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대통령이 되면 할 겁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2012년 12월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던 말이다. 원전 대책을 물어도, 반값등록금에 관해 물어도,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물어도 “대통령이 되면 하겠다”는 말로 대응했다.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4년 만에 여러 가지를 해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논조를 하나로 만들었고 네이버와 다음의 기사 댓글을 하나로 만들었다. 96%의 국민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대통합’을 이루었다. 1,600만 명의 시민을 거리로 나오게 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이 됐다.
언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박근혜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다음 대통령은 누구인지에 대해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다음 선택은 박근혜 같은 결말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까? 박근혜는 2007년부터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고 2012년 대선에서는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다. 왜 그 긴 시간 동안 그를 검증하지 못했던 걸까.
가장 큰 원인으로 언론을 꼽을 수 있다. 단순히 기자들이 비선실세의 존재를 알지 못했거나 박근혜에게 질문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언론은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렸다. 다른 말로 하면 프레임(frame)이다. 언론은 말 한마디 없는 박근혜에게 ‘침묵의 정치’, ‘한마디 정치’라는 칭호를 붙였고, 박근혜가 한마디만 하면 온갖 정치적 해석을 덧붙였다.
찬반이 존재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정치세력과 언론은 프레임 전쟁을 시도한다. 정치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각자 서로 다른 프레임을 그린다. 언론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그림들을 서로 비교해서 볼 수 있다면 유권자가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안철수 – 한겨레 “새 정치” vs. 조선일보 “낡은 정치”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 지난 2월 15일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했을 때, 안철수 관련 키워드로 서로 모순되는 단어인 ‘소통’과 ‘불통’이 함께 화면에 등장했다. 안철수는 “소통의 아이콘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불통으로 바뀔 수는 없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이 희한한 일이 프레임 전쟁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다. 조선일보는 안철수가 2011년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부터 그의 행보에 ‘낡은 정치’ ‘정치쇼’라는 타이틀을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치신인 안철수에게 ‘정치고수’라는 말까지 썼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잘 짜인 정치 시나리오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 2011년 9월 7일 조선일보 기사
“안철수는 놀랍게도 ‘정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박근혜·문재인의 말이 건조한 고체라면, 안철수의 말은 촉촉한 액체다. 정치 감각도 ‘초보’ 같지 않다. 안철수는 의외로 뻥도 칠 줄 안다. 안철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리고 현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잣대도 바뀌어야 한다. 사소한 자질 검증 수준이 아니라 ‘대통령 안철수’까지 상정한 전방위적 검증이 필요하다” – 2012년 11월 7일 조선일보 칼럼
한겨레에 안철수는 ‘새 정치’의 화신이었다. 조선일보가 ‘쇼’라고 비난했던 서울시장 불출마 기자회견도 한겨레에게는 신선한 새 정치였다. 2012년 9월 19일 안철수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도 한겨레는 새 정치를 읽었다.
“역시 기존의 정치판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모습을 보였다.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도,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지지도가 훨씬 높은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 후보를 홀연히 양보한 것은 상당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 2011년 9월 6일 한겨레 사설
“역시 안철수식 정치는 문법이 달랐다. 목청 돋우며 나만이 해낼 수 있다는 식의 익숙한 정치판 연설은 없었다. 국민 눈높이에서 해온 ‘솔직토크’ 화법 그대로다” – 2012년 9월 20일 한겨레 칼럼
조선일보가 보수고 한겨레가 진보니까 당연한 거라고? 언론의 프레임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철수가 문재인과 갈등을 빚으면서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2016년 4.13 총선에서 야권 통합도 거부하자 한겨레가 묘사하는 안철수는 ‘분열의 아이콘’이 됐다.
“(안철수) 의원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탈당을 하고 새정치민주연합 분열의 마중물이 된다면, 그것은 내년 총선에서 야권의 궤멸을 의미합니다. 새정치연합을 포함해 야권이 하나로 똘똘 뭉치고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심어주어 많은 지지를 받을 경우에만 겨우 다수당을 노려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계산기만 두드려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 2015년 12월 21일 사설
“안철수 대표는 지금보다 훨씬 분명하게 야권 후보 단일화를 지지한다고 밝혀야 한다. 그게 야권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고, 국민의당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길이다” – 2016년 3월 30일 사설
왜 안철수는 새 정치의 화신에서 분열의 아이콘이 됐을까? 한겨레가 ‘진보는 통합해야 새누리당을 이길 수 있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진보의 확장력을 중도까지 넓혀줄 수 있는 안철수는 새 정치의 상징이지만, 진보의 몫을 갉아먹을 안철수는 분열의 아이콘이다.
