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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R&D를 문어발로 만드나

과학자와 정부는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과 같은 관계다.
계약을 통해 서로 부족함을 채우고, 상호 이익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다. 참으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 아닌가. 연구제안요청서(RFP)나 결과 보고서 양식을 뜯어본 후에 ‘대체 이 복잡한 양식이 왜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그리고 과학사를 아주 약간 첨가하면, 도달하는 모범답안 같은 것이다.

‘모범답안’이라 함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이것이 규범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렇기에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공교육 시스템을 거쳐온 사람이라면 다들 이 ‘모범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안다.

과학자와 정부가 관계 형성에서 겪는 어려움이 바로 이렇다. 양쪽 다 모범답안을 알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이게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관념적인 모범답안이 아니라 현재 우리 모습을 담은 현실 속 답안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어

문어발식 연구 

‘201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백서’가 화제가 된 바 있다. 백서에는 홈런보다는 1루 진출만을 목표하며 안주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이 담겨있다. 연구자들이 흔히 말하는 ‘문어발식 연구’만 해왔다는 거다. 문어발식 연구란, 높은 실패 가능성과 더불어 대박 가능성을 함께 내포한 도전적인 연구가 아닌, 주어진 예산을 따내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과를 낼 가능성이 큰 연구(혹은 그 수행 행태)를 의미한다.

문어발식 연구는 주어진 틀 안에서 조건을 찾아내는 것들이 다수를 이룬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시간 단축
  • 수율 증가
  • 경제성 증진 등

과제 특성상, A라는 틀(문어 머리) 안에서 A1, A2, A3 등의 세부 조건들(문어 다리)을 다루는 연구로써 각각이 A의 우수성과 발전에 기여하지만 A의 핵심 아이디어를 건드리거나 아예 새로운 형태의 문어 머리(!)를 제시하기는 힘들다.

단편적인 비판을 던지는 건 어렵지 않다. 왜 도전적인 연구를 하지 않느냐거나 과학자란 모름지기 창의적인 일에 더 도전정신을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 등등 과학자 개인의 도덕성이나 막연한 사회 규범에 의존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실제로 많은 언론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나라 과학 연구 행태를 비판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전혀 안 할 수는 없고, 아예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 전에 왜 이들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를 생각해보는 게 우선이다.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쉽지만, 이는 본질을 흐리게 하기도 한다. 단편적 비판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를 볼 필요가 있고, 이는 개별 연구 수주 과정이 아닌 사업 단위 연구 선정 및 예산 분배 시스템에 대한 조망을 요구한다.

개별 연구 프로젝트 수준에서 국가와 과학자의 계약 방식을 ‘공모전’에 비유할 수 있다면, 과학 연구 전체 시스템을 조망하기 위해선 또 다른 비유가 필요하다. 바로 ‘대학 입시’다.

입시설명회 = 대학입시 = 정보전 

한국 입시 시스템은 매우 복잡하다. 얼마나 복잡하면 주요 입시학원들의 주관으로 설명회가 열릴 때마다 학부모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평범한 연례행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큰 체육관에서 아이돌 콘서트 하듯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진행을 하는데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2014년 11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한 입시학원 주최로 열린 2015년도 대입설명회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815161.html

2014년 11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한 입시학원 주최로 열린 2015년도 대입설명회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행사가 시작되면 전형별로 전문 분석가가 나와서 지난 수년간의 입시 전형 현황과 변천을 바탕으로 올해 입시 전략에 관한 설명을 제공한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시와 정시 구분에서 시작해서 각종 특별, 특수 전형에 대한 고급 정보가 풀리기도 한다.

문제는 정시의 ‘가-나-다’ 군 구분에 따른 복잡한 경우의 수와 그에 따른 경쟁률 변동, 그리고 다시 그에 따른 눈치 게임이다. 과도한 경쟁과 일부 대학·학과로의 쏠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학생이 쓸 수 있는 원서 수와 구역을 제한하기 때문에, 학생은 이 안에서 벌어질 ‘경우의 수’를 따져보게 된다.

