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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만에 ‘다시’ 전쟁: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기원 (상)

2019년 8월, 나는 캅카스 산맥 남쪽의 내륙 국가 아르메니아에서 시작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도는 여행을 했었다. 귀국 전 마지막 종착지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였는데, 이곳에서 머물면서 나는 우연히 아제르바이잔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었다.

아제르바이잔어와 유사한 터키어를 어느 정도 배웠기에, 러시아어와 터키어를 쓰면서 말하니 그들은 아주 기뻐하며 내게 차와 대추야자를 대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캅카스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다”라고 하니 그들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어디 어디를 돌았냐고 물어왔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여행했다”하니 그들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캅카스에 가면서 아제르바이잔 같은 훌륭한 여행지를 두고 왜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나’ 여행했나? 다음엔 꼭 아제르바이잔에 가보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상 위치와 주변 국가들

코카서스(캅카스) 3국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주변 국가들 (출처: 구글지도)

아르메니아인에겐 ‘아르차흐 해방 전쟁’

사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감정이 서로 극도로 나쁘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여행에서도 이미 이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소련 시절 제2차세계대전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활약을 기리는 박물관의 1층은 ‘아르차흐 해방 전쟁’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기념하는 사진과 자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아르차흐 해방 전쟁은 소련이 해체될 무렵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벌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1988.2.20-1994.5.16)을 아르메니아에서 일컫는 표현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 이 전쟁을 ‘해방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소련 시절 행정구역 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되어 있었지만, 인구 구성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당한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되찾은 것이었던 셈이다. 실제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는 대승을 거두며 아르차흐를 ‘해방’시켰다.

아르메니아 박물관에 전시된 아르차흐 해방 전쟁 사진 자료들 (사진: 임명묵)

어머니 아르메니아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아르차흐 해방 전쟁’ 사진 자료들 (사진 제공: 임명묵)

반면 아제르바이잔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정당한 주권 국가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탈하고, 해당 지역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모두 내쫓은 아르메니아의 침략 행위였다. 이 전쟁이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나는 2019년에 그 깊은 감정의 골을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던 일은 1년만에 훨씬 심각한 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다시 포성이 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국가는 어쩌다가 자그마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이토록 오랫동안 으르렁대게 된 것일까? 이 문제는 생소한 지명과 복잡한 역사, 그리고 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때문에 배경을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지리와 역사를 통해서 실마리를 잡을 수는 있다.

갈등의 뿌리, '나고르노-카라바흐'

갈등의 뿌리, ‘나고르노-카라바흐’

문명의 경계, 문명의 교차로 ‘캅카스(코카서스)’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이 속한 더 넓은 지역적 단위인 ‘캅카스’(러시아어: Кавказ, 영어: 코카서스, Caucasus)에 대해서 개괄할 필요가 있다. 캅카스는 러시아, 터키, 이란이 교차하는 지역을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의 이름이다. 이 산맥은 해발고도 5,642m를 자랑하는 유럽 최고봉의 엘부르스산이 있는 산맥이자 4,000m가 넘는 고봉이 즐비한 험준한 산맥이다.

유럽의 최고봉(5,642 m), 엘브루스산

유럽의 최고봉(5,642 m), 엘브루스산

고대부터 유명한 문명의 교차로였던 이곳은, 서쪽으로는 흑해를 통해 발칸 반도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카스피해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이어진다. 북쪽에는 남러시아의 드넓은 초원 지대가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터키와 이란으로 연결된다. 수많은 상품이 교차하는 중요 교역 결절지이자, 인접한 제국으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핵심 관문인 캅카스를 역사 속의 여러 이름 높은 제국들이 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험준한 산과 계곡을 끼고 있던 이 지역의 민족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으니, 캅카스에서는 여러 제국의 군대가 부딪히고 제국과 원주민들이 부딪히는 험난한 역사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캅카스 사람들은 제국의 교차로라는 위치를 적극활용하여 인접한 제국의 중심지로 뻗어나가기도 했다. 그들은 여러 제국의 중심지들을 횡단하는 초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하기도 했고, 때로는 제국의 실력자로 올라 서기도 했다.

