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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다 보니 대학원 석박사팀의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과 가깝게 지낸다. 남학생 수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여학생들과 방중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가까워진 덕분이다. 물론 그것이 나의 빌어먹을 인기(?) 때문이라면 나도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석박사 여선생들의 성품이 좋은 덕이다. 그런 덕분이겠으나, 이분들이 장비 수염이 숭숭 난 나를 종종 ‘성원댁’이라 부른다는 점이 나로선 재미있는 경험이다.

2.

어제 퇴근한 뒤 편한 복장으로 아파트 앞마당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내 바로 앞에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엄마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곧 문이 스르르 닫혔다가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아이 엄마가 말없이 ‘어서 타세요’란 몸짓을 보냈다. 속으로 ‘한발 늦었네’ 생각했지만, 담배를 태운 직후라 아기랑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미안해서 ‘걸어가던지 다음에 가지’ 하던 차였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엘리베이터

언젠가부터 나는 여성들에게 비추는 내 모습이 결코 편하지도, 안심할 수 있는 상대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이 있으므로 되도록, 상대가 아이든 할머니든 관계없이 밤늦게 담배를 태우러 앞마당에 나왔을 때나 엘리베이터에 둘 만 타는 일을 피하게 되고, 다른 여성에게 두려움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비추지 않도록 주의해왔다. 상대가 갑자기 잰걸음을 걷는다면 걸음을 멈추고, 맞은 편 사람이 날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인다면 일부러 멀리 돌아간다거나…

3.

나는 청소년기를 ‘남성우월론자’까지는 아니어도 ‘여혐’에 가깝게 지냈다(내가 남성우월론자가 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당시 내가 ‘여혐’이기보다는 ‘인간혐오자’에 가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청소년기의 ‘여혐’ 경향에 대해 변명하자면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 경험과 무관치 않다. 일단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이 ‘특전사령부’ 인근이라 울산처럼 남성 노동자(직업군인)의 세계를 가까이 보며 지냈고, 거기에 더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날 버렸다는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것을 극복했는지에 대해 나는 늘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 내가 ‘성원댁’이라니… 나의 중학교, 고교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준 특별한 이들을 돌아보면 대개 여성이었다. 나는 그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Romuald Bokej, CC BY SA
Romuald Bokej, CC BY SA

4.

어린 시절 남들보다 작고, 마른, 힘없고, 부모도 없는 남자아이의 세계란 어떤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세계다(여자아이의 세계라고 얼마나 다를까 싶다).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입구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피의자는 목사를 꿈꾸던 신학대생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뉴스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나의 인식에 최초의 균열을 일으킨 가장 큰 사건은 1986년 5월의 어느 날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강남구청역 사거리 횡단보도(당시 영동백화점 앞)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가톨릭학생회는 혜화동에 본부가 있는 전국 연합동아리였고, 우리 학교는 인근의 정신, 세화여고, 중동고와 같은 셀(단위)에 속해 있었다.

그날은 같은 단위에 속한 학교 학생들과 함께 단합대회 행사를 선릉에서 열기로 했다. 나는 1학년이었기에 선배들을 따라 절반쯤 설레고, 절반쯤 시니컬한 마음을 품고 그 자리에 나갔다. 영동백화점 사거리에서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선릉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나 역시 앞서 친구들과 함께 까불거리며 신나게 걸었을 것이다. 물론 어쩌면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혼자 앞서서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 남자가 내 앞을 휙 지나갔다.

인권의 항목에는 존재와 관련한 '학대 가능성' 높은 것들이 올라야 한다. * 위 사진은 연출된 것입니다. (사진: Lin Pernille Photography, CC BY, * 위 사진은 연출된 것입니다.)
* 이 사진은 연출된 것으로 본문과 무관합니다. (출처: Lin Pernille Photography, CC BY)

그리고 잠시 뒤 여성의 비명이 들려 돌아보니 세화여고 2학년 선배가 얼굴에 피를 철철 흘리며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내 앞을 휙 지나간 남자가 그 선배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 XX 잡아!”라고 외쳤고, 중동고 아이들과 우리 학교 아이들이 달아나는 남자를 뒤쫓았다. 십 대의 뜀박질을 견딜 수 없었던지 그는 결국 골목길에서 붙잡혔다.

