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box type=”note”]이 글은 만화를 연구하는 필자(슬로우뉴스 편집위원)가 2005년 4월에 쓴 글입니다. 하지만 (시사)만화가를 둘러싼 저널리즘 환경은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죠. 시사만화가를 꿈꾸는 분들, 또 현업에 종사하는 분들 그리고 시사만화와 저널리즘에 관심 있는 독자께 유용한 고민의 재료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편집자)
[/box]

대부분 신문을 펼치고 시사만화를 볼 때, 한 가지 신기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시사만평이 정치면 한가운데에 떡하니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치를 최우선으로 치는 대부분의 중앙일간지 특성상 무척 앞부분에 있다. 내가 누차 주장해왔듯이 시사만화는 그 매체의 가장 본심에 가까운 걸러지지 않은 주장 그 자체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팩트가 중심이 되어야 할 주요 기사면이 아니라, 논설들과 함께 ‘오피니언’면에 편성되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닌가.

질문, 왜 시사만화는 ‘오피니언’면에 없는가?

4칸 시사 연재만화의 경우는 좀 더 지면 편성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설과 같이 묶여서 제시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팩트와 주장을 구분해서 제시하는 수고를 굳이 하지 않는 음험한(?) 신문기사 작성법이나 지면 편집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시사만화라는 축으로 한정 지어서 보자면, 그만큼 만평의 역할과 지위가 모호하다는 말이 된다. 기사인지 칼럼인지, 작품인지 자료인지 모호해지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를 만들어내는 주체인 시사만화가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의 시사만화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면, 지금 이 시점에 가장 적합한 시사만화 창작 및 유통 – 즉 시사만화가가 창작하며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말이야 거창하지만 결국 오래된 문제제기의 재발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결국, 어떻게 자유로운 표현을 보장받고 호소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 널리 유통하면서, 충분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니 말이다.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기자인가 기고자인가?

언론에 전속되어 활동하는 시사만화가는 ‘화백’으로 칭해지는 관행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대한 극존칭인데, 주로 언론사에서 직접 붙여주는 호칭이다. 생각해보면 사진 찍는 사람은 사진기자고, 글 쓰는 사람도 기자고, 칼럼 쓰는 사람도 기자다. 그런데 화백이라는 극존칭이지만 거리감을 둔 표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그대로 시사만화가의 이중적인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

이미 널리 제기되어온 문제인 ‘신문사 직원인가 독립적인 작가인가’ – 즉 기자인가 기고자인가의 문제다. 사실 기술적인 잣대로 보자면 상당히 간단하게 해답이 나오는데, 예를 들자면 월급을 받으면 기자, 편당 고료를 받으면 독립적인 작가라는 식의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제기하는 바는 그보다 작품 자체의 문제인 편성권에 대한 것이다. 만화의 내용에 대해서 작가가 어느 정도까지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지점이다.

작가의 자율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시사만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해석한다. 작가의 창작이기 때문에 온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사만화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설에 대한 일러스트라기보다는 자체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독립성을 이야기한다. 시사만화의 전통적인 강점은 비판과 도발인데, 그 대상에는 해당 지면의 논조 역시 포함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문은 그런 비판적 시각까지도 수용함으로써 다양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2004년에 있었던 세계일보 조민성 작가 직무정지 사건 및 문화일보 이재용 작가 만평 누락 사건 등 편집권 분쟁 사례에서 작가측인 시사만화작가회의가 견지한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

근조 16대 국회, 조민성(2004년 3월 3일자 세계일보), 이 만평 게재 후 세계일보는 작가에게 직무정지 명령을 내렸다.
근조 16대 국회, 조민성(2004년 3월 3일 자 세계일보)
이 만평 게재 후 세계일보는 작가에게 직무정지 명령을 내렸다.

현실적으로는 만평 역시 편집권자의 조율 ‘대상’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 입장이 관철되고 있다. 지면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집부로, 만평 역시 다른 기사나 칼럼들과 대등하게, 편집권자의 판단으로 조율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만평은 어느 한쪽 편들기가 되었든 양비론이 되었든, 상황의 핵심을 날카롭게 꼬집기 위해 비유적으로 단순화시켜서 하나의 입장에 편향을 지니게 된다. 항상 말을 조심스럽게 꼬고 또 꼬아서 공정성을 가장하고 주장을 팩트처럼 포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다른 기사들과는 180도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스크 입장에서 시사만화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인 셈이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인 장면에서는 아이디어 회의 테이블에서 표현을 조율하는 선에서 그치지만, 워낙 만평이라는 것이 그 자체가 편향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앞선 문화일보의 경우 데스크가 누락의 명분으로 내건 것은 공정성이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공정한’ 만평이라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으로 제기되었던 바, 즉 문화일보의 논조 자체가 보수화되고 있었기에 편집권자가 그 논조를 거스르는 내용의 만평을 지면에서 뺐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만평의 편향이, 신문이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되어 있는 편향이 아니었기에 극단적인 수를 썼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사만화작가회의의 항의성명서에도 나타나듯이, 작가의 자율권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만평을 이야기할 때 ‘기명 칼럼’이라는 규정을 종종 하곤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는 것이니, 그것에 따른 자체적 통제권 역시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기명 칼럼에 대해서야말로, 데스크가 내용에 따라서 개제를 선택/수정/거부할 수 있다. 월급을 받는 내부필자라면 서열에 따른 권한 비중이라는 것이 있으며, 고료를 받는 외부 필자의 경우라면 실리는 경우라 할지라도 “본 칼럼의 시각은 본지의 시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전장치 문구가 빼놓지 않고 들어간다.