험준한 산으로 가로막힌 지형 때문에 캅카스는 언어와 민족 분포가 마치 모자이크처럼 굉장히 복잡한 것으로 유명한 땅이기도 하다. 거기에 교차로라는 특성 때문에 여러 민족들이 정착하면서 민족 분포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나마 간략하게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캅카스 지역은 산맥을 기준으로 북캅카스남캅카스로 나뉘는데, 북캅카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 여러 민족이 어지럽게 분포해 있고, 북쪽에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의 인구도 많다. 소수민족 중에는 무슬림들이 많으며, 러시아와 참혹한 전쟁을 치렀던 체첸 공화국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 그밖에 다게스탄, 오세티야, 잉구셰티야 등의 여러 소수민족 공화국이 존재한다. 반면 북쪽에 비하면 남캅카스는 산맥보다는 평원이 더 많아서 상대적으로 지리적 연속성이 높고, 인구도 많은 편이다.

캅카스 지역의 민족 집단과 언어 집단를 분류한 지도. 캅카스 산맥(위 지도의 갈색선)을 경계로 북캅카스가 남캅카스보다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2009, 퍼블릭 도메인)

캅카스 지역의 민족 집단과 언어 집단를 분류한 지도. 캅카스 산맥(위 지도의 갈색선)을 경계로 북캅카스가 남캅카스보다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2009, 퍼블릭 도메인)

코카서스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따라서 이 지역 민족들은 부족 생활을 해온 북캅카스 사람들보다는 오랜 기간 지속 되어온 국가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북캅카스는 여전히 러시아의 영토인 반면, 남캅카스의 세 민족은 소련이 성립할 때도 독자적인 공화국을 인정 받았고, 소련이 붕괴할 때는 독립까지 할 수 있었다.

각각 서쪽부터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그들이다.

이 중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과거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인근 무슬림 국가 사이에서 종교와 민족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아제르바이잔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목 부족을 그 기원으로 하여 국가를 형성해온 역사는 짧지만, 그들 역시 오늘날 이란의 모태가 되는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기도 한 강력한 민족이었다.

코카서스 3국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다룬 책 (코카서스 3국의 역사와 문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숨겨진 매력 허승철 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1월 20일)

코카서스 3국을 다룬 책 (코카서스 3국의 역사와 문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숨겨진 매력, 허승철 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

남캅카스, 유전과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다 

캅카스의 근대사는 19세기 러시아가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서구화 개혁을 성공시킨 러시아는 남쪽의 오스만 제국과 가자르 제국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캅카스 전역을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북캅카스의 산악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치열한 혈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군은 최종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 지역의 장악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캅카스의 역사에서 러시아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시작하면서 캅카스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도 하에 남캅카스를 횡단하며 흑해와 카스피해를 이어주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산업과 도시가 발전했다. 특히 1870년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원유 생산이 폭증하고 석유 붐이 시작되면서 캅카스 전역은 막대한 변화를 겪었다. 바쿠는 캅카스 각지에서 노동자가 몰리는 산업 중심지가 되었고, 바쿠에서 출발한 송유관은 흑해에 면한 조지아의 바투미까지 뻗어 유럽 각지로 석유를 수출했다.

바쿠의 조로아스터 사원 굴뚝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길을 묘사한 그림 (1890~1907, 위키미디어 공용)

바쿠의 조로아스터 사원 굴뚝이 불길을 뿜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1890~1907, 위키미디어 공용)

바쿠 지역 유전에서 불과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 (1875 - 1900, 작자 미상)

바쿠 지역 유전에서 불과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 (1875 – 1900, 작자 미상)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이고 전제적인 통치는 이 지역에서 불만에 찬 노동계급과 토착 지식인들을 성장시켰고, 캅카스는 얼마 안 가 러시아 제국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그중에는 조지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신학교에 다니며 사회주의를 접한 청년인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도 있었는데, 이 청년은 훗날 세계의 절반을 통치하는 절대자, 스탈린이 되었다.