4년마다 한 번씩 벌어지는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할 경우의 수’ 같은 것이 실제로는 매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수 읽기 싸움의 생명은 정보다. ‘입시는 정보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엄마가 똑똑해야 애가 대학에 잘 간다는 말 또한, ‘웃프’게도, 분명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R&D’ 설명회 = 입시설명회

놀랍게도 과학기술 R&D의 현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규모, 주최, 참가자 평균 나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진행 방식과 구성은 정말로 유사하다. 연구 재단과 담당 부처가 주최하는 해당 연도 R&D 구성과 과제에 대한 설명회에서는 해당 분야 연구자들, 갓 교수가 된 30대의 젊은 교수부터, 중견 연구자, 그리고 정년을 앞둔 노교수들까지 마치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학부모들처럼 경건하게 설명을 듣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내용 구성 또한 매우 비슷하다. 지난 몇 년간 과제의 변천사와 올해 과제(연장 및 신규) 분배에 관한 설명이 있고, 이에 따른 몇 가지 팁이 제공된다. 물론 연구재단과 담당부처 관계자가 입시 강사처럼 족집게 대응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묘한 기시감이 드는 광경이다.

입시, 특히 정시에 ‘가-나-다’ 군이 있다면, 국가 과학기술 R&D에는 ‘기초-응용-개발’이라는 개노답 삼형제가 있다. 과학자는 이 세 가지 카테고리 중 한 가지에 동그라미를 쳐서 본인의 연구를 정의해야만 한다. 즉, 어디에 동그라미를 치는지에 따라 경쟁률이 요동치는 것이다.

이에 더해 3책 5공1이라는 조건까지 고려하면, 아아 과학자 골머리 썩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참고로, 인문사회 계열은 1책 3공, 더 빡빡하다).

조건이 걸려있는 이유 역시도 입시 시스템과 비슷하다. 신진 과학자들에게 연구 기회를 분배하고, 일부 거대 과제 편중현상을 막기 위함인 것이다. R&D 역시도 정보전이다.

소신 지원 vs. 눈치 지원 

여기서 잠시 선후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제안서의 존재 이유는 과학자를 더 잘 지원하기 위함이다. 과제를 기초, 응용, 개발로 나누는 것이나 R&D 설명회를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과학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이를 통해 다시 정부와 국가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다. 이른바 윈윈 게임을 위한 규칙이다.

잠깐 시간을 돌려 과정남이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담임선생님과 나눈 입시 상담 대화.

과정남: “선생님, 저는…  OO학문(비인기학과; 돈과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학과)이 너무 하고 싶어요”

담임 선생님: “그래? 그렇구나. 참 좋은 생각이구나. 우리 정남이는 그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렇지만,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건 학벌이야.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 룸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고 만단다. 그럴 수는 없잖니? 그러니까 일단은 좋은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어떨까? 학과는 나중 문제란다.”

과학자가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자의 과제 지원 방식을 게임이론과 정보 비대칭 이론을 적용해 연구하면 아마도 그럴싸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모든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가정하에, 순수학문 분야 한국연구재단 과제 지원 시 소신 지원을 해서 통과할 확률과 하향 지원을 했을 때의 차이에 관한 고찰’ 같은 연구 말이다.

정남이는 물론 좋은 학교의 원하는 학과로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이 상황에서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소신 지원하는 경우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위험(risk)이 크고 이로 인해 더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순간, 정남이는 수능 점수를 기준으로 최대한 좋은 학교에 지원한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너는 여기에 왜 왔어? 

신입생들이 술자리에서 어색함을 깨기 위해 묻는 단골 질문과 답변은 대충 이렇다.

– 너는 여기에 왜 왔어?

‘뭐, 이래저래 점수 맞추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

물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가는 학생도 꽤 많고, 한편 적응을 못 한다거나 나중에 후회도 많이 하지만 원래 사람은 눈앞의 이익을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다.

