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은 참으로 식상한 글감이다. 문제 제기와 해결책이 매년 쏟아져 나왔고 정부와 언론은 이것들을 다방면으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왔다. 하지만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후속 논의를 위한 현실 변화는 보장되는 것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노벨상과 국정교과서
나 역시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우리는 왜 노벨상(특히 과학)을 받지 못하는가’ 시리즈에 질렸거니와 현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변하는 것이 없는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노벨상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종필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 과학과 노벨상의 엇갈림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의 국정 역사교과서 이야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물론, 국정교과서 또한 식상한 이야기지만, 식상과 식상을 합쳐서 조금이나마 새로울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학기술정책 이야기는 안 하고 뜬금없이 웬 역사교과서?’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 같지만, 꽤 관련이 있다. 문제는 지금 이 ‘국정’교과서 논쟁이 ‘역사’라는 분야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국정교과서의 취지와 집필 과정이 역사라는 분야의 고유한 특성을 해하는 것은 아닌지부터 대체 역사란 것이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글 또한 뻗어 나간 가지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데, 역사는 고유의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분야(예를 들면 과학)가 아닌, 자연, 인간, 사회, 그리고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E.H.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 사진)가 말하길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분야에는 역사가 있고, 당장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사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과학사와 과학, 그 애증의 관계
‘과학자들에게 과학사가 필요한가?’
이 질문은 도덕적인 질문이다. 길을 지나던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가?”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각자의 전문 분야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대다수는 ‘YES’라고 대답할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은 이보다는 조금 더 깊은 관계가 있는데, 과학이라는 분야가 추구하는 가치와 그 지식 창출 과정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사, 즉 역사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관점이다. 이는 필요충분 관계다.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고 역사 연구의 방법 그 자체이며, 다양한 관점을 말할 수 있기에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과 역사는 그 본질을 공유하는 면이 있는데, 이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위의 도덕적인 질문이 아닌, 조금 더 열린 그리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과학을 올바르게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과학자, 특히 기초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내놓는 대답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그중에서도 일관성이 있는 대답들이 있다. 가령, 초파리 연구자 김우재 박사(사진)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을 잘하려면 역설적으로 과학 이외의 분야도 잘 알아야 한다. 내 학문의 계보가 어디에 있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과학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잘 알아야 한다.”
-과학정책읽어주는남자들, “초파리 유전학자와의 대담” 중에서
줄기세포 연구자 구본경 박사(사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코멘트와 연구활동에 대한 코멘트를 분리해서 직설적으로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선순환 피드백이 중요하고 때로는 신랄하게 까내려야 한다.”
-과학정책읽어주는남자들, “어떤 줄기세포 연구자와의 대화” 중에서
이러한 통찰과 조언은 언론과 대중이 흔히 말하는 ‘가설과 통념에 대한 도전’, ‘미친 짓과 창의적인 사고’ 등등의 이야기와 궤를 함께하는데, 이는 과학뿐만 아니라 역사가 필요로 하는 소양이기도 하다. 역사를 잘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심할 줄 알아야 하고, 통념에 대항해봐야 하며, 작은 단서도 끝까지 파고드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과학의 역사에서도 다양한 관점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과학사를 통해 과학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과학(자)과 정치, 사회, 경제, 종교적 영향의 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 유명한 뉴턴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역사적 노력이 없었다면 그의 신학자로서의 정체성이나 그의 신학적 신념과 과학적 성취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해 싸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발전을 돕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해왔고, 이는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학기술정책 탄생의 뿌리가 되었다. 과학의 맥락에서는 이를 지식의 진보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과학사의 관점에서는 국가와 과학이 쌍방 계약을 맺으며 과학과 정치·경제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과학과 과학기술정책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과학 vs 과학교육, 역사 vs 역사교육
다양한 관점과 그에 대한 도전을 중심 가치로 내세우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연구와 교육은 그 목적이 다르며 그에 따라 과정과 수단 또한 다르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위험한 주장이다. 핵심은 역사와 역사교육은, 과학과 과학교육은 다르다는 것으로 역사, 또는 과학 연구는 분명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고 이를 존중해야 하지만,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는 교육적 관점에서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어디까지 가르칠 것인가
과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립 구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 자세하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인데, 연구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실제 현실을 반영한 이론과 현상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지만, 과학교육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지금 당장 이해하는 수준, 같은 시기에 배우는 내용, 그리고 향후 배워나갈 내용을 고려하여 ‘지금은 이 정도는 생략하고 여기까지만 배워도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정도”와 “여기까지”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 논쟁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배우게 될 내용은 이들의 합의를 거쳐 조금씩 달라진다. 화학 시간에 배우는 원자모형에 대한 서술을 떠올려보자.
