책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저 같은 경우 어렸을 적에 소설책에 “레미제라블”이라고 제목이 찍힌 것만 봐 오고 자랐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인가까지 이게 원래 두 단어로 된 말(Les Misérables)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제목이 무슨 뜻인지는 더더욱 몰랐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문고판 책들이 이 소설을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내놓았기 때문에 이번에 레미제라블 뮤지컬 영화가 세간의 주목을 받자 각종 포털 사이트 댓글에는 “아~ 레미제라블이 장발장 이야기였어?” 라는 웃지못할 고해성사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신문 기사 등에도 외국 사람의 이름 옆에 원어 표기를 병기하는 예는 여전히 극히 드뭅니다. 요즘 나오는 번역서에는 그나마 책 표지를 까놓고 보면 출판 정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원제목과 저자 이름을 원어로 성실히 표기해 주는 편이고 겉표지에도 원어 제목이 가끔 등장하지만 장식을 위한 그래픽 요소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름들도 원어 표기를 갑자기 보면 이게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에 앙리 2세라는 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배웠지만 축구 선수 등에 씌어 있는 Henri를 처음 보고 이게 누군가 싶었을 것이고 프로게이머 베르뜨랑은 알았지만 이게 버트랜드 러셀의 이름과 동일한 Bertrand라는 사실은 몰랐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알아도 Bernard Werber라고 써 놓으면 딴 사람인 줄 알 겁니다. 이것은 비단 비영어 제목이나 이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영어에서 온 외래어나 표기도 마찬가지죠. 일례로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Anne of the Green Gables라는 제목을 보면 이게 “빨강머리 앤”이란 사실을 모릅니다.

    제 논지에서 약간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외국 이름에 대한 표기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굳이 비영어 이름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국인들의 이름들도 정확한 발음을 몰라 얼렁뚱땅 표기하는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Alan Greenspan을 그린스팬이 아닌 그린스펀이라고 표기한 예가 대표적이고 (저 역시 여기서 외래어 표기법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발음을 명백히 잘못 안 채 외래어 표기법을 잘못 적용한 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후의 CEO인 Marrissa Mayer를 발음하는 법을 몰라 마이어가 아닌 메이어로 표기했던 사례, 하버드 대학 교수 Clayton Christensen의 경우 Christiansen과 동일하게 크리스천슨이라고 발음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크리스텐슨이라고 명백히 오기한 예, 그 밖에도 Stephen을 스티븐이 아닌 스테판이나 스테픈이라고 표기하는 등 끝도 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모두 영어 이름이지만 본인의 의사(즉, 자신의 이름을 본인 자신이 어떻게 발음하는지)에 명백히 반하여 잘못 표기된 사례들이며 외래어 표기법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최초로 외래어 표기를 했던 사람의 “무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단순히 “이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발음하는지 잘 모르겠으므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비슷한 표기를 골라보겠다”라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Albert Camus를 앨버트 카무스라고 표기한 한 대학 도서관 사서의 사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발음하는 법을 몰랐던 이름이 미국 이름이었는지 프랑스 이름이었는지의 차이밖에 없는 것이죠. 원래 비영어권의 이름이었던 것이 영어권 국가로 넘어갈 경우 문제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성이 Schumacher인 독일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경우 그 사람의 이름(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후손들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의 문제 말입니다. 