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은 옛날 조선시대 때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했다. (위키백과 , ‘사직단’ 참고)
사와 직이시여, 풍년 들게 해주시옵소서.
사와 직이시여, 비가 오게 해주시옵소서.
그땐 그랬다. 이젠 조선이 망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미신은 사라졌으니 사직단의 실용적인 쓸모는 사라졌다. 아니, 실용적으로는 원래부터 쓸모가 없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늘에서 비가 떨어질 리 만무하다. 무슨 선사시대 원시인들인가. 남들은 군함을 띄우고 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면서 전쟁하는 판국에 조선 ‘황제’와 신하들은 20세기 초반까지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런 왕조가 안 망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사직단 그 제단 터는 사진처럼 남아있다. 제사, 즉 사직대제는 1908년(순종)에 끝났고(횟수를 줄였다는 얘기도 있다) 사직단은 사직공원이 됐다. 신문기사나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보면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직대제 폐지 역시 일제 강압 때문이라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사직대제 폐지가 순종의 뜻 혹은 시대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일제 강압 때문이라는 구체적 근거를 대는 문서는 없다.
참고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건 2년 후 1910년이다. 또 당시 조선 국민이 창경궁과 사직단의 공원화를 아쉬워했다는 근거도 없다. 수백 년 동안 한 움큼의 왕족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공간을 시민들에게 개방했으니 시민 대부분은 환영하지 않았을까? 0.0001% 왕족이 아닌 조선 시민들, 우리 조상들 대다수는 그때 근대적 의미의 공원이라는 걸 처음 봤을 것이다.
사직공원은 사직대제 폐지 이후 점차 변했다. 제단 주변에 있던 부속건물들이 점점 없어지고 일제시대 때 매동초등학교 건립(1932년), 그리고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시립 아동병원 개관(1955년), 사직터널(1967년)과 사직로 개통, 종로도서관(1971년) 개관 등이 있었다. 특히 한국 최초의 근대식 도서관인 종로도서관과 역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도서관인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이 여기 있다.
특히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의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시가 시민들과 고아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종로도서관 옥상에서 사직단과 사직공원을 내려다보고 찍었다. 왼쪽에 잔디밭 한가운데 제단같은 것이 있는 데가 사직단이고, 오른쪽에 공터가 사직공원이다. (사진: indizio)
복원: ‘사직단 테마파크’
이렇게 사직단 빼고는 다른 모든 걸 다 헐어버린 다음에 조선시대 있었던 모습(추정)대로 이런저런 주변 부속건물들을 한옥으로 만들겠다는 거다. ‘사직단 테마파크’라 부르면 될 것 같다.
재벌가 사모님이 보시기에는 주말에 “인식이 매우 낮은” “온갖 사람들이” 사직공원에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 마땅치 않으셨나 보다.
내가 그 “온갖 사람들” 중 하나다. 지금이 조선시대 신분사회도 아닌데 공원에 모이는 사람들을 저렇게 비하하는 건 ‘높은 인식’인지 의문이다. 조선이 망한 지 백 년도 넘었는데, 인제 와서 뭘 복원을 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슨 민속촌 영화세트장 만드나. 그걸 다시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고.
기우제라도 다시 지내시려나?
왕조 판타지인가?
사직단 보러 사직공원 가는 사람?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역사 유적으로서 사직단을 보기 위해 가는 사람 있나. 사직단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거기 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냔 말이다. 가봐야 제단만 덜렁 있을 뿐 볼 것도 없다. 유적은 그냥 유적으로 남기면 되지 이걸 다시 크게 확장한다고 해서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기나. 민족정기니 국운이니 하는 미개한 이야기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판치는 걸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민족정기 살린답시고 근대 건축물 헐어내고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를 로마시대 모습으로 복원하나. 그리스 사람들이 국운을 위해 파르테논을 헬레네 시대 모습 상상해서 다시 지어 올리나. 왜 한국 문화재청은 조선 테마파트 만드는 데 이렇게 열심인 걸까. 무슨 대단한 유적이라도 땅 속에 묻혀있다면 모를까. 그냥 한옥 몇 개 더 짓고 나무 심어서 옛날 모습 비슷하게 돌려놓겠다고 도서관들을 허물겠다니.
아예 서울 도성도 다시 다 쌓고 해 저물면 도성 밖 통행금지도 하지그래?
유네스코 유산? 창조경제?
