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프랑스 언론계에 ‘롱 폼 저널리즘'(Long Form Journalism) 열풍이 분다.
아직 많은 이에게 생소한 용어인 ‘롱 폼 저널리즘’은 일반적으로 기사와 단편 소설 중간 정도 길이의 분량이 긴 저널리즘을 통칭한다. 종종 내러티브 저널리즘, 뉴뉴 저널리즘(New New Journalism), 슬로우 저널리즘(Slow Journalism), 해설 저널리즘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프랑스 롱 폼 저널리즘의 다채로운 풍경을 살펴보자.
뱅떼앙(XXI): 롱 폼 저널리즘의 전성기를 열다
뱅떼앙(XXI)은 프랑스의 무크지(비정기 간행물)다.
‘유용한’ 저널리즘, ‘다른’ 저널리즘을 구현하고자 하는 텍스트와 사진 그리고 삽화를 이용한 심층 르포 전문 잡지다. 2008년, 르피가로의 유명기자였던 파트릭 생떽쥐뻬리(Patrick St-Exupery)와 로랑 베카리아(Laurent Beccaria)에 의해 만들어진 이 매체는 처음에는 저널리스트들에게 ‘꿈같은 이야기’로 다가왔지만, 단숨에 롱 폼 저널리즘의 본보기가 됐다.
로랑 베카리아는 달라진 미디어 환경으로 인해 스트레이트 위주의 짧은 속보성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에서는 다른 형태의 스토리텔링, 고품질의 콘텐츠를 원하는 독자층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벵떼앙을 만든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언론에서 제대로 된 심층 르포 기사를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파트릭 생떽쥐페리는 신문사의 제호가 ‘브랜드’로, 독자들은 ‘소비자’로, 기사는 ‘콘텐츠’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사이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저널리즘의 그 어떤 가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광고 없는 유료 잡지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해 확신해야 한다. 독자의 주머니를 열게 한다는 것은 저널리즘에 있어 엄격함을 요구한다.”
뱅떼앙의 목적은 주제 선정이든 글 쓰는 방식을 통해서든 실제 일어난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창간호부터 화제가 된 뱅떼앙은 일 년에 세 번 출간되며 가격은 15.50유로로 각 호당 5만 부 이상이 규칙적으로 팔리고 있다. 뱅떼앙의 성공은 무크지와 롱 폼 저널리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푀이통(Feuilleton), 롱꾸르(Long Cours), 데스포르(Desports) 같은 무크지들이 등장했고, 서점에서는 오래전 사라졌던 무크지 코너가 다시 생겨났다.
디지털 멀티미디어와 심층 르포의 만남
젊은 저널리스트들은 웹에서 롱 폼 저널리즘을 시도 중이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심층 르포를 다루는 새로운 매체들이 앞다투어 등장했다. 이런 흐름을 대표적인 매체는 다음과 같다.
- 르 캬트뤠르
- 윌리스
- 이즈버그 매거진
‘슬로우 정보’를 표방하는 르 캬트뤠르(Le Quatre heure)는 전통 미디어의 취재망에는 포착되지 않지만 중요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주제, 장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멀티미디어 르포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겠다는 야망으로 2013년 문을 열었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전문 디지털 매체인 윌리스(Ulyces)는 “문학적 퀄리티와 저널리즘적 엄격함을 갖춘 진짜 이야기”를 선정해 시리즈 형태의 기사로 제공한다. 이들은 최고의 내러티브 저널리즘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의 작가들 혹은 매체들과 협업하고 있다.
이즈버그 매거진(Ijsberg Magazine)은 “정보를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해, 미디어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그리고 저널리즘의 고결함을 회복하기 위해” 창간된 국제뉴스 전문 사이트다. 이를 위해 이즈버그는 이미지를 중시하고 ‘신속하게(Promptement), 침착하게(Calmement), 느리게(Lentement)’ 라는 세 가지 템포로 뉴스를 전달하고 있다.
텍스트 기사를 뛰어넘어 새로운 형식의 멀티미디어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이 뉴스 사이트들은 대체로 저널리즘 스쿨을 갓 졸업한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발로 뛰는 저널리즘을 통해 ‘진짜 이야기’를 전달해보겠다는 열정으로 만든 온라인 유료 매체들이다. 이들은 매일 새로운 기사를 계속해서 써내야만 하는 기존 신문의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뉴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 주제에 관한 풍성한 정보와 다양한 서술 방식을 제공하는 이들은 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한 뉴스의 주제를 파고들어 심층화하고 때로는 전망도 제시한다. 수많은 경쟁자가 웹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차별적이고 질 높은 콘텐츠만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롱 폼 저널리즘은 퀄리티 저널리즘을 구현하고자 하는 젊은 저널리스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레주르: 크라우드 펀딩으로 창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창립을 준비 중인 매체도 생겨났다. 리베라시옹 출신의 기자들이 창립을 준비 중인 레주르(Les Jours)가 그것이다. 지난 6월 3일,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시작한 레주르는 불과 일주일 만에 목표액 5만 유로와 만 명 가량의 후원회원을 달성했다. 이 신생매체를 위해 리베라시옹의 스타 저널리스트였던 이자벨 로베르(Isabelle Roberts)를 비롯한 11명의 기자가 뭉쳤다.