이 경우 개개인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원어 중심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영어식으로 발음하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Schumacher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수 백, 수 천 명이 될 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원래의 발음인 슈마허를 고집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로마의 법을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슈마커라고 발음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국 친구들”이 발음하기 쉬우라고 아예 이름을 Shoemaker로 개명을 해서 슈메이커라고 발음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옳은 표기법은 “본인의 의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Mayer라고 하더라도 John Mayer는 존 메이어가 맞고 Marrissa Mayer는 머리사 마이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Leonard Bernstein은 이게 아무리 독일에서 온 이름이라고 하더라도 번슈타인이 아닌 번’스타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Stanley Barenstain은 스탠리 베런’스테인’으로 표기해야 하고 Frankenstein도 본인이 프랑켄’스틴’이 맞다고 주장하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크랑켄스틴이 맞는 겁니다 (http://youtu.be/nxxSIX3fmmo). Albert Einstein의 경우도 그가 나중에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인이 되었음을 고려할 때 아마도 아인슈타인 대신 아인스타인이라고 발음했다고 해서 생전에 본인이 언짢아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인스타인이 반드시 잘못된 표기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라틴어 이름인 Julius Caesar의 경우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표기하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동명의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을 표기할 때는 얼마든지 “줄리어스 시저”라고 표기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영어로 씌어진 영국 문학 작품의 제목이며 그 작품의 독자들뿐 아니라 작가(셰익스피어) 자신도 분명히 줄리어스 시저라고 발음을 했을 것이니까요. 여기서 제가 “바람직하다” 혹은 “맞다”라고 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디까지나 최대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취지에서 정한 하나의 정책(policy)의 문제이지 외래어 표기법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님을 밝혀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이나 원칙이 바람직하냐 아니냐를 따지기에 앞서 아예 외래어 표기의 원칙의 부재 속에서 (혹은 원칙이 있어도 잘 지켜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 동안 외래어 표기가 굉장히 들쑥날쑥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영어식 표기”가 아닌 원어식 표기를 따른답시고 미국인인 Scarlett Johansson을 조한슨이나 조핸슨이 아닌 요한슨으로 표기하는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사례도 여럿 있었고 그 반대로 영국인인 Rachel Weisz의 경우 본인이 /Vice/로 발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바이스가 아닌 와이즈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Gwyneth Paltrow를 정체불명의 기네스(Guiness?) 팰트로로 표기하는 괴상한 사례도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오기 사례들은 표기자의 무지 내지는 무능함 탓으로 볼 일이지 특정 언어나 문화(영어가 되었든 프랑스어가 되었든 독일어가 되었든)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더 부족해서 그렇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오기 사례는 비영어 이름뿐 아니라 영어 이름에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고요. 다시 말해 원어 표기를 보았을 때 그 작품이나 저자를 인지하지 못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래어 표기 자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지언정 비영어권 국가의 표기법이나 발음법보다 영어 표기법이나 발음법을 더 선호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미국 문화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렇다고 보기는 더 어렵고요.

    서울대 중앙도서관 목록에 대한 일화도 한 사서의 “실수”로 볼 수 있습니다. (명색이 일류 대학의 사서가 카뮈의 이름을 못 알아 보는 걸 실수로 간주하는 게 너무 너그럽다고 생각하신다면 “무식함” 내지는 “함량 미달”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슨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맹종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처세술에 뛰어난 꺼삐딴 리의 생존 방식 정도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 결론을 내리려면 그 사서가 Albert Camus라는 표기를 보고 이것이 프랑스의 문호인 알베르 카뮈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앨버트 카무스라는 표기를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미국식 발음”으로 옮겼다고 보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은 정작 미국에서는 Camus를 카무스라고 발음하지 않고 캐이머스라고 발음합니다.)