과학자들 또한 정남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는 누가 봐도, 그 이전에 내 자신이 봐도 기초연구라 구체적인 활용 성과는 나오지 않을 연구인데 어딘가의 아는 누가(선배나 예전 지도교수 또는 학과장이나 친구의 친구가 등등) ‘이번 연도 기초-응용-개발 연구 비율은 1:3:6이랍니다. 예년보다 200% 줄었답니다.’라고 한다면 이 과학자가 소신 있게 기초연구로 지원할 수 있을까.

연구 개발 과학

당장 해야 할 실험이 있고, 사야 할 시약·시료·장비가 있고, 연구원·학생 인건비가 있고, 학교의 서슬 퍼런 실적 평가가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과제를 딴다는 것’, 바로 그 자체다. 내 연구가 기초인지, 응용인지, 개발인지는 나중에 결과보고서 쓸 때 고려해야 할 항목이고, 당장 급한 상황에서는 행정적 분류와 실제 과학자의 인식 간의 괴리는 나중에 따져 볼 문제가 된다.

그 결과가 바로 3책 5공 혹은 1책 3공의 기준에 맞추어 본인의 소중한 연구를 솔로몬처럼 지혜롭게 n등분 해야 하는 현실이다. 물론, 한 연구가 세 가지 특성을 가지는 융합연구가 되었으면 참 좋겠지만, 한국에 그런 좋은 연구주제가 넘쳐난다면 우리나라는 노벨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초인 듯, 응용 아닌, 개발 같은 너

정남이는 어찌어찌 좋은 학교에 오기는 했지만, 곧 대학 초년생들이 많이 걸리는 유행병에 걸린다. 이른바 ‘적성병’이라는 것으로 학과 생활에 흥미를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정남이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어떤 약을 먹을지 고민이다. 현 대학 내에서 더 끌리는 학과로 전과하기 위해 노력을 하든지 혹은 반수를 하든지. 아예 자퇴하고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것이 현실이다.

과학자도 비슷하다. 일단 과제를 따기는 했으니 예산을 받지만, 연구라는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을뿐더러 애초에 하고 싶었던 것이 정말 개발에 속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혹은 일단 연구를 흘러가는 대로 끝내고 ‘개발연구입니다!’라고 선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학과에 등록된 인원은 200명이지만, ‘반수’하는 학생이 100명인 기형적인 학과처럼, 한국 과학자는 언제나 ‘전과’할 준비가 되어있다. 아니, 되어있어야만 한다. PhD comics의 연구비 사이클을 다시 떠올려보자. 연구를 먼저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안서를 써서 돈을 받고, 다음 제안서를 위해 제안서에 쓰지 않은 다른 연구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과정에서 연구는 마치 중국의 ‘변검’처럼 가면을 바꾼다. 썼다가 벗기도 하고, 벗었던 것을 다시 쓰기도 한다.

phdcomics.com http://www.phdcomics.com/comics/archive.php?comicid=1431

출처: phdcomics.com

이 연극은 입시에서 말하는 ‘허수 경쟁률’을 둘러싼 움직임과 놀랍도록 닮았다. 수능 난이도, 각 대학 입시전형, 수시 비중, 내신 비중, 논술 비중 등등에 기대서 벌어지는 거대한 눈치작전으로 이루어진 가짜 경쟁률은 게임의 난이도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허수(경쟁률)는 또 다른 허수(대기 번호)를 부르고, 어중간한 영역에 낀 학생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와 싸운다.

연구비 경쟁 또한 바로 이 ‘존재하지 않는 수’와의 싸움이다. 어떻게든 과제를 따내려는 과학자의 눈치작전과 전략적 분야 선택에서 비롯된 각 분야의 과제 선정 비율, 과제 신청자 수 등의 (허수를 포함한) 정량적 기록은 다음 해의 연구비를 책정하고 비율을 결정하는 정부 입장에 반영된다.

