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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는 그 최초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어떤 의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의미는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속도의 시대입니다. 정보가 쏟아집니다. 그 속도는 마약 같습니다. 미끈하고 탐스러운 스포츠카 같습니다. 한 번 취하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나오기 싫습니다.

그야말로 속도의 황홀경입니다. 세상 온갖 목소리가 나에게 연애하자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집니다. 서핑하고, 트윗합니다. 페북하고, 카톡합니다.

속도의 시대, 속도의 유토피아

트윗 한 줄도 아주 소중한 언론 행위입니다. 유명인이나 공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네 평범한 삶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뉴스’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놀라운 신세계가 이미 실현된 것 같습니다. 테크놀로지는, 마치 상투적인 광고 문구처럼,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이미 상상하고 실현했습니다.

이제 손바닥 안에 세계가 담깁니다. 스마트폰 속에 인터넷이 있고, 그 안에 세상 모든 풍경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한 줄 트윗이 세상에 퍼져갑니다. 페북으로 연결된 친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웁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이 다정한 재잘거림이 불현듯 깊은 적막을 만들어냅니다. 갑작스러운 정전처럼 모든 게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내가 세상을 그려가지 않고, 세상이 나를 물감 삼아 나도 모르는 세상을 그려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점점 더 희미하게 지워집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나에게조차 낯섭니다. 내가 글을 쓰지 않고, 글이 나를 씁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계라는 알 수 없는 시선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어느새 나는 이슈와 속도라는 괴물의 의미 없는 부속품으로 전락해갑니다. 더 이상 존재의 좌표도 나침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당신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뉴스

그토록 신 났던 재잘거림도 듣기 싫은 소음이 되어 나를 괴롭힙니다. 소박한 대화들은 사라지고, 선동이 난무합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나를 발견하고 나조차 놀랍니다. 페북의 다정한 친구들도 어느새 감시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망들을 이야기하기엔 다른 페북 친구들은 너무 화려합니다. 그렇다고 모난 돌이 되는 것도 싫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개성 없이 무난한 평균인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점점 작고 초라해집니다. 나를 다르게 보여주는 건 멋진 학벌과 직장, 그리고 근사한 해외여행 사진들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는 마지막 몸부림처럼…

그 와중에도 온갖 미디어들은 몸이 무너지고, 근육이 터지도록 뉴스들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는 마지막 몸부림 같습니다. 온갖 현란한 제목으로 미끼질합니다. 쏟아져나오는 뜬소문과 음모들은 어느새 우리의 사유능력을 무장 해제했습니다. 오보라도 상관없습니다. 팔리기만 하면 장땡입니다.

이제 성찰과 사색은 배부른 고민입니다. 우리는 당장 선택을 강요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내 편 아니면 적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한편 침묵 속에 나를 가둬두고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과 글은 욕망 그 자체입니다. 욕망은 한 번도 스스로 쉰 적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다시 욕망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각종 이슈에 침을 흘리며 말들을 짖어댑니다.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속도와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감옥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개혁과 정의를 리트윗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그 무수한 의미는 이내 타임라인의 희미한 잔상이 되어 사라져버립니다. 외침은 있지만 공감은 없고, 진영은 있지만 토론과 대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온갖 소문들이 진실을 압도하지만, 누구도 그 소문이 불러올 어둠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혼돈의 속도에 취해 우린 마치 기계처럼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개혁과 정의를 리트윗하지만 실은 더 많은 월급과 더 좋은 차와 더 넓은 아파트를 원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테크놀로지와 속도의 유토피아가 어쩌면 디스토피아는 아닌지 고민할 시간입니다. 속도와 욕망이라는 먹이를 먹고 자라는 이 괴물 같은 시스템이 어쩌면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형태의 감옥은 아닌지 따져볼 시간입니다.

InAweofGod’sCreation (CCL: BY 2.0)

보십시오. 우리는 놀랄 만큼 많은 이들과 관계 맺고 있지만,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놀랄 만큼 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점점 더 공감과 조화의 능력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갑니다. 그것도 기꺼이 좀 더 많은 페북 친구를 위해, 좀 더 많은 트위터 팔로워를 위해 경쟁적으로 그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올드미디어의 마지막 신음은 이제 듣기 괴로운 비명입니다. 그들은 불편부당의 주술 같은 주문을 외우고 있지만, 자극적이고 무책임한 고발과 선동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반복합니다. 유언을 남기듯 미친 듯 이슈를 찍어냅니다. 성찰과 반성을 위한 시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도착한 새로운 모험의 땅, 슬로우뉴스

그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고민을 이어왔습니다. 그게 벌써 족히 7, 8년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몇몇 실험을 통한 성공과 더 많은 좌절의 연대기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짧지 않은 연대기를 통과해 지금 도착한 새로운 모험의 땅은 ‘슬로우뉴스’입니다.