이들은 자신의 저널리즘을 옵세셔널 저널리즘(Obsessional Journalism)이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저널리스트들뿐 아니라 독자들도 질렸다. 우리는 이러한 정보의 홍수, 기억 없는 뉴스들과 싸우고 싶었다. 아울러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정보들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지면을 할애하고 싶었다.”
이슈를 한번 선정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한 시리즈 형태의 기사를 선보일 예정이고 인터뷰, 생생한 인물묘사, 인포그래피, 독창적인 이미지 사용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이를 위해 5명의 개발자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box type=”info” head=”프랑스 언론 특유의 제도 ‘양도조항’ “]
레주르의 창간에는 2014년에 이루어진 다국적 통신회사인 알티스(altice)에 의한 리베라시옹 인수도 한몫했다. 관대한 ‘양도조항’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양도조항은 1935년 의회에서 ‘기자의 양심조항’과 더불어 만장일치로 통과된 조항으로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의 소유주가 바뀔 때 저널리스트가 원한다면 회사를 떠날 수 있고, 이때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프랑스 특유의 제도다.[/box]
랭프레뷔, 슬로우 미디어 표방
랭프레뷔(L’imprévu)도 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데이터 저널리즘 사이트였던 오브니(Owni, 2012년 폐간)[footnote]프랑스의 대표적인 데이터 저널리즘 사이트였던 오브니는 위키리크스와 공동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자료를 싣기도 했는데 독자들에게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나토 군대가 일으킨 사건과 관련한 7만5천여 개의 파일 중 다룰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기는 등 독자와 협력 저널리즘을 구현하기도 했다. [/footnote] 편집위원들에 의해 창간된 랭프레뷔는 ‘슬로우 미디어’를 표방한다.
양질의 콘텐츠를 위해서는 저널리스트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 매체는 환경과 사회문제의 주요 사안들을 충분히 분석한 후 각 사안의 맥락을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독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편집장 클래르 베르뜰레미(Claire Berthelemy)는 창간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다양한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왜 뉴스 사이트냐고? 이러한 문제들은 뉴스와 함께 다뤄야만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광고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웹 기반 뉴스 사이트로 인터넷 신문의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속보에 매달리기보다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심층 분석기사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에 의해 독자가 꼭 알아야 할 의제들이 파묻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2세대 실험 가능케 한 1세대의 성공
제1세대 인터넷 신문이라 할 수 있는 메디아파르트(Mediapart)와 아레 쉬르 이마쥬(Arrêt sur Images)의 성공 역시 이들이 퀄리티 저널리즘을 통한 유료 모델을 선택하도록 자극했다.
프랑스 탐사 저널리즘의 상징이 된 메디아파르트는 2014년 9월 26일, 견고한 독립 언론이 되기 위해 창간 당시 목표했던 구독자 10만 명을 돌파했고,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 비평 매체로 자리매김한 아레 쉬르 이마쥬는 미디어 비평을 통해서도 온라인 콘텐츠의 유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아레 쉬르 이마쥬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TV5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으로 르몽드의 미디어 전문 기자였던 다니엘 슈네이더만(Daniel Scheidermann)이 진행했다. TV 방송의 콘텐츠 검열, 정치권과 언론의 유착 관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대표적인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했으나 사르코지 정부가 들어선 지 몇 주 후 프로그램 편성에서 제외되어 폐지됐다.
그러자 온라인에서 폐지 반대 서명운동이 이루어졌고, 이후 다니엘 슈네이더만은 서명자 18,700여 명의 성원으로 2007년 같은 이름의 첫 번째 임시사이트의 문을 열었다. TV 프로그램에서 출발한 유료 미디어 비평 전문 웹사이트로 미디어 해독에 관심이 많은 구독자를 모으는 데 성공한 아레 쉬르 이마쥬는 광고 없이 정기 구독을 통해 수익을 내고 있으며 구독자와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동영상과 텍스트를 통해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온라인 포럼을 통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많은 청취자, 독자들과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더 다양하고 심층적인 비평 프로그램으로 도약했다고 평가받는다.