학생들은 다양한 원자 모형의 예시들에 대해 마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 초기의 원자모형을 점차 ‘업그레이드’한 것처럼 배우지만, 실제로는 각 학자의 견해는 합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굉장히 달랐고, 그 전환 과정 또한 ‘업그레이드’와는 사뭇 달랐다.
또는, 물리를 생각해도 좋다. 어떤 물체가 힘을 받아서 움직이는 현상을 서술할 때, 처음에는 물체가 1차적으로 받는 힘만을 고려한 짧은 운동방정식 ‘F=ma’에서 시작하지만 추후에는 현실의 다양한 제약조건들(중력, 마찰력, 열, 코리올리 힘 등)을 더해 길고 긴 운동방정식이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는 이전에 배웠던 내용을 부정하기도 한다.
“과학자는 노벨상을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노벨상과 국정교과서는 이상한 대비를 이룬다. 각각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학술 진영과 교육 진영(과학에서의 연구와 역사에서의 교육)의 목표이자 결과물인 것처럼 일컬어지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지로 치부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합의를 통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이 정도”와 “여기까지”)이 OX 퀴즈로 변질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입장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대립구도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반드시 객관식이 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사실 이 대립구도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빠져있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과학을 연구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것인가. 이종필 교수가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연구를 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듯이, 역사 연구자 또한 그저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소위 말하는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순서를 제대로 따지자면 국론 통합이란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일원화된 교과서가 국론의 통합을 이룰 수 있기는 한 것인지부터 묻는 것이 순서다.
누구 말을 들을 것인가
착각은 자유지만, 이를 강요하는 것은 금물이다. 두 토끼를 한쪽에 놓는다고 해서 둘 다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본질이 아닌 주변부만을 건드리고 있다. 모든 논의는 그 근본을 건드리지 못하면 ‘A가 맞아’, ‘아니야, B가 맞아’ 같은 유치원 아이들 싸움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런 싸움에는 합의라는 것이 없다. 둘 중 하나가 맞거나, 혹은 제3자가 등장해 ‘아니야 C가 맞아’라고 주장하며 싸움이 커질 뿐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 슈퍼맨이 센지 배트맨이 센지를 놓고 한참 싸운 적이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 역시 ‘역사의 일부’
이번 사태의 본질은 국정 교과서가 무엇이고 역사가 무엇이고, 한국의 역사교육은 어때야 하는지 등의 기계적 정의에 달린 것이 아니다. 길게 생각해보면, 이번 국정화 논의 역시도 먼 훗날 한국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리게 될 역사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야말로 ‘백 투 더 퓨처’ 해보자.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해서 서술할까. 역사란 넓고 긴 시야와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종합적 해석을 요구하는 학문임을 고려할 때, 나는 이 논의가 ‘전문가와 한국 사회의 신뢰관계 형성’이라는 큰 맥락에서 서술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이번 사례는 불신의 사례로 서술되지 않을까 싶다.
국정교과서 사태는 향후 과학기술계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겉보기에 좁은 의미의 ‘역사 전쟁’으로 보이는 이번 사태는 단기적으로는 당장 다음 세대의 인재 양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장기적으로는 한국에서 전문가들(특히 연구자)이 국가와 맺는 상호계약이 큰 소리를 내며 삐걱대고 있음을 시사한다. 당장 이 사태를 접한 많은 대학 교수들이 단체로 집필 거부를 선언했다.
이는 언제든지 유사 영역으로 번져나갈 수 있으며, 과학자와 과학계라는 집단 또한 이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골목대장’ 놀이 반복하는 정부
정부(국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논의하고, 참가자들이 경쟁하게 하는 너그러운 방관자인가. 혹은 게임의 규칙도 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도 하는 골목대장 같은 존재인가? 정부는 국정교과서를 정하는 게임에서도 연구 과제 지원시스템 게임처럼 골목대장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절차적 정합성 확보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객관적이라고 평가를 받는 과학에서조차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현’ 정부의 주도하에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많은 글이 지적하듯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정부의 기능을 다시 한 번 물어보게 만들 뿐이다.
