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화타’ 장병두 씨. 그러나 병원에서도 포기했다는 환자들에게 한약을 지어두고 50만원 씩을 받던 그는, 사실 의사 면허도, 한의사 면허도 없는 무면허자다. 얼마 전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1,000만 원. 대법원은 “단순히 어떤 질병을 상당수 고칠 수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사실 이 사건은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은 아니다. 의료법은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으며, 이 조항은 실제 의료법의 가장 중요한 근간 중 하나다. 이 조항이 무너진다면 현행 의료법의 목적과 그 의의 전체가 무너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면허 없이 환자를 진료한 장병두 씨의 유죄 판결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단순한 사건이, 하나의 칭호로 인해 갑자기 ‘딜레마’로 부상했다. ‘현대판 화타’. 이것이 그를 부르는 별명이다. ‘삼국지’에서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외과수술로 치료했다는 중국 후한 말의 명의, 화타. 그런 전설적인 의사에게 그를 비견한 것이다. 그의 기소 이후 거의 모든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이 칭호를 타성처럼 붙이기를 저어하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언제부터 사람을 고치는 것이 불법이 되었느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대법원의 판시에도 그가 ‘어떤 질병을 상당수 고칠 수 있었다는 사정’을 고려하였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사정, 그가 ‘현대판 화타’로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현대판 화타’란 칭호가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이미 1심 판결이 내려지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07년 4월 쿠키뉴스의 보도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현대판 화타’란 칭호는 물론, 장병두란 이름 자체가 이 때 처음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는 것. ‘현대판 화타’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쿠키뉴스의 보도보다 앞서 장병두 씨에 대해 보도한 기사는, 역시 장병두 씨의 항소심 분위기를 다룬 노컷뉴스의 기사가 유일하다.
블로그나 ‘네이버 지식인’ 등, 인터넷 전체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장병두 씨가 ‘현대판 화타’로 불린다는 쿠키뉴스의 기사가 무색하게도, 그를 ‘현대판 화타’로 칭하는 글은 바로 그 쿠키뉴스의 기사가 발행되기 전까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즉, 장병두 씨가 현대판 화타로 불린다는 내용의 바로 그 기사가 인터넷에서 현대판 화타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글이다.
어쨌든 그 ‘현대판 화타’란 표현은 쿠키뉴스의 기사를 필두로 한국일보 (1, 2), 매일경제,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한국경제, 서울신문 등 다양한 언론사에 의해 계속 확대 재생산되었고, 심지어 불법 침뜸 교육 및 사설 자격증 발급 등으로 유죄 선고까지 받은 김남수 씨에게 같은 칭호가 붙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의술은 과연 ‘현대판 화타’란 이름에 어울리는 신묘함을 가진 것일까. 칩거한 채 함구하기에 바쁜 그였지만, 몇 가지 힌트가 될 만한 기사가 있다. 첫 번째는 주간한국의 기사, “‘102살 한국판 화타’ 신비의 의술 베일을 벗겨보니…”.
‘상대성 원리’. 할아버지 의술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딱 맞아 떨어지는 용어이다. 떡잎도 2장이듯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짝이 있다’는 데 할아버지 의술은 기반을 두고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원리와는 궤를 달리한다.
일례로 출산 후 몸이 퉁퉁 붓는 증상에 시달리던 산모가 할아버지를 찾은 적이 있다. 원인을 모르고 찾았지만 산모에게 돌아간 대답은 뜻 밖에도 임신 중에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 병이 났다는 것.
더 놀라운 사실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약재 중에 과자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과자로 인해 병이 났고 상대적으로 과자를 통해 병을 치유한다는 할아버지만의 비법에 의한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조제해 준 약을 먹고 산모는 다시 회복됐다.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장병두 씨의 구술을 엮어 만들었다는 책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의 내용이 참고할 만하다. 비록 그의 비방이나 구체적인 치료법에 대해서는 숨기고 알려주지 않고 있지만, 그의 사상이나 대강의 치료 원칙, 그리고 그 효과 등에 대해 다양한 방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내용을 인용한다.