신문의 편집권 vs. 만평 작가의 자율성

데스크 결정에 대해 직접 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신문사 조직에서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표현의 자유나 작가의 창작성이라는 키워드는 고귀하기는 하지만 신문편집이라는 현실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문사와 논조가 맞지 않아 시사만화작가가 작품이 누락되거나 경질되는 것은 민주적 신문운영에 안타까운 일이고 작가에게 폭력적인 처사일 망정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데스크, 나아가 신문사가 시사만화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견공유가 애초에 부족하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만화를 싣는 이유가 진지한 도발인지, 단지 글의 홍수 사이에 그림을 넣음으로써 가독성을 증가시키기 위함인지의 문제부터 말이다. 지면의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신문사 입장에서도 그 작품에 비용을 지불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며, 작가도 자기 이름을 걸고 연재를 지속할지 명확하게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표현력과 중도개혁성향의 정치적 시각을 통해서 작품으로서는 우수한 품질을 지녔으나 지면의 성격과 맞지 않아 결국 이별을 고했던 전 동아희평 손문상 작가의 만평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02년 4월, 손문상 화백은 일본 유학을 이유로 동아일보에 사표를 던졌다. 주변에선 논조와 방향 차이가 그 진짜 이유일 것으로 평했지만, 손 화백은 "할 말 없다."고 답했다. (참고: 프레시안, '동아일보 손문상 화백 돌연 사퇴', 2002년 4월 10일)
2002년 4월, 손문상 화백은 일본 유학을 이유로 동아일보에 사표를 던졌다. 주변에선 논조와 방향 차이가 그 진짜 이유일 것으로 평했지만, 손 화백은 “할 말 없다.”고 답했다. (참고: 프레시안, ‘동아일보 손문상 화백 돌연 사퇴’, 2002년 4월 10일)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작가에게 이런 선택이 중요한 것이, 한국에서는 시사만평이 워낙 2차 활용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날 그 지면에서의 연재가 해당 작품이 지니는 파급력의 거의 전부이지, 재활용으로 수익을 내거나 단행본으로 묶여서 히트를 친다든지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종종 하나의 이상적인 대안 모델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신디케이션’이다.

신디케이션이라는 신대륙의 허실

신디케이션, 즉 콘텐츠 구독 시스템은 한마디로 ‘비독점 라이센스 계약’이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면 여러 지면에서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그것을 가져가서 게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특정 지면 데스크가 작품의 내용에 대하여 압력을 행사하지 않게 되고 작품으로 나타난 작가의 실력이 곧바로 개제 지면수에 따른 수익이라는 상업적 성공과 연결되는 등 더욱 ‘작가’ 개념에 가까운 방식이 되는 것이다.

사실 신디케이션은 신문사 입장에서도 더 유리하다. 높은 호봉의 정규직 직원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며, 넓은 편집선택권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권자는 그날 나오는 여러 신디케이션 만화 콘텐츠 가운데 가장 적합한 것들을 골라서 게재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신디케이션 관행이 발달한 미국 신문만화의 경우가 편집권 관련 논의가 나올 때 종종 하나의 모범모델처럼 묘사되곤 한다.

찰스 M. 슐츠 (1922~2000)의 4컷 만화 [피너츠](Peanuts)의 등장인물.  전 세계 총 발행부수는 3억 이상이고, 75개국 2,600종 매체에 연재됐다.
찰스 M. 슐츠 (1922~2000)의 4컷 만화 [피너츠](Peanuts)의 등장인물. 전 세계 총 발행 부수는 3억 이상이고, 75개국 2,600종 매체에 연재됐다.