정부는 과학을 잘 몰라서 과학자들에게 과학연구를 맡겼지만, 제도와 평가시스템을 통해 과학자들을 분류, 선별하고 결국은 배제해왔다. 국정교과서 또한 다르지 않다. 하나의 역사관을 기준으로 이에 동조하여 역사를 서술할 학자들을 분류, 선별하고 그렇지 못한 연구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정부는 학계를 쥐고 흔들 힘을 얻는다. 인문·사회과학 분야 연구자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만드는 연구시스템 구조는 이전부터 계속해서 지적되어왔고, 이번 국정교과서 사태와도 일맥상통한다.
정부와 전문가
일선에서 오래도록 연구를 해온 과학자들은, 해외와의 교류를 통해, 그리고 경험적으로 어떻게 하면 과학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올바른’ 과학연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왔다.[footnote]당장 과정남 팟캐스트 인터뷰 에피소드들 몇 개만 들어봐도 한국사회에서 이공계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이 겪는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알 수 있을뿐더러, 많은 과학자들이 칼럼을 통해, 토론회를 통해, 온갖 종류의 직간접적인 경로로 문제를 제기해왔다.[/footnote] 하지만 무엇이 바뀌었나? 이들의 목소리는 거의 항상, 그리고 종종 무시당하고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당해왔다.
전문가 무시하는 정부의 자신감은 어디서?
국정교과서 또한 그렇다. 교육계에서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관련 학계에서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우려 섞인 전문가들의 견해를 ‘좌편향’이라는 무시무시한 마법의 단어로 가볍게 걸러내고, 국정교과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온 전문가의 전문성을 무시할 수 있는 정부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자들에 이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의 전문가들은 다시 한 번 무시당하고,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곧이곧대로, 맹목적으로 믿자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전문성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되, 그들이 지식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엄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 존중하지만, 확실히 따지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비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재 한국 정부는 비판에 이르기 이전에 전문가들의 전문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는 무시에 가까운데, 그 맥락이 무엇이 되었든 이번 국정교과서 강행은 정부가 인증하게 될 일부 전문가의 전문성을 우리 사회가 격렬히, 그리고 감정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 의심은 비판이 아닌 비난이 되고, 이는 또 다른 비생산적인 ‘손가락질’만을 양산할 뿐이다.
학문의 전문성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정부
학문하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한국 전문가들이 열정과 젊음을 바쳐 연구한 분야의 전문성은 정부의 ‘경제적 논리’와 과감하고 대국적인 정치적 결단으로 손바닥 뒤집듯 뒤집혀 갈 곳을 잃고 만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이 전문가와 학자들을 키워내야 하는 명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명분을 반드시 찾을 필요는 없다. 굳이 한국이 꼭 노벨상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고, 기초연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양한 관점의 한국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 사회가 이에 합당한 명분을 찾지 못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회는 또 다른 답을 찾을 것이다. 어쩌면 중국, 일본, 미국 외 여타 선진국들이 우리 대신 꾸준히 연구를 열심히 해 줄지도 모른다. 그때는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들 듯, 그 논의들을 수입해와 국정교과서로 조립해서 배우면 될 일이다. 언제부터 한국이 한국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학문적 기반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나라였던가? 한국적인 것은 김치와 강남스타일, 가끔 나오는 스포츠 천재인 김연아나 박태환으로 충분하다.
건설적인 국론 분열을 바람
한국 정부에 전문가는 무엇인가? 정부는 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의사를 물어본 적은 있던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다수결로 선출된 정부라고 하더라도, 그 나머지의 목소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적인 당위성이 그들에게 있는가? 정부의 역할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정부는 밀가루 가격을, 백화점 세일을, 핸드폰 가격을 통제할 자격이 있는가? 교과서에 들어갈 내용을 국가가 작성해야 하는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격렬하게 논의해야 하는 일들이다. 사실, 진작에 논의했었어야 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원했던 정부가 애초부터 이런 형태였다면 더는 논의를 지속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건설적인 의견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반영되지 않았다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한국사회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혹은 자처해야만 하는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모두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
‘국론 통합’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러한 논의들은 국론 분열이 아니라, ‘올바른’ 국론 대통합으로 가는 크고 아름다운 길이다. 건설적인 국론의 분열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