유승민 – 조선 ‘보수 통합’ vs. 중앙 ‘보수 확장’
보수 정치인도 프레임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존재감을 널리 알린 첫 사건은 2015년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격으로 연단에 오른 유승민은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다”며 “성장과 복지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자유시장 경제와 한국 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치겠다”고 말했다. 야당까지 박수를 보낸 연설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연설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또 다른 보수언론, 중앙일보는 유승민의 연설에 박수를 보냈다.
“유 원내대표가 당내 의견을 모아 박 대통령이 추진해온 정책 노선과는 선을 그으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각을 세우고 나왔다면 집권 세력이 분열 조짐을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유 원내대표가 사견을 피력했다면 당의 대표로 연설대에 섰다는 것을 망각한 행동이다.” – 2015년 4월 9일 조선일보 사설
“우리의 보수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공정한 경쟁을 해본 경험이 없잖은가 말이다. 그걸 바꾸자는 게, 공정한 시장을 가진 진짜 자본주의를 해보자는 게, 그래서 보수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게 유승민의 ‘신보수’라고 내 귀에는 들리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 2015년 4월 11일 중앙일보 칼럼
조선과 중앙의 시각차는 ‘보수 재집권’의 대전제가 다르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념 보수’ 조선일보는 ‘보수가 하나로 뭉쳐야 재집권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박근혜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직전까지 보수는 박근혜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런 조선일보가 보기에 유승민이 박근혜와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우는 건 곤란하다.
반면 ‘실용 보수’ 중앙일보는 보수가 진보나 중도 유권자들에게도 매력을 느낄 정도의 포용력을 보여야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유승민은 중앙일보에 매력적인 캐릭터다. 유승민의 원내대표 연설은 보수가 새로운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유승민이 박근혜에게 찍혀 나가떨어지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당 의원들이 투표로 뽑은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로 규정했다. 조선일보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승민이 양보하라고 말한다. 보수의 통합 때문이다.
“유 원내대표가 끝까지 가겠다는 것은 옳지도 않다. 대통령까지 포함된 여권의 내홍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국정은 산으로 갈 테고, 그 가장 큰 책임은 유 원내대표가 지게 될 것이다 ” – 2015년 7월 6일 조선일보 사설
하지만 중앙일보에 중요한 건 보수의 통합보다 보수의 확장이다. 중앙일보는 박근혜와 싸우지 않고 있던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를 다그치며 유승민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박근혜 이후 보수가 재집권하려면 유승민 같은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미움을 피하는 건 대권 후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결국은 대통령의 구심력에서 벗어난 독자성이 있어야 한다. 김무성 스스로 대통령과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보수의 상징인 박 대통령에게 보수 이미지나 경제로 경쟁해선 승산이 없다. 이런 약점을 보완해줄 인물이 유승민이다. 경제통인 데다 개혁 성향이 분명해 러닝메이트로 삼으면 외연이 크게 확장될 수 있다.” – 2015년 7월 6일 중앙일보 칼럼
진보언론 한겨레는 유승민과 박근혜의 갈등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결국, 원내대표에서 찍어내기 당한 유승민은 총선에서도 공천을 받지 못한 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한겨레는 유권자들을 향해 ‘이런 정당을 찍을 거야?’라고 묻는다. 유승민과 박근혜의 갈등으로 빚어진 보수의 분열을 ‘새누리당 심판’의 근거로 사용한 셈이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유승민 의원이 옳은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 세력이 옳은지는 이제 국민 판단에 맡겨졌다. 최소한의 자정 기능을 상실한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국민이 표로써 제어하는 길밖에 없다.” – 2016년 3월 23일 한겨레 사설
검증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프레임을 보라’
신간 [프레임 대 프레임]에서 나는 안철수와 유승민 외에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등 대선 주자 8명을 다뤘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한겨레의 기사와 사설, 칼럼을 통해 대선 주자 8명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을 재구성했다. 문재인은 어떻게 ‘노무현 프레임’을 극복했을까. 또 안희정의 ‘대연정’은 어떤 프레임을 돌파하기 위해 나왔을까.
8명의 주자 중에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들도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불출마 선언을 했음에도 프레임 전쟁의 검토 대상으로 포함시킨 이유는 이들을 통해 정치인이 언론의 프레임에 잡아먹히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가 똑똑한 사회에서 언론의 프레임은 선거나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변수가 아니라 여러 변수 중 하나일 뿐이며, 프레임 전쟁의 질은 미래와 비전, 정책 등 생산적인 수준으로 높아진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루어진 선거인만큼 언제보다 후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선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검증할 시간이 부족한 선거이기도 하다. 언론의 프레임을 인식하고, 후보자들을 재구성하고,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일은 유권자에게 그 시간을 단축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