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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2015년 10월 초·중순)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운동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 시작은 첫 번째 민주당 토론회였다. 녹슬지 않은 토론 실력을 과시한 데다가, 샌더스까지 나서서 피곤한 이메일 서버 문제를 잠재우는 걸 도와줬다. 그리고 토론회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게 조 바이든 부통령이 대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최종선언했다.

바이든의 경선참여는 ‘힐러리가 샌더스에게 밀릴 경우’를 가정한 카드였기 때문에, 바이든이 뛰어든다면 힐러리에게 또 다른 적수가 하나 생긴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힐러리 캠페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이든의 불참 선언은 ‘힐러리 캠페인은 순항 중’이라는 승인이나 다름없다.

순항 중 암초 – 벵가지 사건 청문회 

순항하던 힐러리호에 벵가지 사건 청문회라는 암초가 가로막았다.

힐러리는 주지하다시피 전 국무장관(외교부장관)이다. 벵가지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2012)은 힐러리가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미국 대사를 비롯한 4명의 미국인이 사망한 사건이다. 경선 기간에 자신의 재임 시절 사건으로 의회 청문회에 끌려 나온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리비아 벵가지 미 대사관이 습격당한 모습 (구글 검색)
리비아 벵가지 미 대사관이 습격당한 모습 (구글 이미지 검색 모습)

세계 최강대국 대사가 경비를 뚫고 들어온 극렬 시위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모든 미국인에게, 특히 미국의 보수 세력에게는,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더욱이 외교관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접적인 수장 역할은 국무장관이 하는 일이다. 민주당 대표주자 힐러리를 잡을 수 있는 카드라면 무엇이든 사용할 공화당이 이런 이슈를 그냥 넘어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어야 진정한 선수다. 그리고 이번 청문회는 힐러리가 선수라는 걸 보여주었다. 힐러리에게는 방가지 청문회는 화룡점정이었다. 한 번 복기를 해보자.

자중지란 지리멸렬 공화당 

미국 대선 트레이 가우디 “벵가지 조사 위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제발 입 좀 닥치고 있어(shut up). 쥐뿔도 모르면서 떠들고 다니지 말고!(they don’t have any idea what they’re talking about).”

하원의 벵가지 조사위원회를 이끄는 트레이 가우디(Trey Gowdy, 1964~현재, 사진)가 참다못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청문회를 준비하는 사람이 청문회 전에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힐러리를 잡자’는 기치 아래 일치단결하는 게 아니라, 되지도 않은 밥에 너도나도 숟가락부터 얹는 모양새였다. 어쩌면 요즘 공화당의 ‘진면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가장 큰 사고는 다수당(공화당) 원내대표에 해당하는 케빈 매카시의 발언이었다(지난 글 참조).

“(힐러리가 대선에서 잘 나간다고 걱정했지만,) 우리가 벵가지 위원회 구성하니까 지지율 떨어지는 거 봐.”

순전히 클린턴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려는 정치적 이유로 “공화당이 어떤 규칙도, 기한도, 제한도 없는 예산을 투입해 벵가지 사건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엘리야 커밍스, 특위 간사, 민주당)는 민주당 주장을 그대로 확인한 발언이었다. 복잡한 워싱턴 정치에서 이런 1차 방정식 수준의 발언은 용납이 안 된다.

공석이 되는 하원의장 자리를 노리던 매카시는 그 말 한마디로 꿈을 접어야 했고, 조사위원회를 맡은 가우디의 분노도 폭발했다(여담이지만, 사람들은 가우디가 해리포터의 드레이코 말포이를 닮았다고들 한다).

공화당의 상징 코끼리와 민주당의 상징 당나귀 (출처: DonkeyHotey, Republican Elephant & Democratic Donkey 2016, CC BY SA) https://flic.kr/p/rfqjvv
DonkeyHotey, “Republican Elephant & Democratic Donkey 2016”, CC BY SA

그럼 조사위원회는 힐러리 공격준비를 잘했느냐면 그렇지도 못했다. 날카로운 질문들은 나왔으나,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것들이라서 힐러리의 반박으로 효력이 떨어졌고, 위원회에 있는 민주당 의원들의 지원사격으로 희석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의원들 사이에 중구난방의 질문과 반박이 오가는 꼴을 보면서 힐러리가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장면이 여러 차례 잡히면서 이번 청문회에서 힐러리는 허접스럽게 준비한 소총 공격에 끄떡하지 않고 전진하는 전함을 보는 느낌이었다.

