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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할 길고 불편한 이야기는 내 자신이 피해자인 직장내 성범죄와 관련한 외로운 싸움에 대한 것이다. 나 외에 이미 많은 사람이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기록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을 다룬다. 이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바란 사람도 적을 것이고 심지어 공개되기를 바란 사람은 그보다 더 적은 수일 것이다.

진실 기억 사실 퍼즐

내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주가 될 것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이 일에는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관련자의 신원 정보나 회사명을 공개할 생각이 없다. 구별이 필요할 경우 이니셜을 사용하려 한다. (필자)

어느 언론사에서 생긴 일

  1. 불편한 이야기
  2.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제3자
  3. 죄와 밥
  4. 조직이 원하는 것 
  5. 다시 원점으로
  6. 회사의 사건 처리법
  7. 기사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8. 성범죄보다 300만 원이 중요한 회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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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폭력 피해를 입은 조직은 언론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이 조직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언론사의 사회 고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목격하고도 여전히 기자 개개인에게 추상적인 기대치를 갖고 있었다.

언론 조직과 기자에 대한 기대

극심한 감정적 고통을 겪으면서 여기서 벗어나 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다른 기자들이 이런 정보를 어떻게 다루고 처리할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음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언론 조직에서 기자들이 직장 내 성폭행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론 조직에서 기자들이 직장 내 성폭행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해결을 시도하고자 이 이야기를 가해자 X에게 꺼냈을 때,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X 두 명만 알고 있었다. 블랙아웃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인정하지도 못했던 X는 당연히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 역시 사적인 해결을 원했으므로 처음에는 X 이외의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이 반년 동안은 나와 X 외에는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감정이 터져 다른 직원에게 X의 신원을 제외하고 나의 피해 사실만 알린 적은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 사람 선에서 더는 넘어가지 않았다.

X는 이 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인정하기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X 스스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내가 X와 대화하는 것으로 사과를 받기도 어려웠고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X의 상급자 D를 찾아 이 이야기를 전하고 X의 사과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X는 기묘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랬다면 미안하다는 내용의 조건부 사과였다.

조건부 사과에 더 화가 났던 건 내가 예민했던 탓은 아닌 것 같다. X가 보여준 반응은 지금 다시 되새겨도 유쾌하지 않다. 분명히 있었던 사건으로 나는 잠도 이루지 못하며 고통받고 있는데, X에게는 그게 가정이고 조건이라는 데 화가 났다.

한 명만 빼고 모두 다 

이 이야기에 대해 말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조차 결정을 못 한 상태에서 넘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회사의 몇몇 사람에게 이런 저런 내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에는 내가 스스로 판단력을 의심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적잖이 놀랄 일이 있었다. 함께 일했던 여러 여기자가 나에게 자신의 피해 사례를 털어놓은 것이다. 회사 내부 여직원은 비율상으로는 소수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내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 가족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
  • 아내가 있는 선배로부터 느닷없이 포르노 영화를 메일로 받은 이야기
  • 버스 내에서의 성추행, 성폭력 목적으로 지인이 자신의 집 문을 깨뜨려 집에 침입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 언론사에서 일하다 직장 사람을 성폭력으로 고소했더니 회사가 피해자 조서를 입수하려 했다는 이야기
  • 명백한 성추행 상황을 목격하고도 그게 뭐가 문제냐며 동료들이 넘어가려고 해서 그 일을 억지로 덮어야 했고 수년이 지나서야 다른 사건으로 가해자가 징계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가운데는 최근의 이야기도 있었고 오래된 이야기도 있었다. 이 조직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다. 대부분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갔다고 한다. 내 세상이 깨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일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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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많은데 가해자는 극소수 

자신의 깊은 상처를 내보여서까지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그들에게 감사한다. 당시 내 주변 여성의 대다수가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범죄는 특성상 가해자의 고의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여성 대다수가 성폭력 피해가 마음에 박혔다고 말하는데 성폭력 가해자라고 혹은 가해자였다고 하는 사람은 이에 비해 극소수다.