“사람을 고치는 방법은 바로 상대성 원리입니다. (중략) 36.5가 바로 인체의 0도입니다. 체온이 38도가 되면 공보다 올라간 것이고, 35도가 되면 내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인체가 병드는 이치에요.” (126쪽)
“비만 고치기는 아주 쉬워. 음식을 먹기 전에 3분간 그 음식을 쳐다보면 돼. 아무 생각 없이 그 음식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음식과 우리 몸이 서로 교감해서 이게 내 몸에 필요한지 아닌지를 알게 되거든.” (160쪽)
“곡기를 끊고 독소를 빼야 나을 병인데 계속 이것저것 먹어대니 그게 낫겠어? 밥에다, 약에다, 몸이 더 망가지지. 감기 걸렸을 때도 한 사흘 굶으면 낫는데 밥 먹고 약 먹으면 일주일도 넘게 간다고.” (162쪽)
할아버지는 맥진이나 문진 대신에 등을 짚어보는 독특한 진단법을 쓴다. (중략) 직심이 있어야 병을 고친다고 말한다. 그러면 수진만으로 다 알아내고, 냄새만 맡아도 감이 온다. (중략) 할아버지는 이 진단이 천 명에 한 명 정도 실패할 정도로 정확하다고 말한다. (206쪽)
할아버지의 이 독특한 진단법은 오링테스트의 원리와 흡사하다. (중략) 의사들이 독한 약을 선택할 때에도 이런 방법을 쓰면 그 시행착오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 오링테스트를 이용하면 진찰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 (207-208쪽)
“어떻게 문진을 해? 문진할 필요가 없어. 환자가 오면 그 즉시 어디가 아픈지를 알아내야 그게 공부한 의원이지 물어서 알면 누군들 의원노릇을 못해?” (235쪽)

한편 그에 대한 항소심 판결문은 그 이면을 드러낸다. “피고인이 불치병 환자를 고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못 받게 해 환자들이 치료시기를 놓치게 한 점, 또 처방이 부작용을 일으킬 수 도 있는데도 모든 실험을 거부하고 공개하지 않는 점 등은 묵과할 수 없다”, “말기암 환자뿐 아니라 피로를 호소하거나 감기를 앓는 환자 등 광범위한 환자들을 상대로 하루에 50명 내지 100명까지 의료 행위를 해왔던 것으로 인정되며, 1회당 평균 조제 비용이 평균 50만 원 정도로서 감기 환자나 가벼운 질병 환자의 경우 일반 병원이나 한의원에 비해 과다한 진료비를 받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진료의 주된 목적이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 등이다.
또한 장병두 씨는 본인의 진단법이 천 명에 한 명 정도 실패할 정도로 정확하다고 주장했지만, 판결문은 그런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증상을 묻지도 아니하고 환자의 목뒤를 관찰함으로써 병의 원인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사회통념상 환자의 증상에 대한 정보 없이 이루어지는 진단의 정확성에 의문이 있고,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피고인 앞에서 진찰을 받은 직원(뇌줄중 환자)의 병명을 알아맞히지 못하고 오히려 건강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한 사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이미 판결문에서 적시한바, 그는 ‘실험을 거부하고 공개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주간한국의 보도에서 볼 수 있듯 ‘대외적으로 비법을 공개한 바 없다’고 알려졌다. 무죄 판결 전에는 어떠한 진료도, 비법 공개도 있을 수 없다 는 입장도 피력했다. 다시 말해, 그의 의술의 ‘신묘함’은 그 어디에도 공개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장병두 씨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현대판 화타’라는 그 기원조차 알 수 없는 칭호를 적극 퍼나르는 데 인색하지 않다.
그의 권위는 불분명한 구술에 의지한다. 조선일보 ‘와이’는 그의 치료에 효험을 본 환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표현한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주로 교수, 약사, 유명 문인 등을 거론하는 점도 흥미롭다. 같은 신문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 역시 김지하 시인 일가가 그의 치료를 받았다는 내용을 장문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기소 내용에 따르면 그의 무면허 진료 횟수는 2,601회, 그 이전에 처벌된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수천이다. 개중 치료된 환자 수는, 조선 등 주요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항소심에서 제출된 탄원서에는 약 오십 명의 서명이 들어 있다고 하며, 판결문은 “수천 명의 환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병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환자들의 경우에는 병이 악화되거나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의 치료효과에는 정말 ‘현대판 화타’란 이름에 걸맞은 권위가 있는 것일까. 정확한 수치나 진료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그 어떤 자료도 존재하지 않고, 자칭 비법의 전수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다. 오직 어떤 사람들의 탄원서만이 겨우 그 위태로운 권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무면허 의료 사건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비단 이 ‘현대판 화타’만의 특이한 현상인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가 정당한 것인지 알 수 없건만, 어떤 인터넷 언론은 자랑스럽게 ‘현대판 화타’라는 이름을 창조해냈고, 수많은 언론은 이것을 아무 의심도 없이 전하고, 또 전했다. 한 무면허자가 ‘현대판 화타’가 되고 근거도 없이 의료법을 ‘딜레마’로 만드는 현실 앞에서, 언론의 비판 의식은 실종되었고, 그 어디에서도 자정작용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