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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퇴사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퇴사한 이유에 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볼 기회였다. 그덕에 당분간 생활고에 시달리더라도 정신승리할 수 있을 듯하다(ㅎㅎ). 이는 정신승리를 이어가고자 재정리하는 나의 퇴사’썰’이다.

나의 퇴사를 놀랍게 생각하는 분들을 목격했다. 아마 내가 이 직업에, 어쩌면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것에 굉장히 만족을 느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취직 전 내 꿈은 ‘글 써서 돈 버는 사람’이었다. 글을 썼고, 그걸로 돈을 벌었으니 나는 꿈을 이룬 것 (적어도 이뤄가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이게 ‘이창민 기자’라는 만들어낸 자아를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출처: Erich Stüssi, BY SA) https://flic.kr/p/Cvsam
취직 전 내 꿈은 ‘글 써서 돈 버는 사람’이었다. (출처: Erich Stüssi, BY SA)

학창시절 난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는 폐쇄적인 아이였다. 나는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당시 몇 안되는 친구는 내가 꼭 상자 속에 갇혀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게 서툴고 어려워 상자 속에 숨어버린 아이. 그래도 그 작은 상자 속에서 꽤나 섬세하게 내 마음을 관찰했던 기억이다.

글은 작가와 독자가 나누는 세상에 관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난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했는데… 그럼 이 꿈은 이룰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나를 극복해야 했다. 타고난 나를 벗어나지 않으면, 되고 싶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나를 꾸며냈다. 원래의 이창민과 다른 훌륭한 성품과 자질을 가진 새로운 자아를 만든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나’는 수많은 나로 구성된다는 걸 알았다. 장소, 상황, 대하는 사람에 따라 나라는 모습은 꽤 달라진다는 걸. 여러분도 똑같다. 우리의 하루는 무수히 많은 나를 직면하는 순간으로 채워진다. 난 이렇게 꾸며낸 자아를 필요할 때마다 꺼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꾸며낸 자아를 꺼내썼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꾸며낸 자아를 꺼냈다.

취직 후 대부분을 이창민 기자의 자아로 살았다. 이 자아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라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밝고 유쾌해서 사람들과 늘 잘 어울리며, 소탈하고 긍정적이라 놀리거나 무시해도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 이창민 기자라는 이상적인 자아가 가능한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은 이상, 목표, 꿈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곤 한다.

이창민 기자는 일도 잘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행동 원리를 슬쩍 공개한다. 이것만 알면 여러분도 이창민 만큼은 할 수 있을 거다. 아무튼 이창민 기자는 어떤 행동이든 ‘이창민 기자의 업무에 도움이 되는가?’를 먼저 떠올렸다. 만일 도움이 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로 생각을 확장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습관은 ‘사람 이창민’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억지로라도 해낼 내적 이유를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보자. 난 일주일 간 최선을 다했고 심신이 지쳐있다. 퇴근 후 금요일 저녁을 집에서 맛있는 제육볶음을 만들어 먹고 싶다. 편의점에서 네 캔 만 원에 산 블랑 캔맨주 하나를 따서 꼴깍꼴깍 같이 먹으면 아주 여기 이곳이 천국일 것 같다. 그러다 오후 4시쯤 동료 A의 저녁 미팅이 잡힌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내 업무와 연관 있는 사람과의 미팅이다. 동료 A는 내가 같이 가주면 좋겠다며 제안한다.

'인간 이창민'의 행복 방정식 = 퇴근 + 한가롭게 + 블랑 한잔!
‘인간 이창민’의 행복 방정식 = 퇴근 + 한가롭게 + 손수 만든 제육볶음 + 블랑 한잔!

이창민 기자는 이때 ‘업무에 도움이 되는가?’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의 로직에 따라 상황을 판단한다. ‘만나두면 앞으로 내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고, 단지 이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인맥이 되니 분명 도움이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결국, 맛있는 제육볶음과 (정말 맛있거든) 블랑 캔맥주를 뒤로 하고 저녁 미팅을 따라 나선다.

위 예시와 같은 상황이 하루에도 수없이 있었다. 나의 하루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행동을 결국 해내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점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 ‘이창민 기자’를 위해 스스로 ‘인간 이창민’을 옥죄었다.

어쩌면 이창민 기자로서의 모습이 진짜 나라고 믿어온 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믿으면 정말 그게 진짜 나의 모습이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어도 이창민 기자에게 ‘불필요’하다면 하지 않았고, 정말 하기 싫어도 이창민 기자에게 유익하다면 기꺼이 해냈다.