예올 재단 김영명 이사장은 또 사직단을 확장하면 종묘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상상력이 놀랍다. 조선의 메인 궁전인 경복궁도 유네스코 유산에 이름을 못 올리는 판에 사직단 테마파크가 무슨 수로 유네스코 유산 등록이야. 그게 그렇게 쉬우면 웬만한 동네마다 유네스코 유산 하나씩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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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 내 들어선 시설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뒤 사직단을 이 녹지와 연결해 문화·역사·환경 벨트를 조성하는 것이 예올이 꿈꾸는 그림” (김영명 예올 이사장)
김영명 이사장이 ‘꿈꾸는 그림’을 ‘속보’로 보도한 연합뉴스는 이렇게 화답한 바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중략) 하지만 그 일을 추진하는 김 이사장이 다름 아닌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부인이자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이기 때문에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재력가이자 권력자의 부인이 추진하는 사업이라서 기대가 생긴다는 기자의 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편집자)[/box]
요즘 창조경제가 유행인데 ‘유네스코 유산 등록 추진’도 창조경제 아이템 중 하난가? 상상은 자유지만, 그 상상의 대가가 너무 크다.
종로도서관
사직단이 확장되면 허물어지게 될 건물 1번 종로도서관. 가뜩이나 한국은 공공 도서관이 부족한 나라인데, 전국 1호 공공도서관을 없애고 조선시대처럼 제사 터를 넓히겠단다. 미치겠다. 종로도서관에 놓여있는 훌륭한 장서들도 다 사라진다. 왜? 조선시대 세습 왕족들이 제사 지내던 터의 부속건물들을 모방해서 짓기 위해 도서관을 허물어야 한다고 하시니. 누가? 예올과 문화재청이.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분들도 이젠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한다. 왜? 문화재청이 사직단 넓히겠다고 하니까. 이 건물은 헐어버리고. 옥상 휴식공간도 없어진다. 왜? 조선 왕족들이 제사 지내던 터를 다시 꾸며놓기 위해서 이 건물을 없애겠다니까.
“지우 이범승 선생은 3.1 운동 직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 널리 공개하는 공공도서관이었던 구 경성도서관을 종로 2가 파고다 공원 옆에 창설하시었다. 경성도서관은 도서 열람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고 아울러 동화회, 음악회, 영화감상회 등을 개최하여 당시에는 유일한 문화센터로서 초창지를 빛내었었다. 이제 그 후신인 종로도서관을 서울시가 이곳에 옮겨 크게 지음에 따라 선생의 동상을 함께 모시고 그 선구적 업적을 길이 추념하고자 하는 바이다.
– 1971년 9월 17일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하점생, 제작 김영중, 글씨 장인식”
비석에 쓰여있는 글이다. 이런 유래를 가진 도서관을 없앤단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사진)도 사직단을 “신성한 공간”,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민족의 얼”이라고 말한다.
나선화 문화재청장: (전략) 대표적인 것이 일제시대에 훼손된 ‘사직단’의 복원입니다. 원래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지만 사직공원 조성과 도로 개설, 도서관 건립 등으로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민족의 얼을 되찾고 잃어버렸던 정신문화를 되찾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거든요.
종로도서관 옆에는 서울서립어린이도서관이 있다. 이 건물도 역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원래 이곳은 시립 아동병원이었다. 일제시대부터 구세군 구호소 등이 있던 자리였는데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건물이 만들어졌다.
1967년 독일 대통령 부인이 어린이 병원을 찾았던 걸 보도한 기사
문화재청은 어린이도서관도 없애겠다는 거다. 왜? 조선시대 왕족들이 비 오라고 제사지던 터를 다시 닦는 게 어린이 도서관보다, 아동병원의 역사보다도 중요하다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에는 조선시대만 역사고 대한민국은 역사가 아니다.
사직공원 운동장
마찬가지로 사라질 운명에 놓인 사직공원 운동장은 소박한 동네 쉼터다.
사직공원 운동장
게이트볼이나 족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무 그늘 아래서 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다. 여름이면 밤 늦은 시간에도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 주변에 이렇게 평지에 있는 탁 트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운동장을 없애고 사직단 테마파크를 만들면? 아마도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여는 엄숙한, 즉 주민들에겐 불편한 공간이 될 거다.
예올과 문화재청에 고함
사직공원을 없애고 종로도서관을 없애고 어린이도서관을 없애서 ‘사직단’ 제사 터를 만들려는 사람들아! 솔직히 당신들과 우리 조상 대부분은 조선시대 사직단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쌍놈(상민)들이야. 인구 10% 양반 아니면 사람대접도 못 받고, 귀족한테 찍히면 재판도 없이 모가지가 날아가던 시절이라고. 조선 왕족 몰락한 거 너희가, 우리가 걱정해줄 필요가 없어!
