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호는 얼마 전까지 미디어오늘의 4년 차 기자’였’고, 아직 ‘삼십세’가 되지 않은 나이에 네 권의 책을 낸 젊은 저자다. 최근에는 [프레임 대 프레임]이라는 책을 냈다. ‘이 바닥’에서는 젊은 논객으로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다. 조윤호에게 글쓰기와 읽기 그리고 진보언론과 열혈 문 지지자의 갈등 상황 등에 관해 물었다.
- 2017년 5월 23일, 민노씨네
- 인터뷰이: 조윤호, 인터뷰어: 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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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
글 쓰는 사람이다. 정치와 미디어에 관한 글을 쓰고, 책도 몇 권 냈다. 슬로우뉴스에서 주간 뉴스 큐레이션을 연재 중이기도 하다.
– ‘글 쓰는 직업을 가지겠구나’ 생각했던 때가 있나.
대학생 때 복학을 앞두고, 한겨레에 타진요에 관한 글(‘타진요’ 단지 이것은 게임에 불과했다, 2010. 10. 22.)을 독자 투고 형식으로 기고했다. 요지는 ‘타진요’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 내가 기고한 글을 타진요에도 퍼가고, 인터넷에 퍼지고, 사람들 안줏거리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쓰이는 경험을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타격감’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 재밌더라. 그때 처음 체험했다.
–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겨레 ‘훅’이라는 웹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정기적으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이 왔다. 한 달에 한두 개씩 칼럼을 썼는데, 댓글이 참 많이 달렸다. 백 개씩도 달리고. 논쟁을 일으키는 게 재밌달까. 맛을 들였다. 그때가 23살, 24살쯤이었다.
– 왜 ‘타격감’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나.
잔잔한 바다나 강, 호수에 돌을 던지면 큰 파문이 일기도 하고, 묻히기도 하는데, 영향력이 있는, 그런 의미에서 ‘타격감’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 야구에서 말하는 그 ‘타격감’에서 유래한 표현인가.
맞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도 인터넷에서 좀 더 권위가 실리고 주목도가 직업이 뭘까, 타격감을 올리는 직업이 뭘까를 생각했고, 그래서 기자가 됐다.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언론과 미디어에 관해선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었다. 언론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없었는데, 그런 상이 없이 기자 생활을 하니 아, 원래 언론이 이런가보다, 술을 이렇게 많이 먹나보다, 이렇게 글을 쓰나보다, 이렇게 몇 년 차냐고 물어보나보다,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나 보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 기자의 권위가 사라진 시대, 이른바 ‘기레기 전성시대’다. 기자라는 타이틀이 권위와 주목도에 정말 보탬이 되었나.
권위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쓴 글의 신뢰도를 낮추는 것 같기도 하다. 매체에 따라서 독자들은 편견을 가지는 것 같다. 내가 자연인으로 썼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을 미디어오늘 기자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도 한다. 꼭 미디어오늘이 아니라 조선일보든 한겨레든 마찬가지다.
– 독자의 편견이나 불신은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있다(웃음). 기자 일을 그만두고 일반인의 시각으로 기사를 보니, 기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뉴스를 다 보지 않을뿐더러 찾아보지도 않고, 내 뉴스 피드에 올라온 글, 포털 첫 화면에 있는 기사를 보게 되더라.
기자 입장에선 가령, 문재인도 비판하고, 안철수도 비판하고, 심상정도 비판하고, 홍준표나 유승민도 비판하고, 객관적으로 기사를 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문재인 비판한 기사만 읽고 짜증이 나고, 안철수 비판하는 기사만 읽고 짜증이 나고… 그런 것 같다.