스탈린(1879-1953)은 코카서스 3국 중 하나인 조지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절대자 스탈린(1879-1953)은 코카서스 3국 중 하나인 조지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피지배 민족 갈등 부추긴 러 제국의 통치기술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 정부는 전제적 통치를 강화하고 러시아 민족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롭게 형성된 지식인과 도시민들이 제국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정책은 피지배 민족과 러시아 정부의 갈등보다 더욱 인화성이 큰 다른 문제에 불을 지폈으니, 바로 제국의 통치를 받는 피지배 민족 간의 갈등이었다.

러시아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아르메니아인이나 아제리인(아제르바이잔인)을 우대하곤 했는데, 이 정책이 두 민족 간의 반목을 지속적으로 부추긴 것이다. 원래 러시아는 무슬림인 아제리인을 통치하기 위해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신뢰할만한 민족이라 간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을 적극 기용했었다. 이 정책으로 아제리인들의 불만이 쌓이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더 나아가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다음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내쫓고 아제리인들을 기용하는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아르메니아의 국장 vs. 아제르바이잔의 국장 (각각 1994년, 1992년 제정)

아르메니아의 국장 vs. 아제르바이잔의 국장 (각각 1994년, 1992년 제정)

문제는 캅카스에서 민족 문제는 다른 지역의 민족 문제보다 특히 인화성이 높았다는 데 있었다.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은 물론이고, 수없이 많은 민족들이 같은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뚜렷한 경계 없이 서로의 땅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일이 흔했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서 아르메니아인은 아제르바이잔 땅에 건너갔고, 아제리인은 아르메니아 땅으로 이주해 정착하곤 했던 것이다.

두 민족은 대개 제국 정부의 지배 아래에서 공존해오긴 했지만, 이주가 더 활발해지고 도시 공간에서 두 민족의 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갈등의 빈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갈등은 민족 갈등을 억제하는 제국 권력으로 억제되고 있었지만, 그 통제가 약화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족 갈등의 폭발, 피의 일요일(1905)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광범위한 저항 운동이 벌어지면서 제국 정부의 통제력이 일시적으로 상실되자 마침내 갈등이 표면 위로 분출했다. 1905년에 조용하던 캅카스는 갑작스럽게 각종 혁명 활동의 온상이 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치안 능력이 일시적으로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민족 간 갈등을 억누를 통제력도 공백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게 서로 불만을 갖고 있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리인이 바쿠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대거 충돌했다. 혁명을 진압하고 통제력을 회복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사건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이미 피를 봐버린 두 민족 사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질 두 민족의 유혈 충돌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1917)을 이끈 핵심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피의 일요일' 사건(1095).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하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은 제정 러시아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진압됐고, 이 과정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러시아 혁명(1917)을 이끈 핵심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피의 일요일’ 사건(1095).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트에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하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은 군인과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됐고, 이 과정에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1차 대전…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불신

그러나 1905년의 충돌은 그 뒤에 이어질 진정한 비극과 대혼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14년, 캅카스에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터키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붙게 되자 갈등의 수위가 갑작스럽게 치솟아버린 것이다.

이 문제는 오스만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 이래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영토를 상실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인 이스탄불마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설파해온 러시아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러시아의 1세기에 걸친 정복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을 왔는데, 이 과정도 질병과 기아로 얼룩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 소수민족에 대한 불신을 자극했다. 과거 제국의 전성기에 오스만의 무슬림 지배층들은 이런 기독교 소수민족들에 많은 관용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제국이 쇠퇴하고 영토를 계속 상실하게 되니 그런 관용을 유지할 인내심은 바닥 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제국의 기독교인들이 유럽 각국의 정부, 기업, 선교사와 긴밀한 교류를 통해 상업, 무역, 금융에서 크게 성공하고 다수 무슬림들보다 부유해지기 시작하자 불신은 적개심으로 바뀌기까지 했다. 그리스인, 레바논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제국의 기독교도’였다.

이미 전쟁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는 이런 갈등이 표면화되어 기독교인에 대한 여러 학살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과 다시금 전면전을 치르게 된 1914년에는 이런 불신과 적개심이 최대한으로 치솟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청년튀르크당 지도부에서는 러시아와 접경한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편에 가담해 제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초유의 강제이주 결정으로 이어졌다.

