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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역사에 숨겨진 비밀: 농업과 말라리아

말라리아가 있던 지역, 혹은 새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농업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농업을 시작하며 이루어지는 개간 및 벌채는 주변에 극적인 환경 변화를 만들어냈고, 특히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지표수(땅윗물)의 분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농업과 말라리아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경의 시작

농경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로 추정된다. 초기 인류가 땅으로 내려와 농경을 시작했을 무렵, 즉 지금으로부터 약 7000~8000년 전 당시의 아프리카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과 사뭇 달랐다. 지금 사하라 대사막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본래 거대한 초원 지역이었고, 현재 급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은 사바나였다(현재의 말리, 니제르, 차드 등).

아프리카 지도

그리고 서아프리카 해안지역부터 중동부의 빅토리아 호수까지 거대한 열대우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기니, 시에라리온부터 콩고와 남수단, 우간다까지) 그 아래로는 역시 거대한 열대기후의 숲들이 자리하고 있었고,(잠비아, 앙골라 등) 현재의 남아공 일대 역시 대초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시작된 인간의 농경과 급작스러운 기후변화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기후변화로 많은 게 달라졌다

기후변화는 아프리카 북부 초원지대를 사막화시켰으며, 인류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강제했다. 그뿐만 아니라 농경이 아닌 수렵·채집으로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수렵·채집의 경우 1제곱마일(2,590m²)에서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1~2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도시의 인구밀집도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경우 6,000~7,000명/㎢를 넘어선다.

농경은 이런 거대한 인구를 좁은 지역에 머무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단위면적당 높은 산출량 때문이었다. 인류는 한곳에 머물러 사는 정주생활이 가능해졌으며, 대규모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화전이나 개간 등 대단위 개입이 환경에 가해졌으며, 더불어 농업을 위해 물을 끌어와야 했기 때문에 지표수의 분포도 급격히 변하게 되었다. 농업을 위해 들여온 말이나 소 등 가축이 불어나 인근 동물군을 변화시킨 것도 환경에 영향을 주었다.

들판

농경 이후 말라리아가 유행을 시작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기 전부터 말라리아는 있었다. 하지만 농경이 시작되고 인구규모가 변하면서 말라리아도 따라 변해왔다. 이전까지는 대체로 잠복기가 길고 치사율이 낮은 말라리아들이 유행했다. 인간 말라리아는 크게 5종이 있는데, 열대열 말라리아는 잠복기가 짧고 치사율이 높다. 대체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하는 말라리아가 열대열 말라리아다. 반면 한국에서 유행하는 삼일열 말라리아의 경우에는 치사율도 낮고 잠복기가 길어 전파 속도가 느린 편이다.

열대열 말라리아 같은 공격적인 말라리아가 인구집단 사이에서 계속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농경 이후로 추정된다. 들불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전염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충원되는 숙주들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홍역 같은 질병들이 대표적인데, 한번 감염된 이후 면역을 획득하는 홍역은 인구가 수십만 명 규모로 유지되지 않는 이상 같은 인구집단 내에서 유지되기가 어렵다. 결국, 인구 집단의 규모가 불어나면서 새로운 말라리아가 등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말라리아의 특성

말라리아에는 몇 가지 독특한 특성이 있다.

첫 번째는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곤충매개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수인성 전염병과 매우 비슷한 특성을 띈다는 점이다. 이는 모기가 물에서 번식하기 때문이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없으면 전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기가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 누구를 물 것인지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말라리아 매개 모기가 번식하기 알맞은 물이 늘어나면 모기가 늘어나고, 모기가 늘어나면 모기에 물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모기에 물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도 커지게 된다. 흔히 지진이나 쓰나미 이후 고인 물이 많아지면 말라리아가 급속도로 늘어나며 공중 보건에 위험을 가하는 상황이 이런 배경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의 특성은 열대열 말라리아는 면역 획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말라리아에 자주 감염되는 사람은 임상적 면역이라는 형태의 면역을 가진다. 말라리아에 감염은 되나 고열 등의 증상이 점점 경감되는 현상을 말한다. 숙주가 기생충에 적응해가는 과정의 일종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혈액 내에는 계속해서 말라리아 기생충이 돌고 있다는 점이다. 모기에 물리면, 다시 말라리아 기생충을 전파할 수 있다.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 (출처: 원광보건대학교 김유현 교수님 홈페이지)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 (출처: 원광보건대학교 김유현 교수님 홈페이지)