– 독자의 짜증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 내가 지금 진보언론 기자였다면, 지금 상황이 아주 억울했을 것 같지만, 독자 입장에서 서고 보니 독자의 불만과 짜증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열혈 문 지지자 vs. 진보언론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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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진보언론 vs. 열혈 문 지지자 갈등이 화두로 등장했다. 진보언론에서는 권력 비판이 저널리즘의 소명인데, 그러면 누구처럼 ‘어용 지식인이 되란 소리냐’라고 할 것 같고, 문 지지자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당파성을 강하게 가진 엘리트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론을 추구하는 양, 또는 아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양하는 꼴이 참 가증스럽다고 한다. 어떤 이는 ‘너희들, 돈 없는 조중동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폭언(?)도 불사한다. 양쪽 다 일리가 있으면서도 상대편 입장에서는 아주 억울할 것 같다. 조윤호에게 이 문제에 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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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한경오와 조중동은 ‘적대적 공생’의 구조 속에서 각자의 포지셔닝에 충실한 직업인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 아니면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한쪽은 기득권을 대변하고, 다른 한쪽은 새로운 시대(시대정신)를 대변하는 서로 다른 철학과 가치를 가진 구별되는 언론으로 달리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달리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경오’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언론이 조중동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것 아닌가. 진보언론이 신문을 팔아왔던 방식이 조중동의 기득권에 반대하는 매체를 지켜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세일즈 방식이 지금까지 한경오가 생존해 온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한경오 고유의 가치를 견고하게 축적해오지는 못했다고 본다. 왜 한경오를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유를 제시할 때, 우리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조중동이 지배하는 사회니까 한경오를 읽어라, 후원해라… 그런 식이었다.
– 한경오의 생존 방식 자체가 본질에서 조중동에 의존적이었다고 보나.
그렇다고 본다. 정치적인 버전으로는 한국의 야당이 그런 방식으로 생존해오지 않았나 싶다. 표 달라고 할 때 새누리 집권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냐고 읍소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본다. 독자들이 한경오를 읽는 것은 마치 야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찍는 심정과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 이번 대선에선 어떤가.
이번 대선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의 구도가 깨지면서, 그러니까 문재인 후보가 1강으로서 강력한 위상을 가지면서 과거의 관습, 질서에 기댄 한경오의 가치가 다수 독자에게 급속히 저하했을 것으로 본다.
– 여기서 과거의 관습, 질서가 의미하는 건 뭔가.
조중동의 대안으로 한경오를 읽어달라는 것. 정치적으로는 그런 구도가 깨진 것. 더불어 이번 대선에서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감소한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러니 한경오에 대한 의존성도 그만큼 적어졌다고 생각한다.
‘더 센 우리 편’ 팟캐스트의 등장
– 전통언론(신문과 방송)의 담론 생산 방식과 소위 온라인,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의 담론 생산 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특히나 한국적 지형에서는 ‘나꼼수’로 상징되는 팟캐스트가 일종의 정치 엔터테인먼트라고 부를만한 정치의 예능화, 혹은 정치의 대중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는데, 특히 최근의 진보언론과 문 지지자의 대립 구도에서 문 지지자의 입장이 팟캐스트에서 이론적으로 수혈받는다는 의견도 있다.
상당히 타당한 분석이라고 본다. 예전에는 한경오가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해서 구독했던 것인데, 더 센 우리 편이라고 해야 할까. 팟캐스트가 나타나지 않았나. 기자들은 아무리 실제에서는 당파지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형식으로나마 정론의 가치, 중립성과 객관성에 얽매여 있는데, 팟캐스트는 그런 형식까지도 파괴해버리니까. 그래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팟캐스트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더 센 우리 편이니까. 페북을 봐도 문 지지자들께서 한경오를 비판하는 게시물로 올리는 것들의 상당수가 그 이론적 근거를 팟캐스트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 팟캐스트 많이 듣나.
듣기는 한다.
– 좀 더 특정해보자. 김어준은 듣나.
파파이스 듣는다.