청년튀르크당의 선전지(1908). 터키어와 프랑스어로 '조국 만세, 국가 만세, 자유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개혁적 군사집단인 연합진보위원회(일명 ‘청년튀르크당’)의 선전지(1908년). 터키어와 프랑스어로 ‘조국 만세, 국가 만세, 자유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적이고 법치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어서 튀르크인은 물론이고, 아르메니아인이나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훗날 탈라트 파샤가 집권하면서 청년튀르크당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민족 문제로 보고, 이들을 자신의 터전인 아나톨리아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23)과 러시아 제국의 몰락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영토의 반도) 동부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을 강제로 이주하는 계획은 표면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적대적 열강과 인접하지 않은 후방의 시리아로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식량이나 물도 제대로 주지 않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사막으로 내쫓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오스만 군대나 지역 민병대의 조직적 학살이 이루어졌다. 아비규환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강제 이주와 학살의 과정에서 100만에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학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다스리던 서부 아르메니아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된 채 그 오랜 역사적 기반도 뿌리 뽑히게 된다. 이 학살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기억에 깊숙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학살사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오스만 제국이 소수 민족이나 변두리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이주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학살사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23). 오스만 제국(‘터키제국’)이 소수 민족이나 변두리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강제 이주를 시행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통칭은 통일파, 이른바 청년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 전부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한 곳(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서 있던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됐다.

서부 아르메니아를 뒤덮은 폭력은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을 버티지 못한 러시아 제국이 1917년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전이되었다. 전국적 무정부 상태가 펼쳐진 것은 물론, 국경 지역에서는 외국군의 진주와 간섭이 이어졌다. 혼란은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가 국내의 반혁명 세력 소탕에 집중하고자 그전까지 싸우던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토를 넘겨주는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을 체결하면서 더 심해졌다.

남캅카스의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은 이 틈을 타 자캅카스 연방(1918년 4월~5월)을 세우며 독립했는데, 자캅카스 연방은 세 민족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기에 이른다.

'잠깐' 자캅카스 연방에 속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는 곧 분리 독립한다.

‘잠깐’ 자캅카스 연방에 속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는 곧 분리 독립한다.

막강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이런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던 오스만 제국군은, 영국과의 싸움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캅카스로 진출, 바쿠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군에 의해 다시금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하는 등 무정부 상태와 외세 개입으로 캅카스는 총체적 혼란에 빠졌다. 캅카스의 오스만군은 제국 본국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케말 파샤가 연합국의 터키 분할 시도에 맞서 봉기하는 등 오스만 본토가 혼란에 빠지면서 곧 철수하였으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세 곳의 ‘점이지역’과 ‘연결’ 본능   

이런 배경 속에서, 양 민족 간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사실상의 전쟁에 돌입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각기 군대와 민병대가 조직되어 상대방을 향한 전쟁에 나섰다. 오스만 땅에서 벌어진 일과는 달리, 두 국가가 서로의 존재 자체를 전면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인이 사실상 구분되지 않고 섞여 살던 점이(漸移) 지역에서 벌어졌다. 양국은 이 점이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확보해야 향후 국경을 그을 때 더 많은 영토와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에는 점이 지역을 두고 군사적 충돌과 상호 간의 학살, 추방 등이 이어지면서 갈등은 계속해서 치열해졌다.

문제가 되는 점이 지역은 세 곳이었다. 서쪽부터 첫 번째는 나히체반으로, 러시아 제국 남쪽 끝의 자그마한 고원 지대에 불과했지만, 터키, 이란과 맞닿아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서는 아제리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나히체반을 감싸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점이지역인 잔게주르로, 남쪽 이란을 향해 회랑처럼 뻗어 있는 산맥 지역이다. 이 지역은 아르메니아인이 다수를 점하는 지역이다.

