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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왜 늘 망친 그림을 좋다고 하세요?” 

수업시간에 홍담이가 이런 질문을 해서 긴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얘기를 한번 정리해 봅니다. 홍담이는 제가 미술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입니다.

일단 선생은 무엇일까요?

선생(先生)을 한자어로 풀어 보면 ‘먼저 태어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먼저 태어나서 그림에 대해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그려보고, 더 많은 고민을 한 사람입니다. 선생의 의견이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의견을 내줄 수는 있습니다.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잘 그리는 그림’과 예술가들이 ‘좋은 그림’으로 칭찬하는 작품이 엇갈리곤 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사실적 묘사’를 잘 그리는 그림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엔 수많은 스타일의 그림이 있습니다. 극사실주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피카소나 미로와 같은 화가도 있습니다. 다 좋은 그림입니다. 어떤 그림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어떤 그림이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그림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림에 담고자 한 것들이 있고(느낌, 생각, 사상 등), 그것을 잘 담아내기 위한 기술적인 측면을 테크닉이라 합니다. 피카소도 훌륭한 테크닉을 지녔고, 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주의적 테크닉은 그러한 수많은 테크닉 중 하나일 뿐이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페드로 캄포스, "다리(Legs)", oil on canvas, 162x97cm
페드로 캄포스, “다리(Legs)”, oil on canvas, 162x97cm, 출처: www.pedrocampos.net

하지만 만약 ‘사실적 묘사’를 잘 그리는 그림이라고 인식 심어줄 경우,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그림을 흉내 내다 끝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른들이 좋다고 하는 그림들, 학교에서 선생이 칭찬하는 스타일의 그림들,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 동료의 그림들…

자신만의 그림을 버리고 그러한 그림 방식을 좇게 될 경우 최악의 결과를 맞이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구미에 맞는 테크닉만 익히는 셈이니까요. 성인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류 스타일에 합류하는 것은 예술가 인생의 재앙입니다.

사고를 당했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의 눈은 두 개, 코는 하나, 입은 하나, 귀는 둘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죠. 어느 얼굴이 더 뛰어나거나 더 소중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르면서 모두가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죠. 그러한 차이만큼이나 사람들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잘 그리는 것과 못 그리는 것의 그릇된 관념이 들어서지 않은 아이들은 특히나 말이죠.

선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 

따라서 저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주제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서 그리도록 유도합니다. 다양한 재료를 공급하는 것이 선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때로는 재료 사용법을 알려주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수채화 물감에 물을 많이 섞기, 도화지에 물을 뿌리고 물감을 얹어보기, 물 없이 뻑뻑한 물감을 사용해 보기와 같은 것들. 혹은 서로 다른 재료들을 혼합하여 사용하기. 그러한 기술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아이들이 선택합니다. 그렇게 몇 번 제시하다 보면 아이들 스스로 재료 사용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림 화가

그렇게 수개월, 때로는 1년 이상의 시간을 지내다 보면, 아이들이 장난으로 툭툭 그린 작품에서 뛰어난 가능성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 아이만이 할 수 있는 표현 말이죠. 아이들 스스로는 그 작품이 왜 좋은지 모릅니다. 공들여 한 작품을 끝내고 재미삼아 그린 것일 뿐인데, 선생은 좋다고 합니다.

홍담이가 오늘 유화 작업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화이트로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홍담이는 화이트를 처음 봤답니다. 새로운 재료를 박스종이 위에 찍어 보다가 파스텔과 펜을 혼합하여 낙서했어요. 제가 그 그림이 좋다고 하니까 “어우~ 선생님~!”하며 행복한 절규를 하더군요. 그래서 영화감독 왕가위 얘기를 해줬습니다.