농경이 탄생시킨 것은 열대열 말라리아뿐이 아니었다. 열대열 말라리아 혼자만의 작품이었다면, 현재 인류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전염성 질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농경이 만들어낸 환경은 감비아 모기(Anopheles gambiae)의 등장을 부추겼다. 감비아 모기는 농경이 만들어낸 탁 트인 환경에서 번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뿐만 아니라 말라리아 기생충을 훨씬 효과적으로 옮기는 모기이기도 하다. 모든 모기가 말라리아를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기 체내에서 말라리아 기생충이 증식해 사람에게 옮겨지는 과정도 모기 종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감비아 모기의 경우에는 말라리아에 의한, 말라리아를 위한, 말라리아의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말라리아도 이동했다

다시 옛날이야기로 돌아오자. 아프리카 내부의 인구 증가와 기후 변화로 수용량이 한계에 도달하자 인류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불리는 인류의 대이동은 말라리아도 세계 곳곳으로 함께 이동시켰다. 세계 어디를 가나 모기는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인류가 저 북쪽, 베링해협을 지나 아메리카에 진출하는 과정에서는 너무 추워 모기가 없었기 때문에 말라리아 함께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에 말라리아가 유입된 것은 15세기 유럽인과 서아프리카 노예가 유입된 이후로 추정된다. 이후 각지에서 말라리아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피해를 당하여왔지만, 역사에 말라리아가 대규모 피해를 준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로마 시대를 전후해서부터다.

사르데냐 섬의 말라리아 유입기

이탈리아 반도 서쪽에 위치한 사르데냐 섬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지명이지만, 말라리아 학자들에게는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에서 말라리아 유행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본래 사르데냐 섬은 말라리아가 별로 없었다. 기원전 1800년 전 사르데냐에서 일어난 누라기 문명은 거대한 석조유적들을 남겨 놓았다. 본래 말라리아가 극심했던 지역이었다면 이런 문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르데냐 섬의 누라기 유적

사르데냐 섬의 누라기 유적

하지만 기원전 5세기경, 카르타고 침공이 일어났다. 사르데냐 섬은 해안 저지대의 넓은 평야와 섬 중앙의 고지대로 분리되어 있다. 누라기 문명은 저지대에서 발생했는데, 카르타고 침공 이후 본래 거주민들은 고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사르데냐를 본국의 식량 생산 기지로 삼아 본래 주로 목축업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던 저지대의 평야를 농경지로 변환시켰다.

이 지역은 주로 밀 같은 작물을 생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plantation)으로 변환시켰다. 하지만 고지대로 이동한 누라기 사람들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에 주로 북아프리카에서 끌어온 노예로 인력을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첫째, 본래 모기들이 피를 빨던 가축들이 사라졌다. 이 지역 모기들은 사람보다는 가축의 피를 선호했기 때문에, 목축을 위주로 하던 누라기인들은 모기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었다. 하지만 이들이 고지대로 밀려나고 저지대가 농경지가 되면서 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아야 했다.

둘째로, 북아프리카 노예의 유입이었다. 북아프리카는 본래 말라리아가 유행하던 지역이었고, 이 지역 사람들이 대규모로 섬에 유입되자 말라리아도 따라 올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광범위한 농경의 시작이었다. 농경을 위해 숲을 거의 다 밀어내고 경작지로 바꾸자 말라리아 매개 모기들의 서식처도 함께 확대되었다. 이런 요인들이 말라리아를 증폭시키며 유행은 극대화되었고, 1930년대 조사를 따르면 섬 전체 인구 중 62.8%가 감염되어 있었다.

남부 유럽에서 계속되는 말라리아

피 빠는 모기남부 유럽에 대한 말라리아의 지배는 이어졌다. 사르데냐 이후 남부 유럽을 강타한 말라리아의 유행은 로마 공화정 후기 무렵이었다. 공화정 후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을 뿐 아니라, 말라리아가 가장 극심한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도 농업과 경제, 그리고 말라리아가 한데 엮여 있다.

당시 로마 내부의 농업은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정치적인 불안정과 시장 변화로 소농들이 몰락하고 거대한 장원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내·외부적 요인이 있었다.