신디케이션의 폐해, 점점 더 전속 만화가 사라진다

하지만 정작 역설적으로 미국에서는 신디케이션에 따른 폐해가 오히려 지적되고 있다. 작가가 신문사에 적을 두는 경우를 ‘스태프 에디토리얼 카투니스'(Staff Editorial Cartoonist)라고 부르는데, 신문업계에서 이 직종이 점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2005년 현재 80여 명에 불과하다고 추산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데스크로부터의 편집권 독립이라는 당근 대신, 시장이라는 편집권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국 규모의 시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루는 소재가 전국 규모의 포괄적 이슈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지역 또는 전문 신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비한 한국은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뉴욕타임스나 시카고트리뷴 같은 저명신문도 사실은 지역신문인 미국 환경에서라면 이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역시 시장 무한경쟁에 직접 뛰어드는 것 자체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신디케이션과 고용직을 병행하는 작가라면 모를까, 신디케이션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300개 지면 정도는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1주일 구입비용이 30불까지 떨어졌고 더욱 하락 중인 저렴한 가격의 신디케이션 방식에 익숙해진 신문사들은 점차 정규직 만화가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 신디케이션 방식의 장단점은 과연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전국지 중심으로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독점 공급을 선호하는 문화다. 특정 우수 콘텐츠의 유치 자체가 이득이 되기보다는, 경쟁자가 가지지 못한 콘텐츠를 가지는 것이 이득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경쟁자로 하여금 해당 콘텐츠를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중요한 구도라는 것이다.

한국식 신디케이션 포털 사이트의 현실

한국식 신디케이션 문화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 포탈 사이트들을 한번 상기해보자. 2005년 당시 후발주자인 [파란]이 시장 선점자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한 조치는 바로 5대 스포츠신문 기사들의 독점공급, 즉 타 사이트로의 기사 공급을 차단하는 행위였다. 신디케이션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지면 종수가 많지 않다는 것도 이미 문제지만, 이런 식의 경쟁구도 역시 순기능 발현에 방해가 된다. (편집자 주: 파란은 2012년 7월 31일 24시 이후 사업을 종료했다. )

또한 질적 지속성의 문제 역시 제기된다. 신디케이션은 작가를 프리랜서로 만든다. 데스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뉴스룸의 도움 역시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뉴스 정보 수집과 분석의 과정이 온전히 작가 자신에게 떨어진다. 당연히 창작의 스트레스는 증가하면서도 시사 사건에 대한 대응속도가 그만큼 느려지고, 심층적인 내부 정보에 대해서 둔해진다.

특히 서로 비밀이 많고 정보 독점욕이 강한 신문사 간 경쟁 구도 속에서, 이미 뉴스화되어 공개된 내용만을 소스로 시사만화 작업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희생인 셈이다. 작가로서의 권한이 강해지는 만큼,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한국적인 신디케이션 모델을 만들어보고자 한다면, 이런 요인들이 반드시 극복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시사만화가로 먹고살기 위하여

미국의 유명 시사만화가 테드 랄(Ted Rall)이 한 신문사에 정규직으로 고용되기 위한 면접을 보던 중의 일화가 있다. 편집자가 창문 밖 주차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신문에 실린 당신의 만화를 보고, 저 주차장에 사람들이 피켓 들고 시위하러 오지 않도록 할 자신이 있습니까?” 테드 랄은 정직하게도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그 결과 고용되지 못했다.

The New Journalism, 테드  랄(2014년 2월 21일자 rail.com)
The New Journalism, 테드 랄(2014년 2월 21일 자 rail.com)

고용주 또는 자본주 입장인 언론사는 시사만화로 돈 또는 영향력을 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현 세계를 바라보는 소신을 강력하게 표출해서 여러 사람들을 도발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도출해 내야만 시사만화가의 작업은 지속을 보장받을 수 있다. 피고용인 입장이든 프리랜서 입장이든, 이해관계가 틀어져서 지면이 사라진다면 아무리 억울해도 도덕적 각성요구 이외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사만화가의 입장에서도, 그 언론 지면의 가장 속내를 드러내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만큼 그것에 따라서 지면을 선택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만평의 내용으로 독자들은 설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론사 자체를 내부에서 일깨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적 지분 확보?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독자를 우군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가가 자신의 작가적 지분을 더 많이 보장받을 수 있는 정공법은 결국 만화 자체를 더욱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게 혁신해서, 독자들을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자반응이야말로 상업적 이득과 여론 영향력에 대한 평가 잣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등을 통해서 독자반응 피드백이 활성화되어 있는 오늘날이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혁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전통적인 한 칸 카툰 양식을 버려야 한다든지 하는 과격한 이야기가 아니다.