X는 워크숍에서의 행동이 가해행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 행동을 했다고 기억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했다. T는 자신의 행동이 가해행위라는 인식이 없었다. 성폭력 가해와 피해는 얼른 알아채기 어렵다. 피해자도 자신이 겪은 일이 피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성폭력 가해행위라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면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라는 것을 끝내 모를 수도 있다. 피해자가 책임을 떠맡는 셈이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성적 감수성은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가해임을 아는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 성폭력은 다른 것 없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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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사과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X를 고소했다. 이 시기에 X는 스트레스로 체중이 줄었다고 한다. 고소 후 X는 내 마음이 풀리도록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이 제안에 동의해 결국 고소를 취하했다. 사내 성폭력 피해에 대한 후유증으로 병가를 내고 휴직한 직원은 내가 그 일을 겪고도 회사에 다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고 했지만, 나라고 편해서 다닌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괴로웠고 휴직한 직원이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휴직을 신청할 처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회사 차원의 지원을 받는 소송에 걸렸다는 이유로 기자가 나에게 일을 모두 넘기는 상황을 겪어야 했고 가끔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는데 그래도 버텼다. 나가면 피해자로서, 혹은 가해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일 때문에 내가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게 이 일을 벌이고서 지키려고 한 단 하나의 원칙이었다.

고소 취하 후 직장 동료들의 반응 

결국, 이 일은 내가 고소를 취하하는 방향으로 끝이 났다. 고소를 취하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우선 나에게 조언을 해준 사람들에게는 고소 취하 사실을 알렸다. 그 직후 동료 기자 한 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기자는 X로부터 고소 진행 중에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메시지에는 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메시지를 받은 기자는 전화해서 지금 협박하는 거냐고 말하려다가 내가 고소한 것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그런 식으로 개입하면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몰라 그냥 참았다고 했다. 고소가 취하된 후에도 일괄적으로 고소 취하 사실을 알리는 단체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동영상 하나를 첨부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업무의 연장으로 어떤 기자가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묻기에 나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기자는 잠시 말을 못하더니 혹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냐고 되물었다. 이 기자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고 그에 대해 사과를 표시한 것이다. 이 당시의 나는 누군가가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만큼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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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대해 내게 묻는 사람은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사건과 관련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내 버전과 X의 버전 두 가지가 돌고 있었고 이 둘은 내용상 차이가 커서 구분하기 쉬웠다. 이 기자가 가진 정보는 내 버전에 가까웠다. 나는 질문에 답했지만 나 역시 정보의 출처를 되물었다. 기자는 처음에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추궁했더니 출처가 되는 다른 기자를 알려줬다.

그런데 그 기자도 내가 사건에 관해 전혀 알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기자를 찾아가 다짜고짜 정보의 출처를 물었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서 두어 번 더 물었더니 컴퓨터에 최고위 간부 한 명의 이름을 타이핑했다. 나와 X가 알고 있는 회사 내 정보 전파 체계에는 각자의 차집합이 있었던 것 같다.

회사는 철저하게 ‘구경꾼’ 

이제야 거미줄 같은 정보망이 제대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해당 최고위 간부와 안면이 없었으므로 또 다른 출처가 있었을 텐데 그 출처가 누군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딱히 그 정보 제공자를 찾아가 왜 그랬느냐고 따져 물을 생각도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는 게 맞겠다. 내가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무슨 타격을 입겠는가. 이 일은 그저 진작 경고를 듣지 않은 내 탓이었다.