먼저 공화정 후기에는 잦은 전쟁이 있었다.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 전쟁을 통해 수많은 농민이 병사로 징집되었다. 징집된 농민들은 농지를 가꿀 수 없었고, 남은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완전히 망가진 토지나 대지주에 땅이 이미 팔려나간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 이후 토지소유 및 매매에 대한 법률이 완화되면서 몇몇 대지주에게 토지가 더욱 밀집되는 현상을 낳았다.

전쟁의 승리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사르데냐와 이집트를 얻자,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식량과 농산물은 로마 내부의 농업 시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이 되거나, 환금작물(올리브, 포도, 목축)로 돌아섰다. 이런 환금작물들은 많은 초기 투자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확장에 제한이 있어 이전에 밀 농사에 쓰이던 면적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게 되었다.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온 노동력 때문에 기존의 소농들은 대장원에서 임금 노동을 하기도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소농이 토지 경작 면적을 줄이거나, 혹은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버려진 땅에는. 어김없이 모기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도시로 밀려 들어오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로마 인근에 벌채가 극심해졌다. 늘어나는 도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많은 목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숲이 사라지자, 모기는 더욱 늘어났다. 모기가 늘어나자, 말라리아도 늘어났다. 이런 상황은 특정 국가의 팽창과 전쟁, 불안정이 반복될 때마다 유럽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대항해시대와 말라리아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함께 말라리아에도 새 시대가 열렸다. 유럽과 아시아를 비롯한 구대륙에 묶여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확장된 탓이다.

낡은 지도

초기 진입한 유럽인들을 타고 도착한 천연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천연두로 사망한 원주민 수는 추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존의 대도시와 문명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유럽인들은 토지로서의 식민지는 확보했으나, 노동력과 시장으로서의 식민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본격적으로 서아프리카의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에 끌어다 쓰는 노예무역이 시작되었다. 서아프리카에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말라리아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말라리아는 없었더라도 아메리카에 말라리아를 옮길 수 있는 모기들은 충분했다는 점이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처럼 대량의 물을 끌어다 쓰며, 열악한 환경에서 대규모의 노동력을 끌어다 쓰는 환경이 지속하면서 말라리아, 그리고 다른 각종 전염성 질환이 전파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 로마나 사르데냐에서도 그랬지만 노예를 통해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말라리아도 발달했다. 이후 수백 년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말라리아는 남부 아메리카의 주요 전염병이다.

1930년대 브라질 사례

이 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브라질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토지 배분 문제와 가뭄, 말라리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930년대 북동부 브라질의 생태와 경제는 당시 남아메리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토지 소유권은 일부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소작농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태였다. 이런 대장원들은 17세기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북동부 브라질의 농지들은 세 곳의 특정한 환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첫째, 해안가의 비옥한 평야에는 사탕수수 농장들이 자리했다. 여기서는 사탕수수 농장 근처에 머물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신 약간의 땅을 임대받아 먹을거리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노동력이 집중되는 12~2월 수확철이 되면 엄청난 수의 이주 노동자들이 이동해 왔다. 수확철 노동력의 80%가량은 계절성 이주노동자였다.

해안가 서부로는 습한 해안가와 건조한 내륙의 중간쯤 되는 환경이 놓여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고, 부족한 소득을 채우기 위해 계절성 이주 노동을 제공했다.

셋째, 북동부 지역은 매우 건조한 지역으로 세라도라고 불렸다. 이 지역이 바로 1938~1939년 사이 말라리아 대유행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수인성 전염병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말라리아는 더 습한 지역인 해안 저지대에서 일어났어야 한다. 하지만 브라질의 사례는 달랐다. 이유는 이주노동 때문이었다.

세라도 지역 주민 대부분은 목축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세라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깊은 계곡 지역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우기가 되면 계곡은 시시때때로 범람했는데, 범람한 지역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남았다. 여기서 옥수수나 먹을거리 농사를 짓곤 했다.

동시에 강이 휩쓸고 간 땅에는 웅덩이들이 남아 감비아 모기에 아늑한 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이 지역도 예외 없이 소수의 대지주가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소작농들은 한 해 치 종자와 토지 사용료를 지주에게 빚졌다가, 수확철에 수확물로 갚아야 했다. 작황이 괜찮을 때는 나쁘지 않았지만, 수확량이 줄어들면 고스란히 덫이 되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여성과 아이들

이처럼 취약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소농들은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1930년대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이 불러온 농산물 가격 폭락은 소농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가격 경쟁력을 맞추기 위해 지주들은 소작농에게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기를 강요했고, 결과적으로 소작농들이 자신의 농지에 쓸 노동력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소득이 줄어들자 해안지대로 나아가 계절성 이주노동자로 소득을 메꿔야 했다. 최악의 상황은 1930년대 후반 가뭄이 닥치면서였다. 가뭄이 닥쳐 소득뿐 아니라 먹거리가 사라지자 수천 수만 명의 세라도 주민들이 세라도로 몰려들었다. 한해는 어떻게 지냈지만, 이들이 돌아오며 가져온 것은 먹거리와 소득만이 아니었다.