세 번째 점이 지역은 카라바흐 지역이었다. 카라바흐는 서쪽의 고지 카라바흐와 동쪽의 저지 카라바흐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곳이 바로 ‘나고르노-카라바흐’였다(나고르노는 러시아어에서 ‘산악 인근’을 의미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가장 껄끄럽게 만드는 것은 무슬림 아제리인들 거주지가 이 지역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는 데 있었다. 동쪽의 저지 카라바흐는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과 연결된 지역이었고, 서쪽에도 캘바자르, 라친, 쿠바틀르, 잔겔란으로 이어지는 무슬림 거주지역이 기다란 띠처럼 분포해 아르메니아 본토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분리시켰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정학적 위치(퍼블릭 도메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정학적 위치(출처: 퍼블릭 도메인)

지도를 보면 이 점이 지역의 상황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 지역의 인구 분포가 얼마나 어지러운지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제리인이 거주하는 나히체반은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잔게주르에 둘러싸여서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떨어져 있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리인 지역 한 가운데에 섬처럼 떨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이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입장이라면, 서로 각자의 월경지(越境地: 본토와 떨어져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 격리된 곳)를 본토와 연결해 영토적 단일성을 추구하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 전역은 물론이고 잔게주르 지역까지 점령하여 나히체반과 본토를 연결하고 싶어했다. 아르메니아는 최소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당연히 자신들이 가지는 것이고, 그 사이의 아제리인 거주 지역도 확보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본토와 통합해야 했다. 거기에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으로부터 잔게주르를 지켜내야 했고, 나아가 전략적 요충지인 나히체반까지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양국 입장에서는 두 민족이 어지러이 퍼져 있던 세 지역을 자신이 모두 차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쟁에 임했고, 역시 학살과 추방과 같은 비극이 계속 이어졌다.

붉은 군대의 진입(1920) 그리고 다시 연방으로  

폭력의 연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1920년에 자캅카스 지역에 진입한 붉은 군대였다. 신생 소련은 공산 혁명에 반대하던 백군을 물리치고, 과거 상실했던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속속 되찾는 중이었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중요한 것은 민족 갈등보다는 모든 민족이 노동계급의 기치 아래에 하나가 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었으니,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캅카스 삼국의 독립을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 지역을 접수한 소련은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을 설립해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가입시켰으며, 자캅카스 소비에트 공화국 전체를 소련에 가입시키면서 모스크바가 통제하는 행정 체계를 수립했다. 이제 각국은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의 하위 행정구역을 구성할 것이었다.

코카서스 3국은 다시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쳐졌다.

코카서스 3국은 다시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쳐졌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폭력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회복하는 와중에도 문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 중에서 소련 정권에 협조하기로 한 이들은, 모스크바를 통해 점이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고자 투쟁했다. 붉은 군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에서는 여전히 유혈 충돌이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욱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문제가 그저 더 큰 문제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문제가 한 데 섞인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문제는 아르메니아-조지아, 아제르바이잔-조지아의 경계 문제, 터키와 캅카스 3국의 경계 문제까지 끼어 있는 거대한 자캅카스 문제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소련와 터키의 ‘카르스 조약'(1921)

볼셰비키 입장에서는 이제 소련의 한 식구가 된 세 민족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그 세 민족과 터키의 이해관계까지 조율해야 하는 극도로 복잡한 일을 떠맡게 된 셈이었다. 볼셰비키는 캅카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한 그 해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에 캅카스국을 설치하여 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마침내 1921년 10월이 되어서야 소련은 터키와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최종적으로 캅카스 3국 사이의 내부 경계 문제소련-터키의 국경 문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꼬일 대로 꼬여 있어서 해결이 불가능한 것 같았던 경계 문제를 소련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요소는 소련 정권이 캅카스 민족들을 무력으로라도 통제하여 협상안을 강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비록 억압적인 방법이었지만, 어쨌든 당장의 유혈 사태를 종식시키고, 양자 모두 불만족할 수밖에 없는 평화안을 추진해 갈등을 봉합할 수는 있던 것이다. 치열한 협상과 숱한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1878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서 획득한 영토는 터키에 반환한다. 단, 바투미 항구는 조지아에 귀속시킨다.
  2. 나히체반은 자치 공화국을 설립하여 아제르바이잔에 귀속시킨다.
  3. 잔게주르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킨다.
  4.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자치 공화국을 설립하여 아제르바이잔에 귀속시킨다.