그러니까 이 회사는 회사 차원에서 이미 사건 내용 일부를 수집했고 일정 부분 이상 파악하고 있었지만, 나를 위해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사건 해결을 위해 조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피해자인 나를 위해서도, 가해자인 X를 위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회사 방관자

그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일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고 커지지 않는 이상 이들은 아무 일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고, 그게 나를 위한 일이든 X를 위한 일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조직이 타격을 입지 않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X는 물론이고 나도 조직이 타격을 입는 선까지 일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내가 그 안에서 죽어가든 비명을 지르든 내버려두면 되었다.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이유를 들어 나를 해고하면 될 일이다. 참 기자다운 대처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사안을 지켜보고 동향을 파악하지만,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최고위 간부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이 회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걸려온 검사의 전화 

고소를 취하하고 몇 달쯤 지난 어느 날 오전, 전화벨 소리에 깼다. 전화를 받았더니 어느 검찰청의 모 검사라면서 고소했던 사건에 관해 물을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을 치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소를 취하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다. 비록 고소 당시 X가 나를 상대로 명예훼손과 무고를 걸겠다고 온 회사에 알렸고, 고소 취하 후 굳이 내게 사과한 것을 열심히 취소하기는 했어도, 이 역시 내가 고소를 취하한 지 몇 달이 지난 마당에 새삼스럽게 일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전화 건 사람에게 X가 내게 무고를 걸었냐고 물었더니, 가해자 X측에서 무고를 건 것이 아니라 고소 취소된 사건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검찰 측에서 무고 여부를 판단하게 되어 있고, 피의자 X가 제출한 자료가 모호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X가 제출한 자료는 내가 사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보낸 메시지였다.

X는 내게 경찰 측에서 자료 제출할 것이 있냐고 물어서 있다고만 말하고 제출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이 X가 경찰에 출석한 이후였으니 이미 제출했던 모양이다. 메시지는 내가 사과를 요구하려고 보냈던 것이고 내가 포함된 대화이기 때문에 나 역시 이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음은 물론 기록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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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를 취하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검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내용이 X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내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 일을 풀고 용서하고 화해해보겠다고 했던 시도가 되돌아와 비수처럼 꽂혔다.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떳떳하지만 잘 풀어보려고 참고 참아가며 했던 노력을, 수사기관은 무고했다는 단서일 수 있다는 의혹이라고 하는데 화가 났다.

X가 내게 조사 진행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일로 다시 검찰에서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는 연락을 받고 검찰에 출석하기까지 거의 한 주간 내내 신경이 쓰였다. 겨우 조금 잊어가나 싶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한창 경찰 조사로 사건이 온통 들쑤셔질 때처럼 이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좌절감에 시달렸다. 실제로 출석하는 당일까지 조사받고 스트레스 받는 꿈에 시달렸다. 사내에서 어쩌다 뒷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소름이 끼치는데 나는 검찰에서 재진술할 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 X는 승진했다.

가해자 X의 주장들  

처음에는 X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검찰에서 연락이 왔을 때, X가 무고를 건 것이 아니라고 했다. X가 나를 고소한 것이 맞다면, 검찰은 그 사실을 내게 무조건 고지해야 한다. X에게 아는 검사가 있을 수 있고, 내게 압력을 넣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음모론적인 발상도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X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약점을 드러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로써 화풀이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 도움 될 것이 없어 그만두었다.

X가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보냈던 D와 G가 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X는 어쩔 수 없이 경찰에 출석했는데, 당시 X가 제출한 경위서에 내가 무고했다는 식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고소할 때 경찰에서 조서 작성과 진술 녹화만 했고 조서를 최종적으로 확인했을 때도 제법 큰 폰트로 10여 페이지였다. X가 제출한 것을 대강 보니 내가 작성한 조서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경위서에 자료, 내 주장이 신빙성 없다며 반박한 내용 등등. 나처럼 그냥 경찰서에 가서 진술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치밀하게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몇 증인이 개입된 상황 탓에 그 정성에 비해 논리는 빈약했다.

Alex Pepperhill, CC BY ND https://flic.kr/p/cUuknb
Alex Pepperhill, CC BY ND

X의 주장은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하도 어이가 없어 재미있을 정도지만, 당시에는 그 어이없음에 화가 났다. X는 내가 사건 직후에 고소하지 않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소를 제기했다는 것이 내 주장이 신빙성 없는 이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내가 사건 2주 후 X에게 사건을 처음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사건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모두 사라졌고, 만나지 못했던 한 달 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고 했다며 마치 내가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허위 진술을 했다.