왕가위와 [중경삼림]  

감독 왕가위는 [동사서독] 촬영과 편집이 지나치게 길어지며 슬럼프에 빠집니다. 그래서 기분전환용으로 홍콩에 잠시 귀국하여 촬영한 것이 [중경삼림]입니다. 촬영 기간은 23일이라네요. 그리고 중경삼림은 대박을 치면서 왕가위의 대표작으로 올라섭니다.

중경삼림(왕가위, 1994)
중경삼림(왕가위, 1994)

예술가들은 때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즐긴 작업이 특별히 좋은 작품으로 남고는 합니다. 때로는 우연에 가깝고요. 그러한 우연은, 하지만 수많은 노력이 실력으로 쌓였을 때 유연하게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홍담이가 오늘 그린 낙서작품도 파스텔과 펜 작업을 많이 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담 없이 툭툭 던질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인 것이죠. 선생은 이런 작품에서 홍담이만의 가능성을 봅니다. 저는 처음 그림을 봤을 때, 바오밥 나무가 있는 어린 왕자의 행성이 떠올랐습니다.

마르셀 뒤샹과 [샘] 

1887년에 태어나 활동했던 마르셀 뒤샹은 여느 예술가 지망생들과 마찬가지로 화실에서 명작을 모사하는 테크닉을 연마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붓끝의 테크닉이 아닌 예술가의 정신에서 나온다’고 믿었던 뒤샹은 붓을 집어 던지고, 화장실 변기를 가져다가 겔러리에 전시합니다.

변기에 사인을 하고 제목을 [샘](Fountain, 1917)이라고 했습니다. 갤러리 측은 커튼으로 작품을 가렸고, 후에 쫓겨났다고 하죠. 뒤샹은 그렇게 레디메이드, 패러디, 개념미술, 설치미술 등 현대미술 기법을 총정리해버렸습니다.

마르셀 뒤샹, 샘(1917)
마르셀 뒤샹, 샘(1917)

이제 유럽은, 적어도 제가 경험한 독일은 학생들에게 테크닉 연마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는가’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내용(감정, 직관, 사상 등)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적 목표가 결정 났을 때, 학생은 스스로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선생은 그 방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죠.

목마름 

초절정의 기교를 지닌 악기연주자에게 비평가가 어떻게 그러한 테크닉을 연마할 수 있었는지 질문했습니다.

“하루 종일 연습할 수만 있으면 연습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세상 누구보다 좋은 테크닉을 갖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갈증 때문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음악적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선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예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테크닉 연마의 동력은 예술적 갈증입니다. 가끔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이 아이가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미술이란 형상작업은 담기는 내용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어떤 예술보다 예술적 갈증이 나이 들어 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칸딘스키는 나이 서른에 그림공부를 시작했죠. 아직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미술 작업을 즐기고 세상 모든 것을 대하는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망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후에 예술가가 되지 않더라도 취미로서 즐기고 정신적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거든요. 조각을 전공했지만,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힘들 때 그림이 친구가 되어주곤 합니다. 따라서 우리 선생들은 수업시간에 가끔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놀기도 하고, 눈이 내리면 눈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좀 더 특별한 종이비행기를 제작하고, 좀 더 특별하게 눈을 뭉치며.

아이들 그림과 만들기의 변화가 상당히 느릴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면 데생을 가르칠 수도 있지 않나 고민해봤지만, 어린 시절에만 그릴 수 있는 특별한 그림들이 있고, 아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소중한 예술적 색채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림과 만들기로 입증해 주고 있고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입니다. 자신을 믿고 과감하게 시도하는 것. 망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대부분 망친 그림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힌 잘 그린 그림’에서 벗어난 새로운 스타일인 경우고, 그래서 망친 그림이 좋은 그림인 경우가 많다는 것.

홍담이의 그림: 유화를 마치고 화이트와 펜과 파스텔로 낙서를 한 그림.
홍담이의 그림: 유화를 마치고 화이트와 펜과 파스텔로 낙서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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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공감합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의 재능발견과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 할 수 있도록 길잡이 해주는 멋있는 선생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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