청문회에 임하는 힐러리를 묘사하면서 언론이 사용한 단어만 봐도 그렇다. “위엄있고 당당(stately)”했다거나 “대통령답게 보였다(She looked presidential)”는 말은 폭스(Fox)같은 보수언론에서도 나왔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진짜 선수’  

정말로 그랬다.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잘하는 게 뭔지를 알고 싶다면 아래에 아래 비디오를 보라. 가벼운 한담(small talk)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힐러리가 가장 잘하는 건 송곳 같은 논리로 현재 상황의 프레임을 바꿔놓는 존재감 넘치는 연설이다.

https://youtu.be/hgV8k_IFpS0

청문회에서 본격적인 질문을 받기 전에 청문회에 나온 사람에게 주어진 15분의 모두발언인데, 소름 돋도록 잘 쓴 글이다. 여기에서 힐러리는 감정적인 대응이나 공화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3가지 포인트로 자신의 견해(observation)를 전달했다.

각각의 포인트에는 1) 자기변호 2) 공화당 공격 3) 공감대 형성을 통한 프레임 짜기가 깔끔하게 녹아 들어있다. 듣는 사람들에게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주는 감동적인 표현이 곁들여진 정치연설의 교과서다.

포인트 1.

“미국 외교관들은 국익을 대변해 자발적으로 전 세계 위험 지역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간다. 외교는 벙커에 숨어서 할 수 없다. 위험지역이라고 미국이 외교관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 순간 우리 힘은 약화한다.”

  • (사망한) 대사는 자발적으로 갔다.
  • 내가 무슨 조치를 더 했더라도 위험요소를 완전히 없앨 수 없었다.
  • 워싱턴에 숨어있는 하원의원들 수준에서 그런 외교의 최전방을 이해하겠나.

포인트 2.

“미국은 (실수로부터) 배우고, 적응해서, 더욱 강해졌다. 레이건, 부시, 클린턴, 부시 때도 수백 명의 미국인이 그렇게 사망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미국은 정략적인 공격을 한 게 아니라 대책을 마련해서 발전해왔다.”

  •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대사가 죽었다고 프레이밍하지 말라.
  • 공화당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이건 정권 때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죽었는지 아는가.
  • 공화당은 정략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
  • 공화당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힘을 약화하는 짓을 하고 있다.

포인트 3.

“국내에서 정치하는 우리는 목숨 걸고 나라를 대표하는 위대한 외교관들에 걸맞은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목소리 살짝 떨림)

  • 감동 선사 + 못난 정치인 공격.
  • 자신은 그런 위대한 외교관을 총지휘한 지휘관이었음을 상기시킴(=대통령 자격).
  • 그러니 이런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의 청문회 따위는 그만하라.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같은 풍모로 보인 건, 카메라의 위치 덕일 수도 있다(청문회장은 카메라 기자들이 바닥에 앉아서 찍기 때문에 살짝 로우 앵글이다). 조명과 화장 등의 도움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 어느 정치인인들 신경을 쓰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런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이야말로 힐러리의 가장 큰 무기다. 그런데 공화당은 힐러리가 가장 돋보일 기회를 가져다 바쳤다. 힐러리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철저하게 준비해서 홈런을 날렸고, 패전투수가 된 가우디가 이끄는 하원 벵가지 조사 위원회는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쳐다보는 중이다.

DonkeyHotey, "Chairman Trey Gowdy - Cold Fish", CC BY SA https://flic.kr/p/zQQ72u
완전히 ‘바보’된 가우디 위원장 (출처: DonkeyHotey, “Chairman Trey Gowdy – Cold Fish”, CC BY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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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저는 힐러리는 민주당의 감성보다는 오히려 많은 면에서 공화당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힐러리를 공화당이 공격하는 것은 바로 자가 당착일뿐이니 힐러리의 이중성을 공격하는 것이 공화당의 좋은 선거전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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