반성과 성찰을 담을 수 있는 속도는 ‘패스트’가 아니라 ‘슬로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열다섯 명의 창간 발기인들이 모여 편집팀을 만들고, 누군가에겐 여전히 소중한 뉴스인 바로 당신을 위한 뉴스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험을 떠나고자 합니다.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망각의 구조를 재편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이 속도의 세계가 우리에게 추억할 능력을 빼앗고, 기억으로부터 의미를 불러와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고 있진 않은지 슬로우뉴스는 고민해나갈 생각입니다. 이 시대 속에서 잊혀진 채 봉인된 기억들을 불러와 새로운 사유의 재료로 삼을 생각합니다.

물론 슬로우뉴스는 속도를 무조건 배격하는 우를 범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속도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사유할 작정입니다. 그 속에서 함부로 버려지는 가치를 걷어 올리고, 우리 자신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망각의 구조를 재편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찰의 터널’

이를 위해 우리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성찰의 터널’이라고 할만한 대화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대화 그룹은 기획부터 집필까지 상호 비판적 협업의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작업을 이어갑니다. 전화와 문자, 이메일, 오프라인 미팅과 일대일 인터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대화합니다. 우리는 이 대화들을 페북 비밀그룹에 쌓아놓기도 하고, 구글 공유문서에 보관하기도 합니다.

이 대화들은 언젠가 또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과 공유할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쌓아갈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이 준비해야 하는 모험을 위해 기억할 필요 있는 것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험들이 이어지고, 서로 만난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에 흩어진 의미들의 찬란한 귀향이 축제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새로운 속도를 제안합니다.

그 속도는 ‘슬로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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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댓글

  1. 닭 쫓는 개가 되어 길을 잃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거기에 돌이켜 되새겨 소를 키우는 마음의 우직한 좌표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렇다고 그 잘난 소몰이 창법으로 몰아가는 기름진 이야기는 경계했으면 좋겠네요. 오랫동안 고민한만큼 그(무엇을) 상상한 것 이상으로 끈적끈적하게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네요. 그 새로운 속도의 문제(슬로우?)에대한 성찰과 사유라고는 하지만 거기에서 옮겨올 그 몸놀림? 글놀림? 그 이야기들은 “… 슬로우 슬로우~ 퀵 퀵!! …” 리듬을 타듯 경쾌했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2. 이제는 조금은 정든 벗이라고 말하고 싶은 대팔 님께서 이렇게 격려와 따뜻한 염려를 함께 담아주시니 그야말로 기쁘네요. 앞으로 슬로우뉴스 잘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참여해주세요! 올해엔 꼭 이대팔 님을 댓글창에서 본문창으로 데뷰시켜야겠습니다. : )

  3. 무지 축하드립니다. 필진들이 한결같이 사심이 없으시니 좌초할 이유도 없겠지만, 들고나오신 화두가 정곡을 찌릅니다. 정말로 시의적절하군요. 저도 응원삼아 예전에 쓴, 슬로우뉴스의 도래를 예견한 듯한 글을 링크합니다. 근데 트랙백은 되지 않나요?

    ‘실시간 웹’ 혹은 ‘감정적 웹’: 속보와 신뢰의 딜레마 (http://blog.ohmynews.com/hypersurface/161313)

  4. “슬로우뉴스” 창간을 축하합니다.

    정말로 훌륭한 글들이 많아서 행복할 지경입니다. 고민과 성찰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모험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셔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민노씨의 ‘창간사’ 혹은 ‘초대사’에서 이 슬로우뉴스의 마음을 알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5. 늘 한결같이 든든하게 의지와 쉼터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 신부님께서도 슬로우뉴스의 ‘아름다운 일부’가 되어주시길!

  6. 서핑도중 슬로우라는 문구에 끌려 도착한 곳이 여기네요..
    글을 읽으면서 공감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슬로우뉴스를 위해 모인 관계자 여러분들의 신념과 이데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위에서 언급하신 쓰고 보자는 식의 기사는 정말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이 물질이 아닌 진정한 기사를 보여주는 슬로우뉴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슬로우뉴스가 번창하여 물질들이 쌓이면 금상첨화구요~ 앞으로 기대 많이 할게요^^

  7. 슬로우의 함정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슬로우가 뒷북만 되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단지 시간적으로 뒤에 나왔다는것 만으로도 성찰의 이슈가 사라지는 것들도 있고.. 애매하네요.. 그래도 기존언론과 네트워크 환경의 미싱링크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이팅요!!

  8. 마음이 뜨끔해졌다가 따뜻해졌다가 이내 어떤 결의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표현할 순 없었지만 막연히 느꼈던 것들을 이 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흩어진 의미들의 찬란한 귀향”,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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