우선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사건 이후로 살아있다는 게 버거워 내가 그 사건 후로 얼마나 더 살아있는지,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기 때문에 2주를 한 달로 잘못 말했을 리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도 사건 날짜와 X에게 사건을 언급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증빙도 어렵지 않다.

고소 취하 이후 왜 굳이 역효과가 날 만한 이야기들을 내게 하나 했는데, 검찰에 가보니 나와 마련한 자리에서 당시에 했던 말들이 X가 경찰 조사에서 했다는 말과 대부분 일치한다. 아마 내 앞에서 그 말을 함으로써 그 주장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더 공고히 하고자 그런 말들을 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검사가 내게 반박을 요구한 것들은 거의 그 내용이었다.

검사가 들려준 이야기 

담당 검사와 조사 과정에서 말을 해보니 사회 경험이나 성범죄 사건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조사 중에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묻는 내용이나 말하는 것을 볼 때 무고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검사 자신이 성범죄에 대한 프레임을 잡기 위한 시범 케이스로 피해자의 증언을 수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자를 불러 고소 취하된 사건에 대해 재진술을 시키니 나는 검사에게 2차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모르던 것을 검사가 알려준 것도 있었는데, 성범죄 사건은 고소횟수가 늘어날수록 피해자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그는 말했다. 검사는 담당 검사가 무고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무고를 걸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말을 고소를 취하할 당시 담당 형사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검찰청 출입증을 목에 걸고 겨우 잊어가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고소 취소장에 X의 사과를 사유로 적었지만, 이후 이 사과가 사실상 취소된 것은 어차피 고소 취소를 취소할 근거가 아니었다. 물론 법률상 고소 취소를 취소할 방법도 없다.

검찰 색반전

검사는 몇 가지 다른 이야기도 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어깨를 잡았다는 것 하나로 고소 접수된 사건이 법원에서 재판 중이라거나, 여성 피해자가 회사에서 있었던 성폭력 피해를 고소했는데 같은 회사에 있던 여직원들이 모두 가해자 편에 서서 진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자의 경우 회사에서 압력이 있었나 싶어 검사가 여직원들을 전부 따로 불러 조사했는데 다들 그런 것은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X가 제출한 것들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었나 싶고 갑갑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최초의 사건보다 그 후 X의 대처에 분노가 일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밖에 대처할 수 없었던 X의 인격이 안쓰럽다. 나는 이 시점에서 잊고 넘어가야 할지, 아니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지를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을지 다시 고민했다. 사내에서 문제를 제기할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회사의 성폭력 사건 처리 방식 

X는 내가 검찰까지 다녀온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리가 가깝다 보니 회사에서 X와 마주치는 상황이 적지 않았는데 X도 내가 마냥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에서 내게 표면적인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아는 몇몇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불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있었다. 기자 한 명은 멀쩡히 지내다가 내가 개입된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기도 했다.

나는 피해자로서 개입되었지만, 그에게는 가해자 X보다 고소할 줄 아는 내가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는 나와 X의 사건이 알려지기 전 이미 다수의 성폭력 기사에 대해 여자가 사기 치는 것 아니냐고 한 적이 있었고 그 외 사내에서 하고 다닌 몇 가지 말 탓에 인간적인 신뢰를 버린 지 오래였기에 별로 충격은 없었다. 이 사람은 여전히 회사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한다. 성인지 감수성 수준은 사회적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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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의 경우, 성폭력 문제에 대해 외부에 알려져 여론이 의식되는 사안일 경우에만 해임을 시켰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이하의 징계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대체적인 처리 방식이었다. 회사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논리는 여전히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이때까지도 곧 X가 진심으로 뉘우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나는 사건 자체보다 일이 알려진 이후 X를 포함한 회사 사람들과 조직의 태도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고 크게 실망했다. 이 일로 나는 1년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검찰은 이 사건에 끝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해주었다. 나와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면, 고소 취하 이후에도 재차 수사기관에 불려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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