– 파파이스를 샘플로 삼아서 이야기해보자. 한겨레와 같이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한겨레는 확실하게 ‘보조’ 느낌이고, 메인은 당연히 김어준인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왜 한겨레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결국은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음모론자’ 김어준을 파트너로 삼는지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김어준의 대중성에 기대서 파파이스 같은 포맷을 유지하는 것인지 참 의아하다. 결국은 자신을 파괴하는 미디어 형식을 키우는 셈이라고 보는데(한겨레는 고전적인 정론의 가치 vs. 김어준은 정치 엔터테인먼트의 가치) 어떻게 보나. 서로 시너지가 아니라 김어준에게 잡아먹히는 구도, 혹은 제로섬인 것으로 보이는데.
예전에 파파이스에서 세월호 관련한 일종의 음모론이랄까, 새로운 가설을 주장했다. (- 그게 뭔가) 고의 침몰설. 물론 고의 침몰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고의 침몰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물론 고의 침몰이라고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데 한겨레가 그걸 받아서 확산하는 역할을 하더라.
파파이스를 보지 않고 한겨레만 읽는 독자는 ‘아, 정말 고의로 침몰시킨 것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같았다. 이게 이런 가능성이 있다면, 한겨레가 직접 취재해서 기사를 써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파파이스를 ‘인용’해서 보도하는 행태로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론 이게 꽤 장사(트래픽)가 잘됐는데, 참 뭘라까 ‘헉~!’했다.
– 헉, 그건 무슨 의미?
한겨레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느낌이랄까. 한겨레가 파파이스의 주장을 확산하는 통로가 된 건데… 물론 전체적으로는 한겨레가 잘하고, 취재 잘하는 기자들도 많지만, 이런 보도들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 지금의 대립구도를 해소할 좋은 방법은 뭐라고 보나. 혹은 대립을 해소할 필요는 있다고 보나.
필연적인 갈등이라서 해소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 다만, 기자 출신으로서 하나 생각이 드는 것은 문 지지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매체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최소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거기까지 가면, 소위 한경오는 단기적으로 생존의 문제에 봉착할 것으로 생각한다.
– 이 시나리오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그렇게 만약(!)에 한경오가 망했다고 가정하면, 대한민국의 언론 지형이 더 해피할 것 같나?
해피할 것 같지는 않다. 이것도 앞서 이야기했던 ‘타격감’의 차원에서 문 지지자는 곧바로 한경오의 독자이기 때문에 한경오의 생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조중동에는 전혀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다. 아무리 조중동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도 한경오가 실제로 망하면 힘의 불균형이 너무 심해진다.
– 문 지지자가 실제로 한경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보나.
한경오와 미디어오늘이 모두 사과한 것은 문 지지자의 영향력이 실질적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가령, ‘덤벼라 박사모’라고 했거나 ‘박근혜 씨’라고 했다면 절대 사과할 일이 없었겠지 싶다.
– 예술, 특히 문학이 자율성을 획득한 역사적인 계기를 평론가들은 ‘파트롱’으로 불리는 일종의 후원자 계급으로의 추방, 분리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각 매체의 자율성, 달리 표현하면 양심, 저널리즘으로 상징되는 철학인데, 독자가 마치 매체의 소유자처럼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러니 과거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동시에 지배한 파트롱이 된다면, 매체의 자율성이 유지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나.
당연히 그럴 것으로 본다. 독자 의견을 반영하는 통로가 많은 것도 좋고, 독자 의견을 반영하는 지면을 늘리는 것도 다 좋지만, 마치 A 논조로 기사를 써라. B 논조로 기사를 써라. 이런 압력이 실질적으로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크면, 실제로 기사쓰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 기자라면 나 자신을 검열할 것 같다. 우선은 최대한 관련 기사 쓰는 걸 피할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면, 최소한 논쟁을 피하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쓰게 될 것 같다.
네 권의 책을 쓰다
– 책은 지금까지 몇 권이나 썼나.
네 권.