‘제1세대 인터넷 신문‘의 성과는 ‘제2세대 인터넷 신문’으로 불리는 신생매체들에 퀄리티 저널리즘 구현 가능성을 믿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처럼 롱 폼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매체들은 다양해지고 있다. 레주르의 공동 창간자인 이자벨 로베르는 “우리는 지금 ‘뉴스미디어의 봄’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페이스북이나 새로운 기술 덕분에 혁신적인 콘텐츠 제공이 더욱 쉬워진 것이다.
벨기에의 미디어학자 이자벨 뫼레(Isabelle Meuret)는 이렇게 말한다.
“디지털은 저널리즘의 휴머니즘적인 영역을 장려하고, 저널리스트에게 장인에 견줄만한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오늘날 문학적 저널리즘을 더욱 세련되게 한다.”
“한두 개 제외하고 금방 사라질 것”
물론 이러한 신생매체들이 모두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롱 폼 저널리즘이라는 틈새시장은 포화상태다. 미디어 경제학자인 줄리아 캬제(Julia Cagé)는 아직 경제적 자립이 불투명한 신생매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체 고유의 정체성과 그에 따른 브랜드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전망한다.
“만약 웹에서의 뉴스 소비 행태가 종이신문의 경우와 유사하다면, 이 신생 매체 중 한두 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개인들은 인터넷에서 몇몇 매체에 한정적인 구독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에는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신문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캬제는 정보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는 르몽드나 르피가로 같은 기성 언론사들이 이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신생매체들과 유사한 포맷의 콘텐츠를 제공한다면 기성언론에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 덧붙인다.
기성언론의 가세: 레큅과 르피가로
이미 ‘롱 폼 멀티미디어 르포’를 제작하는 기성 언론사도 늘어나는 추세다. 유료 독자들에게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웹 사이트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증가하면서 기성 언론사들도 롱 폼 멀티미디어 기사를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레큅(L’Equipe)은 스포츠 전문 멀티미디어 앱인 렉스플로르(L’Explore)를 2014년에 선보였고, 르피가로(Le Figaro)역시 2015년 6월 그랑포르마(Grands Formats)를 세상에 내보냈다. 그랑 포르마는 핵심 이슈를 사진과 동영상, 인포그래피 등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전달하는 아이패드 전용 디지털 잡지로 일 년에 세 번 발행될 예정이다.
주요 이슈에 대한 기존 기사들을 업데이트하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심층 보도로 재탄생시킨 그랑포르마는 창간호에서 IS를 특집으로 다뤘다(“세계에 향한 IS의 도전”). 이러한 멀티미디어 분석기사는 교육적 자료로도 활용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르피가로는 주요 시사 이슈에 대해 시간을 두고 신중한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독자층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그랑포르마를 런칭했다고 밝혔다. 동영상과 인포그래피를 혼합한 분석 기사는 이미 르피가로 웹사이트에도 등장했다. 하지만 그랑포르마는 더 풍부한 콘텐츠와 볼륨으로 매거진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고 올가을 제공될 제2호부터는 유료 서비스(4.99유로)로 제공될 예정이다. 르피가로 프리미엄 유료 독자(월 9유로)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새로운 뉴스보다 뉴스에 대한 이해를 찾을 것”
SNS, 언론사 사이트, 뉴스 포털 등을 통해 정보는 끊임없이 제공되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만나기 힘든 ‘정보의 역설’ 현상이 오히려 정보 생산 속도에 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실시간 보도가 확대하면서 기자의 사실 보도가 갖는 매력은 감소했지만, 맥락과 분석을 전달하는 기사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진다.
그러나 디지털로 인한 정보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최신 뉴스에 대한 언론사들의 강박관념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미국 시사잡지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부편집장인 맷 톰슨(Matt Thompson)은 뉴스 저 너머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저널리즘의 황금기가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footnote]『페이지원, 뉴욕타임스와 저널리즘의 미래』, 데이비드 폴켄플릭 저, 커뮤니케이션북스, p. 122-131. [/footnote]
“넘쳐나는 정보로 괴로워해야 하는 세상에서 저널리스트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정보의 폭로가 아니라 정보를 분석하고 조직화하며 걸러낼 수 있는 저널리즘이다. 독자는 점점 더 새로운 뉴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뉴스에 대한 이해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롱 폼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프랑스의 신생매체 중 대부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원칙에 디지털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요소를 결합해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의미 없는 뉴스 정보에 질린 것은 비단 독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의 맥락을 짚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그러니까 정보 제공의 허들을 만들어가는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