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대표하는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미국의 인종주의 단체이자 신흥 극우주의 음모론 사이트인 큐아논(QAnon)의 계정에 대한 전면적인 차단 조치를 내렸다. 페이스북이 먼저 10월 6일에 큐아논 관련 계정을, “설사 그 안에 폭력적인 내용이 들어있지 않더라도” 전면 폐쇄하겠다고 결정했다. 뒤이어 유튜브도 10월 15일 자로 음모론을 담은 동영상에 관해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였다(하지만 유튜브는 전면적으로 폐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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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아논'(QAnon)?
- ‘큐아논’은 미 민주당 유력인사와 유명인들을 ‘딥 스테이트'(Deep State)의 하수인으로 보고, 도널드 트럼프를 이에 맞서 세계를 구할 메시아로 여기는 ‘음모론’ 집단과 그 집단의 이론을 총칭한다.
- 큐아논 음모론의 뼈대는 ‘딥 스테이트’들은 영생을 위해 아이들의 몸에서 특수한 물질을 뽑아내며, 이를 위해 아이들을 인신매매한다. 아이 납치를 막기 위해선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며, 이는 ‘백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는 백인 우월의 인종주의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 뉴스위크의 2020. 10. 21. 자 보도에 의하면 ‘트럼프 지지자는 단지 17%만 큐아론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는 야후 온라인 조사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만큼 트럼프 지지자들이 큐아론 음모론을 믿는다는 조사 결과인 셈이다. (이상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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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대표적인 트럼프 대통령 지지 사이트로 한창 주목받는 단체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이례적이다. 또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증오발언, 혐오발언)와 관련된 미국 내의 여러 제도들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것과는 사뭇 이질적인, 대단히 강경한 태도이기도 하다.
차단은 환영… 하지만 혐오세력은 진화한다
페이스북과 유튜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환영할 일이다. 많은 분석가들과 보도들이 이미 큐아논 사이트가 대단히 ‘군사화’된 극우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무서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이들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적대적인 인종주의 메시지를 담은 인터넷 밈(Internet Meme: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대중적 콘텐츠)과 동영상을 집중 유포하였다.
인종 문제에 관해 매우 모호한 입장을 가진 트럼프 후보 진영의 유력 정치인들이 이 사이트를 지지하고, 여기서 유래한 밈과 동영상을 적극 퍼뜨리는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사태가 한층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지적되던 와중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를 그치기 어렵다. 이슈 자체가 진화하면서, 이제 위험 역시 과거와는 다른 한층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가 이런 사이트에 대한 선제적 제재 조치를 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 조치가 최종적이고 확고한 것일 수도 없다.)
이미 많은 Q 지지자들은 각종 우회로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페이스북에 올리는 방법을 충분히 시도하고 또 숙달된 상황이다. 다소 완화되었지만, 지지자라면 금세 알아볼 수 있는 표현법을 사용한 콘텐츠—이른바 ‘파스텔 큐아논(pastel QAnon)’ 콘텐츠—가 헬스 커뮤니티나 심지어 아동 콘텐츠 커뮤니티를 통해 퍼져 나가기도 한다.
진화하는 혐오세력, 기술만으론 해결할 수 없어
기술적 가능성으로 단순히 선제적 조치만을 취하는 것으로 ‘헤이트 스피치’를 둘러싼 모든 쟁점을 해결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아마도 당분간 혹은 오랫동안 우리는 이들 극우 사이트의 지지자들이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알고리즘과 어떻게 경쟁하여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를 구경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술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어야 할까? 만약 그 때가 되어 혹시 페이스북이나 유튜브가 더 이상 대중들에게 흥미로운 공간이 아니라면 그때는 또 어찌해야 할까? 다시 텔레그램이나 위쳇을 응원하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혐오표현의 확산이라는 시대적 쟁점을 앞에 놓고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과연 얼마나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해결의 방향을 옳게 설정하고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이지, 결코 어느 한 영역의 노력으로 해결될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완벽한 기술도 이용자들의 ‘창의적인’ 우회로를 차단할 수 없으며, 어떤 완벽한 법률도 이를 뛰어넘는 정치적 의지를 제어하지는 못한다.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시장'(free market of ideas)의 원리를 신봉하는 미국 사회의 법제를 ‘모범’적인 범례로 인식한다면,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전체 사회의 노력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에 관한 좀 더 섬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미국 모델이 옳으냐 그르냐, 기술로 이를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식의 단순 논리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언론과 관련된 다양한 입법, 가짜뉴스의 문제나 혐오표현의 문제 모두에 걸친 제도적 개입의 장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숙고해야 하는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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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박진우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장(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입니다. 언론인권센터는 언론보도 피해자 상담 및 구조, 정보공개청구, 미디어 이용자 권익 옹호, 언론관계법 개정 활동과 언론인 인권교육, 청소년 및 일반인 미디어 인권교육을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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