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7면에 실린 사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지 9일째, 장소는 청와대다. 왼쪽 사람은 ‘큰 영애’ 박근혜이고 오른쪽은 당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다.
이멜다 마르코스
이멜다 마르코스를 아직 기억하거나 그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세계적인 화제를 뿌린 인물이다. 필리핀에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멜다의 남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5년에 대통령이 된 뒤 21년 동안 권력을 놓지 않았다. 그는 여러 면에서 박정희와 흡사했다. 비슷한 시기에 오랫동안 장기 집권을 한 점, 꼭 같은 해(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뜯어고치며 철권 독재를 편 점,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은 점 등이 그렇다.
차이가 있다면 박정희의 등장과 몰락이 마르코스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시작하여 암살로 끝났고, 마르코스 정권은 선거로 시작하여 국민의 시위와 저항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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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필리핀 정국은 엉망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해외 망명에서 돌아온 강력한 야당 지도자는 고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국민은 마르코스가 시킨 일이라고 믿었다. 대선에는 사망한 지도자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출마했다. 마르코스의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필리핀 국민은 아키노를 지지했다. 그러나 현 대통령 마르코스가 또 이겼다. 무자비한 부정 투표를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국민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국민 80%가 믿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반정부 시위의 선봉에 섰다. 정부 관료들과 군부도 마르코스에 등을 돌렸다. 강력한 국민 저항에 직면한 마르코스는 버틸 대로 버텨보다 결국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마르코스 부부는 독재자와 깡패들의 흔한 피신처인 하와이로 도망갔다. 이른바 1986년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이었다. 말 그대로 민중의 힘으로 철권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항하던 한국의 반정부 세력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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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남편 못지않았다. 미인대회 준우승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페르디난드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이 대통령이던 시절, 10년 넘게 수도인 마닐라 광역시 지사를 지냈다. 장관도 했다. 1979년에 시작해 1986년 남편과 함께 쫓겨날 때까지 자리를 유지한 장수 장관이었다.
수십 년에 걸친 장기집권 동안 마르코스 부부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국가 자원을 빼돌리고 부정부패로 이룬 재산이었다. 필리핀 대법원은 마르코스 부부가 재임 중에 1백억 달러, 우리 돈으로 10조 원 이상을 축재한 것으로 평가했다. 1980년대에 이멜다는 뉴욕의 빌딩들을 사 모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까지 사려고 했으나, 남 눈에 너무 띄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하와이로 도피할 때는 미군 수송기 C-141 두 대에 옷과 귀금속, 현금을 가득 실어 갔다. 보석 장신구만 해도 413개였다.
이멜다의 부정부패와 사치는 국민 저항에 밀려 떠난 대통령 궁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3천 켤레 가까운 명품 구두들이었다. 이 구두들은 지금은 필리핀의 박물관 두 곳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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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사망 이후 이멜다가 박근혜를 찾아온 것은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다. 기사에 따르면 이멜다는 한 시간 동안 박근혜를 만나서 “오래전부터 아름답고 크게 발전한 한국을 방문하길 희망해왔으나 갑자기 박 대통령이 서거하여 애석하기 짝이 없다. 한-필리핀 양국은 오래전부터 우호 관계가 돈독해왔으며 앞으로도 이 우호 관계는 유지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안정된 후 큰 영애, 작은 영애, 지만 생도가 필리핀을 방문해 줄 것을 바란다’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초청의 뜻도 전했다고 한다.
양국 독재자들이 사이좋게 장기집권을 향해 달리며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는지 모르지만, ‘큰 영애’는 이멜다의 초청을 받아 필리핀을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박정희 사후 80년대에 남 눈에 띄는 생활을 하지 않았고, 마르코스 정권은 1986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잉락 친나왓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2013년 4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명단을 발표했다. 한국인은 남북한을 합쳐 세 명이 꼽혔다. 김정은, 박근혜, 그리고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각 인물에 대한 기사는 [타임] 기자들이 아니라 해당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이 썼다. 박근혜에 대해서는 현직 태국 총리인 잉락 친나왓이 썼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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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국의 흔들리지 않는 후계자
–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박근혜 여사는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서, 유리 천장을 깨고 나가려는 모든 여성과, 국민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모든 개인에게 영감이 된다.
나는 박 대통령을 그녀의 취임식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가 맞이한 첫 번째 외국 원수라는 영광을 안았다. 전 대통령의 딸로서 그녀가 가진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정치적 혈통은 정치, 국제 분야에서 폭넓은 경험으로 표출되며, 한국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겠다는 그녀의 포부로 이어진다.