– 젊은 나이에 벌써 네 권의 책을 냈다. 비결이 뭔가.
책이라는 게 처음 한 권을 내기가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기회가 계속 생기는 것 같다. 출판 제안이 정기적으로 들어왔고, 그중 일정한 제안을 책으로 출판하다 보니 어느덧 네 권이나 쓰게 됐다(한 권의 공저까지 포함하면 다섯 권).
물론 기회가 있다고 해도 출판사에서 들고 온 제안과 내 제안을 조정하고, 나의 콘텐츠로 적게는 200페이지, 많게는 300페이지의 분량을 채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짧은 글이라도 블로그에건 SNS에건, 계속 글을 써보는 것이 책 같이 긴 호흡의 길을 쓰는 데 도움이 됐다. 블로그나 SNS에 끄적인 글들이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메모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나쁜 뉴스의 나라.
– 왜.
가장 열심히 썼다. 제일 오래 고민했던 책이기도 하다. 다른 책들은 그냥 앉아서 쓴 책이지만, 나쁜 뉴스의 나라는 매체에 25회를 연재하면서 그때그때 독자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썼던 책이라서 더 애착이 가고, 열심히 쓰기도 했던 것 같다.
– [나쁜 뉴스의 나라]에서 독자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는 뭔가.
언론이 주인이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 주인은 독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독자가 주인이 되려면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하고, 그걸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쓴 책이다. 기존에는 뉴스 리터러시를 다룬 책이 의외로 적더라. 그래서 나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에서도 그런 취지로 기획을 제안하더라.
– 방법론 차원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뉴스를 골라볼 수 있나. 노하우가 있나.
특별히 어떤 매체에 들어가서 기사를 읽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 좋은 기사를 소개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만 잘 팔로잉해도 좋은 기사를 골라 읽는 효과가 있다.
– 누군가. 좀 알려달라.
- SBS 심석태 부장
- 한국일보 최진주 기자
- 미디어오늘 이정환 사장 등
이 분들만 팔로잉해도 좋은 기사들을 쏠쏠하게 골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미디어의 딜레마 중에서 지금 개인적으로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기사는 써도 묻히고, 나쁜 기사는 어떤 이유든 부각되는 현상이 구조화했다고 본다(디지털 그레샴의 법칙). 극복 가능한 구조로 보나. 돌파구가 있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하우랄까.
손 쉬는 단계에서 출발한다면, 주변에 이런 좋은 기사가 있다고 SNS에 올리는 친구들에게 포털에 올린 기사 주소가 아닌 원래 언론사의 링크를 올려달라고 요청하는 편이다. 댓글로 항상 그런 바람을 올린다.
– 포털이 훨씬 깔끔하고, 언론사 사이트는 지저분하다.
그렇긴 하다. 그리고 인기 검색어는 없앴으면 좋겠다. 굳이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언론사의 뉴스 생산이 ‘실급검’(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맞춰지고 있기도 하고.
– 나도 예전에는 포털의 실급검 시스템에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기본적으로 휘발성 강한 흥미 위주 콘텐츠의 소비를 구조화하고, 그 경향을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에… 그런데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데, 이게 어느새 우리의 온라인 문화가 돼버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가령, TV 연예 토크쇼에서 흔한 이야기 소재가 될 정도다.
정책적인 의지, 결단으로는 없앨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을 비교해야 하는데, 여전히 폐해가 장점보다 크다고 본다. 이미 문화로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없애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없애기가 어려울 거다.
– 실급검의 가장 큰 폐해는 뭔가. 뭐라고 생각하나.
쓰레기 뉴스의 양산. 실급검에 맞춰 생산되는 기사. 취재도 없고, 새로운 정보도 없는, 독자들이 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기사들.