이런 모습은 의외로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런 유형 있잖아. 매일 한 시간을 일찍 출근하고, 30분씩 늦게 퇴근하는 신입사원들. 이들은 해야 할 일이 없어도 정시에 맞춰 퇴근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그 누구도 더 일찍 출근하길, 더 늦게 퇴근하길 강요하지 않아도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회식도 빠지면 말자. 주는 술은 기쁘게 받아 먹자. 복장은 단정히. 반바지는 입지 않아. 되돌아보면, 이런 행동은 자신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직장이라는 공간과 신입사원이라는 신분에 맞춰 만들어낸 또 다른 모습이다.

'이창민 기자'는 나를 점점 더 지치게 했다.
‘이창민 기자’는 나를 점점 더 지치게 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현실 탓이 가장 크다. 이제 막 겪기 시작하는 직장을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만들고, 스스로 이를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 같은 존재로 만들게 되는 거. 이런 세상에서 신입사원의 꽃길은 참고 견뎌야 할 지옥길이 되는 건 아닐까. 딱 내가 그랬다. 신입일 때 나는 늘 일찍 출근했고 매번 새로운 일에 도전했고 마감 때가 되면 할 일이 딱히 없어도 주말에 출근하곤 했다. 당시 난 이창민 기자가 주인공이 된 서사에 흠뻑 취해 있던 것 같다.

가끔씩 마음에 탈진이 왔다.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오래 전 열고 나온 상자를 찾게 됐다. 퇴근 후 혹은 주말마다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고 가만히 멍을 때렸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최선을 다해 칩거하며 마음을 치유했다. 그래도 주말 뿐이면 상관 없지. 퇴근 후에 쉬면 괜찮아지겠지.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버티고 매일을 살아냈다. 좀처럼 나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기간은 점점 잦아졌고 박차고 일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급기야는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너무 행복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퇴사를 결심했다. 계속 회사에 다녀서는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나를 방치할 수 없었다. 물론 겁났다. 퇴사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경력 단절로 나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건 아닌지, 남은 할부는 대체 어떻게 갚을 것인지(솔직히 이게 제일 큼. ㅠㅠ)… 난생 처음 사주도 봤다. 결심부터 퇴사까지 반 년이 걸렸다. 이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사람 인간 여자 소녀 걸 시계 시간

지난 9월 29일 기준으로 퇴사 처리됐다. 이창민 기자를 벗어나 온전한 나로서 살아보기. 억지로 뉴스를 챙겨보던 습관부터 없앴다. 기자는 늘 빠르게 트렌드를 파악할 필요가 있기도 했지만, 사실 이는 최신 이슈에 대한 이창민 기자로서의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싶어 만든 습관이다. 쉽게 말해 똑똑해보이고 싶었다, 진심으로. 주변에 너무 대단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있어서 자격지심에 그랬던 것도 같다.

의무적으로 하던 페이스북도 줄였다. 페이스북은 나에게 업무 공간. 외부 사람들에게 이창민 기자라는 꾸며낸 자아를 전시하기 딱 좋은 수단이었다. 현실에서의 관계보다 페이스북 속 관계에 더 열중했을 정도다. 페북에서 뭐 하나 터트려야 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매일 같이 했고, 매일 같이 실패했다. 그만둔 뒤로 페이스북은 하루에 10분도 접속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만나기는 힘들고 어떻게 사는지는 궁금한 사람들 둘러보는 정도의 소소한 삶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페이스북 그 자체에 가지고 있었던 큰 부담도 많이 내려놓게 됐다.

최근 난 인생 중 가장 평온한 시간을 살고 있다. 이창민 기자일 때는 늘 일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현실에 과도하게 몰입해 있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과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창민 기자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렇게나 과도한 부담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걱정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과거 미화 주의: 대충 아, 저렇게 힘들었군! 정도로만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외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도 많다.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듣는다. 약속이 줄어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연락하는 사람은 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집에 손님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해줄 때의 쾌감을 난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됐다. 엄마 마음. 심지어 내 요리 꽤 맛있다(ㅇㄱㄹㅇ[footnote]ㅇㄱㄹㅇ=이거레알=이거 리얼=이거 사실입니다. [/footnote]).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하고 싶다.

꿈을 위한 노력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권장되는 삶의 태도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꿈을 가져라!!! 드림스 컴 트루!!

YouTube 동영상

나도 그랬다. 난 내가 가진 꿈과 그를 위해 노력한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들은 나를 꽤 멋진 사람으로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꿈이란 뚜렷한 직업관과 매우 교집합이다.) 그러니 난 내 삶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맞다고 입을 모아 말하니 의심을 품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내 꿈은 진짜 나의 것일까. 어쩌면 꿈은 없어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지금 내가 이렇게 행복한 이유는 스스로 내 삶을 조율하며 정말 하고 싶은 일과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꿈보다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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