사직단을 확장하면 민족정기니 국운이니 살아난다고들 하는데, 그래 사직단 덕분에 민족정기가 왕창 살아서 조선시대 500년 동안 한반도에 좋은 일 많았니? 사직단 덕분에 국운이 좋아서 일본에 통째로 나라를 뺏겼니? 역사 유적은 남아있는 대로 잘 보존하면 됐지, 100년 전에 사라지고 없는 부속건물들을 이제 와서 왜 다시 짓겠다면서 종로구에 안 그래도 부족한 도서관을 헐어? 도서관도 근대문화유산이야. 왕족의 제사 터 따위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왕족과 신분사회를 증오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 과격하게 들린다면, 좀 더 점잖은 로버트 파우저의 의견을 소개한다.
“사직단의 역사적 가치 및 그 회복을 존중하면서 20세기 서울의 역사, 나아가 ‘가까운 과거’의 추억이 담긴 공공시설을 애용하는 시민의 요구도 존중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가장 적합한 답은 2027년까지 제례 공간의 복원으로 매듭을 짓고 공공시설은 그대로 두어 사직단의 역사적 서사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슬로우뉴스는 이 글을 발행하기에 앞서 문화재청 담당자를 취재하고, 이 사안을 직접 취재한 경향신문 임아영 기자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물론 필자와도 협의했습니다. 그 결과를 요약합니다.
1. 문화재청 담당자와 직접 통화(2015년 6월 19일)한 결과, 문화재청은 ‘도서관 철거’와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2015년 1월에 발표한 계획에도 애초에 ‘도서관 철거’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2027년 이후로 유예된 것으로 봐야 할지 도서관 철거를 하지 않겠다고 확정한 것으로 봐야 할지 해석상 논란이 있었습니다.
2. 아래는 2015년 1월 문화재청 계획 자료 공개 이후 이 사안을 직접 취재한 임아영 경향신문 기자의 기사입니다.
이는 이 사안을 직접 취재한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유일한) 기사입니다. 다만 이 기사는 사실상 “철거 안 한다”는 문화재청 담당자의 전화 확약을 보도한 것이지 대외적으로 문화재청이 공표한 “공식 입장”을 확인해 보도한 것은 아닙니다. 기사로서는 훌륭한 사실 취재 기사지만, 문화재청의 공식 입장을 확인해주는 보도는 아닌 셈입니다.
3. 그렇다면 도서관은 철거하는 것일까요? 철거하지 않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당분간은 철거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것은 공식적인 확인이 아니라 여전히 사실 진술로서 국가기관 해당 사업 담당 부서(궁능문화재과)의 답변에 근거한 것입니다. 슬로우뉴스는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에 다음과 같이 문의했습니다.
– 도서관 철거 하는 건가?
도서관 철거하지 않는다.
– 왜 도서관 철거가 논란이 됐다고 보나.
2015년 1월 보도자료를 통해 핵심 사업을 알렸을 때부터 도서관은 복원사업(의 일부로서 철거공사)에는 빠져 있었다. 일부 시민들께서 계속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다.
–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공식논평이나 보도자료를 낼 계획은 없나?
1월 핵심사업 발표 때부터 빠져 있었던 것이라서 따로 공식논평이나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논란을 종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은 문화재청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이 간단한 해결책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4. 문화재청이 ‘도서관 철거는 없다’고 답변하지만, 2015년 1월 발표한 복원사업에 관한 보도자료를 보면 1구역(핵심 구역)을 우선 진행하고 2구역(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은 협의를 거쳐 사업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경향신문 보도를 ‘사실상’ 인정하지만, 이에 관한 공식 논평을 내지 않겠다는 문화재청의 말은 기존 입장에서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주민 반발이 가시적으로 나오고 언론에도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니 도서관을 당장 철거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줄어들었다는 게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도자료에서 보듯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이 “장기 사업영역(2영역)”에 계속 포함되어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도서관 자리가 장기 사업영역 지정이 해지되지 않는 이상 향후 사업 추진 가능성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봐야 합니다.
추. 경향신문 보도가 의미 있는 것은 문화재청을 직접 취재해 담당자의 발언을 끌어냄으로써 시민들에게 ‘도서관 철거 안 한다’라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아영 기자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필자께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