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때아닌 유모차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유튜브 채널 핑계고에서 박보영과 유재석이 유모차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막에는 ‘유모차’를 ‘유아차’로 고쳐서 나갔다. 이를 두고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 ‘페미의 검열’이라며 댓글 테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게 논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역사가 깊고 갈등의 골이 깊은 논쟁이다.

유모차는 일본어 ‘우바구루마(乳母車, 유모차)’에서 유래한 말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유모’는 ‘유아와 어머니’가 아니라’‘어머니 대신 젖을 먹여 주는 여자’라는 뜻의 ‘유모’다. 유모를 대신하는 차라고 해서 ‘유모차’로 불렀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아이와 어머니’의 차가 아니라 ‘유모’의 차였다.


최혜영 민주당 의원 등은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 “생활 속 성평등 의식을 높이고 평등육아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부합하기 위하여 성차별 용어인 ‘유모차’를 ‘유아차’로 개정하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유모차’와 ‘유아차’가 모두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두 표현 모두 표준어로 볼 수는 있겠다”고정리한 바 있다. “다만 ‘유모차’를 ‘유아차’나 ‘아기차’로 순화한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 되도록 ‘유아차’나 ‘아기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권장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사회 관습이나 인식이 달라진 현대에 이르러 순화해 써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실제로 유모차가 기원한 일본에서도 고연령층을 제외하면 더 이상 유모차란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유아차나 베이비카로 부른다. 야후 재팬에서 ‘유모차’를 검색해 보면 검색 결과가 469만 건, ‘유아차’를 검색하면 4280만 건이 나온다. ‘베이비카’도 4270만 건이나 된다.

굳이 ‘유모를 대신하는 차’라는 어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여기에는 아버지 ‘부’는 없고 어머니 ‘모’만 있다. 육아가 어머니의 몫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유모차’는 ‘유부차’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다.

OLYMPUS DIGITAL CAMERA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유아’는 ‘幼兒’인데 ‘유아차’는 ‘乳兒車’라고 쓴다’며, 순화도 제대로 못 했다고 비웃는 반응도 있었다. 똑같이 ‘유아’라고 쓰지만 0~2세의 젖먹이는 ‘乳兒’로, 2~5세의 아이는 ‘幼兒’로 쓰기 때문에 이건 잘못된 비판이다.

차 앞에는 동력원이 들어가는 법이라며, 유아차는 유아가 모는 차라는 거냐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도 온갖 반례가 넘친다.

출연자가 ‘유모차’라고 말했다면 그냥 ‘유모차’로 실어주는 게 맞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이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모차’라는 단어가 위와 같이 유래와 한자풀이에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유아차’로 순화해서 자막에 표기했다고 해서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출연자가 ‘야채’라고 말해도 ‘채소’라고 고쳐서 자막을 다는 것도 오래된 관행이다.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최혜영의원 등 12인).

페미와 PC가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는 음모론.


단순히 이 정도 논쟁이라면 남초 커뮤니티가 이렇게 대동단결해서 댓글 테러나 싫어요 테러를 벌일 이유가 없다. 이 사건은 ‘정치적 올바름(PC)’을 둘러싼 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초 커뮤니티 등 일부에서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조직화해서 사상을 검열하고 교정하려 든다고 여긴다.

멀쩡한 ‘유모차’라는 단어를 ‘유아차’로 수정하려 한다든지, ‘폐경’을 ‘완경’으로, ‘자궁’을 ‘포궁’으로, ‘출산’을 ‘출생’으로 바꾸는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페미’가 언어뿐 아니라 문화를 검열하고 그들 기준의 ‘올바름’에 맞춰 교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세계관에서는 이건 단순히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를 해체하고 여성 중심의 사회로 바꾸려는 음모 같은 것이다. 페미는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상을 손가락 모양이나 ‘PC적 검열’, ‘핑크워싱’ 등을 통해 드러낸다고 본다.

스코다(Škoda Auto)에서 만든 메가맨프램(Mega Man-Pram). 영국의 아이 아빠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33%가 ‘유아차’를 미는 게 부끄럽다고 답변했다. 76%가 “76%가 스타일리쉬한 첨단 기술을 갖춘 유아차가 있다면 직접 밀고 다닐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이 유모차는 신차 광고 캠페인을 위해 만든 것으로 시판하는 제품은 아니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는 굉장히 복잡하다. 사람들은 기승전결이 갖춰진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모든 사안에 어떤 음모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세상을 이해하는 편이 기승전결이 있어 더 받아들이기 좋다는 심리학적 분석도 있었다. 페미들이 대중의 사고를 지배하기 위해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꿔 부르고 있다는 음모론은 꽤 매력적인 이야기가 된다.

‘정치적 올바름(PC)’을 주장하던 진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다소 비합리적인 주장도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오만함이었다. 무리한 언어 순화를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문화가 분명 존재했다. ‘깨어남(Woke)’ 운동 같은 것도 결국 비슷한 전철을 밟았고, 비슷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대중문화 작품들도 그랬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서사에 소수자들을 대충 집어넣는 식으로 만든 ‘계몽적’ 작품들이 꽤 많았다. 오래된 남성 캐릭터의 후광에 성별만 여성으로 바꾸는 식으로 성평등 서사를 만드는, 역시 게으른 발상들이 넘쳤다. 이건 그저 게으른 창작자들의 잘못이겠지만, 이것도 모두 PC나 페미, LGBT가 세상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졌다.

Furious protesters fight on street. Mad man and woman activists with signs or placards argue on demonstration outdoors. Vector illustration.

페미와 PC, LGBT는 악이라는 신념이 너무 공고해지다 보니 이젠 이성적인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페미와 PC, LGBT라는 ‘악의적 세계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전사들’인 것이다.

적대와 게으름, 공론장의 붕괴.


이 세계관에 따르면, 유아차가 유모차보다 올바르고 합리적인 순화안이라는 것도, 페미와 PC가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그럴듯한 궤변’일 뿐이다. 그 논리가 그럴듯하다고 낚여버리면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논의의 여지는 사라지고 적대하고 싸우는 일만 남았다. 이런 식의 세계관 싸움은 비단 남초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논쟁이 다 이런 식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고 특히 외국인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로 흐르는 건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공론장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은데, 딱히 극복할 방법이 안 보인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