문제는, 이제 정부가 “아니!!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이렇게나 기초 + 응용 + 개발 + 융합 + 협업 + 진화생물학 과학기술정책 연구를 좋아한단 말인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이 숫자를 그냥 덥석 믿어도 문제요, 따져 보자니 현재의 수요가 허수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지난한 일일뿐더러 공식적으로 잡힌 통계 수치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중요하지 않은 요소가 전체 판세를 쥐고 흔드는 이른바 왝더독(Wag the Dog) 현상(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허수이고 어디까지 진짜일까

어디까지가 허수이고 어디까지 진짜일까

딜레마와 딜레마

허수는 허수를 부르고, 딜레마는 딜레마를 부른다.

과학자가 처한 상황은 정부와는 조금 다른데, 이는 앞서 잠시 소개한 게임이론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례인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죄수의 딜레마는 특정한 상황(논 제로섬 게임, non zero-sum game; 한쪽의 득점이 반드시 다른 쪽의 손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게임. 재판이 가장 대표적인 예)에서 두 명의 이해관계자가 결국 서로에게 불리한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과학기술 R&D라는 숲은 분명 총량이 정해진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지만, 정부가 누구에게도 R&D과제를 안 내주면 제로섬이 아닐 수도 과학자들 개개인이 처한 급박한 현실과 생각보다 커다란 숲은 이들을 논 제로섬 게임(non zero-sum game) 속 경쟁자들처럼 행동하게 한다.

과학자A 와 과학자B가 유사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둘은 모두 스스로가 기초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들어 기초분야 쪽에서 본인들 연구분야의 과제경쟁이 빡빡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다음 선택지를 택할 수 있다.

  1. 계속 기초분야 과제로 지원
  2. 분야를 바꿔서 지원

어떤 선택이 과학자들에게 가장 합리적인가.

사회적으로, 혹은 국가정책의 입장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일단 논외로 해 보자. 정답은 “분야를 바꿔서 낸다” 이다. 경쟁 상대가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지 결과적으로 분야를 바꿔서 지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연구비를 확보하는 방법(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게임을 논 제로섬(non zero-sum)이라고 가정하는 순간, 상대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제로섬보다도 더욱 잔인한 방식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환원하는 ‘헬조선’ 특유의 시스템이 이곳에서도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숫자 제로 1 0

이토록 잔인한 논 제로섬(non zero-sum) 게임 시스템에서 ‘실패’란, 게임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들과 언론이 ‘경쟁’을 부각하고 그 안에서 승리자들을 이야기할 때, 실패는 오로지 행간에만 존재한다. 승리자는 있으나 패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패배자라고 놀림을 받는 것보다도 더욱 좋지 않은, 아예 게임에 참여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악순환을 유발한다.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

다음 게임부터 참가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했던가.

한국 연구과제 지원시스템은, 과제를 수행한 경력이 많을수록, 여러 논문을 낸 기록이 많을수록 따기 쉬운 시스템이라 한 번 과제를 따기 시작하면 차후 과제를 따기가 더욱 쉬워지는 부익부 빈익빈 시스템이다. 모 온라인게임(예를 들어 LOL이라든지)에서 초반에 얻은 이득을 후반까지 잘 끌고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스노우 볼’ 효과와 같다.

이는 실패자의 존재를 한동안 지워버리고 승리자만을 찬양하는 혹독한 시스템이다. 결과적으로는 편법을 부추긴다. 과제 담당 부처에 향응을 제공해서라도 과제를 따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말이 되는 제안서를 쓰는지, 얼마나 충실하게 연구원을 구성했는지, 자신이 할 수 있을 과제인지는 부차적이다.

한편, 과학자와 학교 본부가 국가 지원을 통해 과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연구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간접비(Overhead)다. 이는 기초가 유리하다면 기초로, 응용이 괜찮다면 응용으로, 개발이 비었다면 개발로 색깔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더욱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생존 게임이다.

승자만이 모든 걸 독식하고, 2등은 기억되지 않으며, 승자는 다음 게임에서도 유리하다.