마치 십 대 불량청소년들이 20~30대 청년 한 명을 놓고 ‘집단 다구리’라도 놓는 모양새였지만, 그는 한 여학생을 강남역 네거리 횡단보도에서 주먹으로 때린 현행범이었다. 씩씩대며 한 남자를 십여 명 정도 되는 남자 고교생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우리는 그 날 피를 봤다. 나는 1학년생이었기 때문에 2학년 선배들 옆에 서 있었다. 잡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Steven Depolo, CC BY https://flic.kr/p/6Z3LfZ
Steven Depolo, CC BY

선배들은 결국 그 사람을 놔줬다. 그 장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었기에 더욱 분노에 차서 왜 그를 놓아주는지 따졌다. 선배가 뭔가 길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지금 기억나는 말은 딱 두 마디다. “눈이 풀렸어, 미친놈 같아.”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동아리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1980년대였다.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교생이라도 서로 모여서, 그것도 학교 단위로 모여서 무엇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모이는 일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무렵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좀 더 영리했더라면 목격자 행세를 하며 서로 모른 체하고 그를 경찰에 넘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선배를 돌보고 있던 다른 여학교 선배들이 와서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남학생들을 달래는 바람에 일이 그 정도에서 끝났다. 여전히 뭔가 분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그런데 도대체 왜 때렸데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선배가 말했다.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게 싫었단다.”

그날의 기억은 과거에도 그리고 어린 딸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까지도 평생 잊지 못할 나의 두려움이다.

JD Hancock, Big Fear, CC BY https://flic.kr/p/85Mum2
JD Hancock, “Big Fear”, CC BY

5.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 마 살인사건’이라 부르는 것은 최소한 나의 체험으로는 정당하지 않다. 그 남자는 내 바로 앞을 지나갔지만, 날 때리진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순간을 수없이 곱씹고 복기해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 선배가 여자라서 맞은 것이다.’

과연 그 선배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아무리 눈이 풀린 사내라도 강남 네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비록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계획되고 조직된 폭력사건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약자와 소수자, 특히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일반이 느끼는 폭력의 체감은 이 사건이 단지 일회적이고 우발적인 폭력살해사건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폭력이 되도록 한다.

Applied Nomadology, CC BY https://flic.kr/p/7nFjnQ
Applied Nomadology, CC BY

이것을 사회 구조적 폭력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단지 자주 빚어지고 있다는 빈도수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알려져 있다.

  1. 첫째는 사회적 허가의 과정
  2. 둘째는 폭력의 일상화
  3. 셋째는 희생자에 대한 비인간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라는 민주 공화정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이후 승자의,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국가로 변모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국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국민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고, 국민의 요건을 기득권세력의 입맛에 맞추어 배제하고 또 배제시키면서 피해자와 희생자를 국가와 무관한 개인의 희생으로 일상화해왔다.

크게는 국가권력에 의한 희생자인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작게는 기업 권력에 의한 용산참사, 쌍차 사태를 비롯해 우리 사회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footnote]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도심에 가까운 낙후 지역에 고급 상업 및 주거지역이 새로 형성되는 것[/footnote]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강력하게 발신한다. 때로 국가권력 스스로가 앞장서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단체와 개인의 행위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비호하면서도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대상에 대해선 법의 외피를 쓰거나 법을 교묘하게 사유화하여 잔혹할 정도의 조롱과 괴롭힘을 반복해왔다.

guy masavi, CC BY SA https://flic.kr/p/pckUnm
guy masavi, CC BY SA

그런 과정에서 희생자에 대한 비인간화 역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홍어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어묵에 비유하는 잔인한 비인간화는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대상으로 마음대로 농락해도 괜찮다는 묵인 아래 벌어지는 일상의 잔혹극이 반복된 결과이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의 가해자가 진짜 정신질환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추모장소에 ‘여성혐오’의 문구를 가져다 붙이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몇몇 개인의 일탈적 병리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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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국민성의 파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잔인함과 천박함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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