"화두", 박재동(1995년 5월 27일자 한겨레)
“화두”, 박재동(1995년 5월 27일 자 한겨레)

다만 마치 88년 한겨레신문에 등단한 박재동 작가가 다양한 의제설정과 과감한 화법 – 칸 구분, 새로운 비유방식 등 – 으로 그 장르를 변화시켜서 90년대 이후의 새로운 경향성과 세대를 발명해냈듯이, 지금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는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필요한 새로운 이야기 틀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의제설정, 비유의 방식 등 모든 면에서 현재와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형식적인 측면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현재는 시사만화라는 장르 자체에서 수용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글의 홍수 속에서 시사만화의 존재 위상은 이미지의 홍수, 개인 창작물과 프로의 경계가 낮아진 사이에서 시사만화가 처한 위상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전통적 시사만화는 문자로 가득한 신문이라는 포맷에 맞추어, 그것도 사진 저널리즘이나 그래픽 디자인 개념이 들어간 지면편성이 도입되기 이전에 발달한 형태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데에 그치고 있다.

지면편성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은 물론, 언론 뉴스 소비의 패턴이 점차 신문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재와는 괴리가 있다. 의제설정이나 표현방식 등도 현재 대중 일반의 문화적 토대와 관심분야에 과연 맞추어 호흡해나가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볼 일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최적화된 새로운 시사만화 유형의 개발이 필요할 수도 있다. 촌철살인은 꼭 10 평방cm 한 칸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사형 시사만화의 대두

시사만화의 진화 과정에 있는 중요한 유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서사형 시사만화의 대두다. 사실 [고바우 영감] 같은 시사 4칸 만화를 이미 하나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박재동의 한겨레 시절 단편 작품들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90년대 말 이후에는 [한겨레21]에 연재된 조남준의 [시사SF], 포털 사이트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는 박철권의 [시사뒷북] 등 주간 연재 포맷에서 더욱 발전했다.

조남준, [시사 SF], 청년사, 2007. 현재는 '판매중지' 상태다.
조남준, [시사 SF](청년사, 2007.) 현재는 ‘판매중지’ 상태다.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서사형 이야기로 진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보다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재미를 주는 것이 가능하고, 이야기 소비가 매우 중요한 트렌드로 대두하고 있는 현재의 미디어 수용 패턴에도 잘 부합한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아예 고정 캐릭터가 펼치는 줄거리 있는 일종의 연속극으로까지 확대해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는 모델까지 새로 개발이 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사실 연속물 이야기로서의 자각은 대단히 효과적인데, 한 칸 카툰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중반에 큰 인기를 끌었던 한겨레그림판의 ‘돈오점수’ 시리즈의 인기를 상기해보라.

뉴스브리핑식 시사만화는 어떨까?

뉴스브리핑식 시사만화는 어떨까. 너무 뉴스가 많아서 도저히 모든 것을 소화하기 힘든 것이 오늘날의 모습 아니던가. 일주일 주요 뉴스, 또는 오늘의 주요 뉴스를 요약해서 알기 쉽게 알려주고, 그 속에 작가의 해석을 듬뿍 넣어 주는 것도 상당히 매력있는 모델이다. 혹은 하나의 사건만을 다루되 그것을 해학적으로 재해석하며 설명해주는 것도 좋다. 이런 양식은 경향신문에서 연재되었던 김한조의 [시사토크] 등에서 시도한 바 있다. 사실 글 형식으로는 여러 시사주간지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한데, 해학과 비유, 도발을 전문으로 하는 시사만화가 그 영역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사만화가 자신들의 융통성, 그리고 그 융통성을 뒷받침하는 실력향상이다. 한 칸 카툰과 장편 서사를 같은 수준으로 작업할 수 있는 구사능력 개발 정도는 기본이다. 특정 지면에 안주하고 그 자리의 틀에 고착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 자체를 관철하기 위해서 그 지면과 손을 잡는다는 식의 발상을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겨레에서 한 칸 카툰 만평을 하면서 [조선왕조실록] 단행본 작업(뉴스툰 연재)을 진행한 박시백 작가의 경우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대중 예술 작가의 소양

시사만화가는 작가와 언론인의 소양을 겸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 속에서 작가로서의 권리, 그리고 언론인 – 정확히는 언론사라는 조직에 속해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저울질해온 것이다. 하지만 상기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작가’는 순수예술가로서가 아닌 대중예술가로서의 작가개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표현 자체의 완성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파급력과 성과를 우선시하는 목적론적 관점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시사만화가는 발언을 통해서 여론을 만드는 언론인이자, 스스로 브랜드 가치를 창조하는 대중연예인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해내야 한다. 시사만화의 발전을 위해서 진짜로 필요한 것은, 시사만화가 매력적인 콘텐츠로서 좋은 돈벌이 수단이 되어주며 그 자체로서 영향력을 발휘, 그 결과 다양한 지면을 확보하는 것이다. 짧게 이야기해서 ‘히트를 치는 것’이다. 하나의 브랜드로서 성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든 싫든 대중문화 비즈니스, 시장경쟁의 세계에 입성한 것을 환영한다.

관련 글

첫 댓글

  1. 그들은 괴롭지만 읽는이는 아무생각없이 즐겁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