승자만이 모든 걸 독식하고, 2등은 기억되지 않으며, 승자는 다음 게임에서도 유리하다.

바보야,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야!

공정함의 가치 아래 경쟁을 추구하는 현 시스템은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게임의 규칙을 공정하게 만든다는 미명으로 정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치킨게임으로 과학자들을 몰아넣는다. 그리고 승리자만을 칭송한다.

더 큰 문제는, 실패에 대해서는 과학자 개인의 윤리로 문제를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제안서 잘 쓰기, 정보 얻어내기, 눈치작전 등에 ‘실패’한다면 그 과학자는 실패자인가? 그리고 실패자는 비록 한동안이지만, 배제되어야 하는가?

국가 연구과제의 근본적인 목표가 무엇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게임의 규칙이 개인과 사회에게 끼치는 영향을 한국 입시를 통해 지겹도록 봐왔다. 과학자가 서로 박 터지게 싸우다가 전과하고, 자퇴하고, 도피성 해외유학을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게임의 규칙과 목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대체 어떤 환경이 어떤 규칙이 이 문어발식 연구와 1루타 양산형 연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 질문을 잘 던져야 올바른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경쟁’은 좋지만, 이로 인해 ‘헝거 게임’이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분류와 선별 그리고 배제 

분야를 막론하고 연구자를 괴롭게 하는 ‘그래서 어쩌라고’를 물어볼 시간이 왔다. 어떤 문제가 구조적인 문제이고, 규칙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의외로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그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문제를 정의한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게임의 규칙을 논의하고, 과학자들이 경쟁하게 하는 너그러운 방관자인가. 혹은 게임의 규칙도 정하고, 적극적으로 참여도 하는 골목대장 같은 존재인가? 물론 이는 이분법이 아니며 정부는 양 극단 사이의 어느 곳엔가 위치한다.

정치 성향에 따라 정부의 ‘옳은’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현재 정부가 자처하는 역할은 아무래도 골목대장 쪽에 더 치우쳤다. 정부는 돈을 나눠주는 규칙도 정하고, 돈도 주고, 돈을 받고 행한 성과를 평가하며, 이를 바탕으로 과학자를 평가한다. 즉, 정부는 과학 연구의 성과만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과학자를 평가한다.

많은 사람이 연구과제시스템에서 정부의 역할은 ‘돈줄’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이는 정부가 수행하는 여러 역할 중 하나고,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 시스템에서 정부가 실제로 하는 일의 핵심은 바로 ‘분류와 선별’이다. 정부는 연구 제안서를 통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분류’하며 연구성과 평가를 통해 다음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과학자를 ‘선별’하고,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수의 과학자를 ‘배제’한다.

등급 분류

실패는 틀린 게 아니다

많은 질문과 대안이 분류와 선별에 관한 제도적 보완책이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배제’에 관한 질문이다. 실패와 패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직접 언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분류와 선별’은 성공뿐 아니라 실패에 관해서도 적용해야 한다. 성공했다면 그에 맞는 분류와 선별 작업을 거친다. 마찬가지로 실패했다면 그에 적합한 분류와 선별 작업을 거쳐야 한다.

과학자 또한 그들(혹은 동료)의 실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성공한 과학자와 연구의 미담에 집중하기보다 어떤 실패가 있었고, 그 실패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샅샅이 훑어보고 나서야 우리는, 과학계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노력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

실패는 틀리지 않았다. 과학자들에게 실패를 허하라.


  1. 연구자 한 명이 정부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개수의 제한 범위. 총 5개, 그중 책임연구는 3개로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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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과정남
초대필자.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과학, 기술, 그리고 정책과 관련된 복잡한 이슈들을 가볍지만 진지하게 핥아보는 프로젝트. 박대인과 정한별로 이루어진 비즈니스유닛이자 온라인 인격체이다. 나이는 한국 나이로 두 살. 흔히 과학기술정책이라 생각하는 R&D 정책부터 과학자들의 일상생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을 이야기한다. → 과정남(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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