    이 사서가 설령 카무스를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실수(혹은 무식)로 인해 오기를 했다고 봐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이 사서의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에 무지한 죄”를 이 사서가 받아 온 대한민국의 교육 내지는 영어만 강조하고 미국 문화만 부각시키는 뭔가 대한민국의 총체적 현상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글쓴이께서 무슨 범세계적 문화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세계의 모든 문화와 언어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각각의 문화나 언어를 습득하거나 학습하는 데는 동일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이상 오늘날의 현실에서 다른 언어에 비해 영어 학습에 더 많은 자원과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영어는 “미국의 언어”가 아니기에 “영어=미국, 미국=팍스 아메리카나, 고로 영어=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등식도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영어 교육을 제1외국어로 공부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며 전세계에서 영어 대신 다른 언어를 제1외국어로 교육시키는 나라는 극히 드문 예외에 속하지 주류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원쑤 미제(?)의 언어인 영어 교육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233). 영어 교육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에게 비영어 언어에 비해 영어가 훨씬 더 익숙하고 영어식 표기가 가장 익숙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너는 크로아티아어도 안 배웠냐? 크로아티아 사람 이름이 -sic로 끝나면 ‘-시크’이 아니라 ‘-시치’로 발음한다는 상식도 몰라?”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국내 매체에서 Ronaldo의 표기를 “로날도”로도 했다가 “호나우도”로도 했다가 “호나우두”로 바꿨다가 했다면 이것은 그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아쉽게도 포르투갈어를 공부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나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제일 만만한 영어 발음 비스무리하게 얼버무렸다 정도로 해석할 일이지 우리 문화가 “영어에 침윤”되는 것을 걱정할 사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글의 요지가 외래어 병행 표기나 외국어 교육의 문제를 벗어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미국 문화”에 젖어있어서 우리만의 고유 문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 (혹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우려된다는 것이라면 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미국 문화에 의한 문화 잠식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며 우리가 문화 대국이라고 알고 있는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도 굉장히 민감한 사안입니다. (미국의 독일 문화 잠식에 대한 독일인들의 패닉을 소개한 오래 전 기사가 생각나네요. http://nyti.ms/VWzZwX) 한 나라(미국)와 한 언어(영어)의 문화 독주가 이어지는 세상에 살면서 열린 시각을 잃지 않고 미국의 문화가 인류 문화의 종착점이 아닌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혹시라도 무슨 영어 기피증이라든지 반미 사상의 발로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인만 보면 다 미국 사람인 줄 아는 현상 역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 모르지만 반드시 우리나라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꼭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관광 온 룩셈부르크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룩셈부르크 사람인 줄 못 알아봤다면 그게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요? 굳이 잘잘못을 따질 수 있다면 만방에 룩셈부르크 문화를 전파하여 척 보기만 해도 룩셈부르크인인 줄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못한 룩셈부르크 사람 탓이라고 말하면 이게 꼭 틀린 걸까요? 아니면 평소에 룩셈부르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 이 대한민국인을 탓해야 할까요? 글쓴이께서 예로 드신 일화에서도 제가 만약 박노자 교수였다면 그런 경험을 겪은 후 제가 더 부끄러웠을 것 같습니다. 왜 대한민국 사람들은 노르웨이에 대해 무지한가에 대한 책임 의식이라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서 “당신은 중국에서 왔나요 일본에서 왔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도서관에 가서 한국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공부하지 않은 외국인을 탓할 수 있을까요? 저 같으면 우리나라의 독특하고 훌륭한 문화가 아직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더 절절할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백인 외국인 중에서 미국인이 가장 많다는 점입니다. 물론 통계에 근거하여 소수의 존재를 무시하는 태도가 좋은 건 절대 아닐지 모르지만 백인 외국인을 봤을 때 미국인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특히 부끄러워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무슨 문화 침식에 의한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의 모습이 영어에 “길들여져” 온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것을 조국의 이익을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율배반적 처세술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니혼고를, 또 때로는 루스끼를, 그리고 또 때로는 잉글리시를 익혔던 꺼삐딴 리의 태도에 단순 대입시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좋든 싫든 글로벌 시대에 영어 교육은 여전히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하는 것을 섯불리 “숭미”나 “매국”과 연관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글쓴이께서 그런 단어를 직접 언급은 안 하셨지만 전체적인 논조나 꺼삐딴 리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런 인상이 들었습니다.)

  3.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것은 당연한 예의입니다. ‘Call me OOO’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가령 거스 히딩크(Guus Hiddink)는 일반적인 네덜란드어 발음으로는 ‘후스’ 또는 ‘휘스’가 맞을 것 같지만 본인이 거스라고 불러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게 적어야지요. 통합진보당에 대한 평가나 감정과는 별개로, 김석기 이재연이 아니라 이석기 김재연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말입니다. 열심히 찾아서 썼는데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노력했는데 너무 정보가 없었다고 할 만큼은 그 사람의 이름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표기법이 ‘숭미’와 관계 있다고 제가 말했다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으나 ‘매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더불어 저는, 꺼삐딴 리에서 어떤 내셔널리즘을 읽어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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