– 그러면 마치 시나 소설처럼, 영화나 드라마처럼 기억에 남는 저널리즘 컨텐츠가 있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르포. 이 책을 읽으면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들을 만나 쓴 책이다.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르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사를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의,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충실히 전했을 때 그 길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공감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책 제목을 본문에선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읽다보면 그 책 제목에 공감하고, 스스로 자연스럽게 체화하게 된다. 비정규직을 없애자는 기사가 아니라, 그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비정규직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걸 공감하고, 깨닫게 하는 기사, 가령 ‘미생’ 같은 만화처럼 기사를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아까 민노씨가 말했듯이 사람들이 기사를 안 읽으니까. 왜 사람들이 기사를 읽지 않는지 수용자인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자신이 쓴 기사 중에서 가장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기사는 뭔가.
인터뷰하는 걸 좋아해서 인터뷰를 잘 쓰고 싶었는데, 2년 전쯤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을 인터뷰했다. 조회 수도 많이 나오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 정당에 다문화라는 이슈를 선점당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자스민을 만났고, 오유건 일베건 이자스민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인터뷰한 것도 있고.
이자스민을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와 오해를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해명하는 첫 인터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그때까지 여러 언론에서는 이슈를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데 급급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기사다.
또 하나는 세월호 관련 기사다. 아직 조사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특조위를 정부가 사실상 강제로 해산해 예산 지급을 막고, 그래서 조사를 자비로 하게 된 사연을 담았다(A4용지도 떨어져, 유가족들이 출장 기차표 끊어주기도, 2016. 7. 31).
이왕에도 예산이 깎였다는 단편적인 기사들은 많았지만, 세월호 특조위에 직접 방문해서 구체적으로 썼다. 당장 너무 급해서 세월호 유족들이 특조위에 기차표를 끊어주기도 하고, 그런 사정들을 상세히 썼다. 기사를 읽고 A4용지라도 보내주고 싶다. 휴지라도 보내주고 싶다. 그런 독자의 반응을 접하고, 뿌듯한 마음이었다. 잘 썼구나, 생각했다.
– 그럼 부끄러운 기사는?
경위서를 쓰게 한 기사가 있다. 엄청 큰 실수를 했다. 기사를 삭제하고 사과까지 했으니까. 기자 3개월 차. 기자들이 국정원이 초청하는 모임에 가서 술도 얻어먹고, 이것저것 하다가 왔다는 내용의 제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오보였다.
국정원은 당연히 확인을 해주지 않았고, 당사자가 아닌 기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로 무리하게 기사를 썼다. 당시 출입기자들이 엄청나게 항의했고, 국정원에서도 기사가 나간 뒤에 직접 부인하고. 결국, 기사를 하루 만에 내리고, 정정보도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은 이런 체험이 약이 된 것 같다. 무리하게 쓰지 말자. 기자 초년에 이런 일을 겪어서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됐다.
– 존경하는 기자는.
딱히 없다. 그런데 배우고 싶은 기자는 몇 명 있다.
한겨레21의 이문영 기자. ‘문영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체가 아름답다. 기자들이 쓰는 문체를 안 쓴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문영 기자의 기사를 읽고 울컥할 때가 많다. 나는 이문영의 문체를 좋아한다. 특히나 나는 글을 건조하게 쓰는 편이라서, 저런 문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시사IN의 천관율 기자.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풍부하게 해주는 기잔데, 전통적으로 ‘민완기자’라고 해서 형사처럼 현장을 누비는 기자를 기자의 전범으로 봤지만, 이제는 팩트를 어떻게 해석하는 역할까지 기자에게 많이 넘어온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기자다.
– 끝으로.
임차인 보호를 좀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데 정책은 여전히 4인 가족 기준이다. 특히 청년과 노인 계층이 1인 가구의 대부분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보호해달라. 지금은 열심히 전셋집을 찾아다녔지만, 안정되면, 다시 어떤 방식이든 글을 열심히 쓸 생각이다. (사족: 조윤호와 인터뷰한 날은 조윤호가 전셋집을 옮기기 위해 새집을 가계약하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