여성 지도자들은 종종 남성이 치르지 않는 시험을 치르게 된다. 박 대통령은 한국인의 희망과 행복의 시대를 열고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역동성에 기여하는 데 필요한 소양을 갖춤으로써, 그녀의 나라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동남아 공동체에까지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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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원수에 대해 외교적 덕담으로 쓴 것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추켜세우기가 낯간지럽다. 친나왓은 필자로 의뢰를 받기는 했지만, 짐작건대 그녀가 박근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여자라는 점, 대통령이라는 점, 그리고 전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점뿐이라는 의심이 든다. 적지 않은 한국인 역시 똑같긴 하지만 말이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으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면, 잉락 친나왓 총리 역시 가족의 후광을 받아 권력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잉락의 오빠가 전 총리였다. 사돈집도 총리를 했다. 유리 천장을 깬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기득권의 도약대를 발판 삼아 이룬 이들의 성취가 뭇 여성에게 얼마나 영감이 될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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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나왓은 [타임]에 박근혜 찬사를 쓴 때로부터 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다. 권력 남용과 부패 혐의였다. 그 앞에는 태국 일부 국민의 저항이 있었다. 야당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가 2013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줄기차게 벌어졌다. 현 총리인 잉락 친나왓과 그의 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그리고 이들이 이끄는 정당은 태국에서 대체로 지지를 받았지만, 적지 않은 국민은 이들을 부패 세력으로 인식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치 환경, 수십 년 뒤얽힌 정치 갈등, 수시로 개입하는 군부 등으로 인해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 잉락 친나왓에 반대하는 국민, 이른바 ‘노란 셔츠 부대’는 줄기찬 시위를 벌였다. 반대로 친나왓을 지지하는 친정부파도 있었다. 이른바 ‘빨간 셔츠 부대’였다. 양측 간의 갈등으로 인해 사태는 폭력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야당 국회의원들이 전원 사퇴하였고, 2014년 5월 7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친나왓이 친인척을 경찰청장에 임명한 것이 권력 남용이라고 판결하고 해임을 결정하였다.
정치권이 과도 체제에서 논란을 벌이는 동안 거리에서는 친나왓 일파에 반대하는 군중이 언론사를 점거하고 정부 기관에 난입했다. 반정부파와 친정부파 간의 극심한 갈등도 계속되었다. 내전 가능성이 공공연히 언급되었다.
친나왓이 실각한 지 13일 만인 2014년 5월 20일 마침내 태국 군부가 개입하는 쿠데타가 벌어졌다. 군부는 태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정을 장악했다. 석 달 뒤인 8월에 군 장성 쁘라윳 찬-오차가 자신이 선택한 의원들에 의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한국 언론은 흔히 친나왓이 군부 쿠데타로 밀려났다거나 실각했다고 쓴다. 예1, 예2, 예3.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친나왓이 쫓겨난 뒤 허약한 과도정부 체제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잉락 친나왓이 총리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오랫동안 태국을 괴롭혀 온 정치 갈등 탓도 있지만, 그녀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점도 분명히 있다. 측근을 요직에 임명하고 부패를 묵인하는 등 권력 남용으로 지탄 받을 일들을 벌여 민심 이반을 자초해왔기 때문이다. 친나왓은 얼마 전인 2016년 10월에 태국 대법원으로부터 1조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쌀 수매가를 높여주는 선심성 정책을 펴면서 부패를 벌이고 묵인한 혐의다.
박근혜의 묘비명엔 어떤 문구가 쓰일까
박근혜를 지극한 말로 위로하거나 화려한 말로 치켜세웠던 아시아의 두 여성 지도자. 이들이 모두 극단적인 부패 논란을 일으키고 국민을 분열시켜 갈등을 촉발한 끝에 결국 민의에 밀려 쫓겨났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시아 정치 문화에서는 정치 자원을 독점한 세력이 끼리끼리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부패도 여전히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도 한계가 있다. 부패와 전횡이 국민이 견뎌낼 수 있는 한도를 넘으면, 결국 민심이 이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린다.
올해 87세인 이멜다는 자기가 죽고 난 뒤 묘비명에 쓸 문구를 정해 두었다고 한다. ‘여기 사랑이 잠들다(Here Lies Love).’
이 문구에서 ‘사랑’이 주체인지 객체인지가 좀 모호하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객체는 아닐 것이다. 반면, 돈과 권력에 대한 사랑으로 한 나라를 망쳤음을 고려하면, 이멜다는 사랑이란 말의 주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 ‘여기 탐욕이 잠들다’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박근혜가 죽고 나면 묘비명에 어떤 글이 쓰이게 될까. 한국 대통령들의 거대한 묘비에는 대개 특별한 문구 없이 ‘(제O대) 대통령 OOO의 묘’ 같은 글자가 찍혀 있다. 박근혜의 묘에도 그런 글자가 찍힐 것이다. 그 묘비 아래 사랑받는 정치인이 누워 있는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사랑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두루 미움을 받는 정치인이 누워있는지는 관 뚜껑이 덮이기 전에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