저지대에서 유행하던 말라리아도 함께 밀려들었다. 세라도에서의 말라리아 대유행은 항상 가뭄 이듬해에 일어났다. 1938년 2년간 이어진 가뭄이 끝나고 사람들이 세라도로 돌아오자, 1938~1939년에는 말라리아 대유행이 닥쳐왔다.

1900년대 인도 펀자브 사례

농업 환경, 특히 농업이 산업의 측면에서 농민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08년 인도 펀자브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1908년 펀자브의 말라리아 대유행은 최악의 말라리아 유행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10월과 11월 사이에만 300,000명이 사망했고, 그 해에만 백만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펀자브 지역의 농업

이유는 묘했다. 실제로 농업 환경을 개선하고 지표수를 효과적으로 분배시켜 말라리아 유행을 줄여줄 것으로 기대했던 관개시설이 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펀자브 지역은 짧은 우기와 긴 건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근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수 세기 전부터 이 지역의 지배자들이 관개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치적 불안정에 놓이면서 관개시설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는데, 영국의 식민지가 되며 영국이 이를 다시 복구하게 된다. 여기서 지역적인 불평등이 드러나는데, 누가 해당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정책에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북부와 중부 펀자브는 관개시설의 개선이 주로 인구를 늘리고 산출량을 늘리는 등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남부 펀자브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관개시설의 확충이 수익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개시설을 사용하는데 있어 물값을 매겼다. 게다가 물값은 작황이나 수익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토지 소유 비율에 따라 매겨졌다. 작황이나 작물의 시장 가격과 아무런 상관 없이 물값이 매겨졌기 때문에 소농들은 상당한 고정비 상승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관개시설 확충에 인한 물값을 부담하기 위해 소농들은 먹고살 수 있는 자급형 농업이 아니라 환금작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환금작물로 전환하면 그만큼 기근에 취약해진다. 가격이 요동치거나 작황이 좋지 않아도 옥수수, 밀, 벼 등 자급형 농업은 ‘먹을 것’이 남는다. 그에 반해 목화나 담배 같은 환금작물은 ‘먹을 수 없다’.

결국 환금작물이 단기간의 수익은 올려줄 수 있더라도 다양한 외부적 위험 요인, 특히 기근에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또한, 정부에서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지나치게 촘촘하게 깔아둔 수로는 농지에 지나치게 많은 수분을 공급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모기가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지만, 모기가 늘자 말라리아가 늘었다. 펀자브 지역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곡물 가격과 말라리아 사이에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곡물 가격이 오르면 말라리아도 따라서 늘어났다. 즉 기근과 영양부족이 말라리아의 영향을 증폭시킨 것이다.

질병의 역사가 주는 교훈

더 많은 사례가 있지만, 핵심은 항상 똑같다. 주인공들은 취약한 경제기반의 소농들, 그리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일부 대지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항상 배경이 되어주는 말라리아와 모기가 있다. 요동치는 세계 곡물 시장과 가격도 빼놓을 수 없다. 계절성 이주 노동과 취약하고 유연한 노동시장도 주연 같은 조연이다. 더불어 가뭄이나 전쟁, 정치 불안정, 사회 내 갈등 같은 급격한 환경 변화들은 감칠맛 나는 조연들이다. 이들이 한데 엮이면 말라리아,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염성 질환의 증가로 이어졌다.

가난한 아이

질병의 역사는 우리에게 항상 비슷한 교훈을 안겨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점, 그리고 경제·사회적 불평등이 극대화되는 환경에서 질병은 언제든지 돌아온다는 점.

사람들이 정당한 만큼의 토지를 소유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으며, 재난 상황이 닥치더라도 생존과 재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가. 또한, 급격한 환경 변화와 경제적 위축에도 가족을 해체하고 이주 노동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가. 언제나 똑같은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기분이지만, 인간과 질병의 역사가 그래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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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게 관심과 사랑을 외치며 기생충 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기생충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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