볼셰비키가 이런 결정을 한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서구 자본주의 세력과 갈등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된 소련 입장에서는 과거에 적국이었던 터키와 최대한 우호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소련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에 새롭게 수립한 케말 정권을 민족적 자본가와 지도자들이 주도한다고 판단했으며, 터키가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상호 협력할 여지가 많다고 보았다. 그 일환으로 소련은 터키의 요구사항을 일정 정도 수용하여, 1878년에 획득한 영토를 반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터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경계 조정에도 관여하고 싶어했다. 특히 터키는 나히체반을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되는 것을 원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명했는데, 이는 터키가 같은 튀르크 국가 아제르바이잔과 경계를 조금이라도 맞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히체반이 아제르바이잔에 속한다면 터키는 나히체반과 공유하는 자그마한 접경 지대를 통해 아제르바이잔과 이어질 수 있었다. 나히체반에는 안 그래도 아제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볼셰비키는 이 결정을 들어주었다.

카르스 조약(1921)을 통해 터키는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소련으로부터 돌려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터키는 나히체반을 아제르바이잔에 복속하길 요구해 같은

카르스 조약(1921)을 통해 터키는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지도의 붉은 색)를 소련으로부터 돌려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터키는 나히체반을 아제르바이잔에 귀속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명했다. 그렇게 터키는 ‘같은 튀르크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접경 지대'(지도의 붉은 화살표)를 만들어 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4.0)

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문제는 나머지 지역이었다. 나히체반이 민족적 분포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에 속한다면, 잔게주르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에 속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나히체반과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거대한 지리적 이격이 생겨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적 통합성이 상당히 침해될 것이 분명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본토 사이에 있는 아제리인 거주 지역도 마찬가지로 문제였다. 만약 이 지역들을 모두 아르메니아의 손에 쥐어준다면,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는 모스크바의 조치가 아르메니아를 편애한다고 판단하여 격렬히 반대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나히체반과 아제르바이잔의 연결을 위해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인 잔게주르를 아제르바이잔에 넘겨준다면, 이번에는 역시 아르메니아에서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고민 끝에 당초 캅카스국에서 내린 결정은, 잔게주르는 물론이고 나고르노-카라바흐까지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잔게주르는 물론이고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다수 민족도 아르메니아였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적 통합성을 희생하더라도 민족 분포의 원칙에 입각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는 갑작스럽게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뚝 떼어서 아제르바이잔에 귀속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확인된 정설은 여전히 없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일각에서는 이것이 당시 캅카스에 파견된 스탈린의 의도라는 해석을 내세웠다. 이 해석에 따르면 당시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민족문제인민위원이었고, 그 자신의 고향도 조지아였기에 캅카스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하필이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을 견제하고자 했던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적 의중을 투영해 캅카스국을 압박했고, 그 결과 기존 결정과 반대로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민족 분포와 상관 없이 부당하게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일각에선 원래 아르메니아에 귀속하기로 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귀속하는 ‘뒤집힌 결정’에 스탈린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가설은 근거가 빈약하다.

그러나 이 가설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첫째, 1921년 시점에서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 하나이긴 하였으나, 기존에 진행되던 회의를 뒤집고 자신의 개인적 의사를 강요할 만큼의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둘째, 자신의 고향 조지아를 포함해서 모든 민족에게 가혹했던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을 편애하고 아르메니아에 구태여 불이익을 줄 만한 동기가 부족하다(그는 유대인을 더 특별히 싫어하기는 하였다). 셋째, 지역 지도자들과 터키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사안이 다른 설명 없이 며칠 만에 뒤집혔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뒤집힌’ 결정의 이면: 볼셰비키의 셈법   

갑작스럽게 결정이 뒤집힌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귀속을 둘러싼 양측의 주장과 모스크바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민족 분포에 따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에 귀속되는 게 맞을지는 몰라도, 이미 존재하던 교통망과 경제적 연결은 아제르바이잔 측과 훨씬 더 큰 상황이었다. 예레반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직접 갈 수 없었고, 나히체반을 통해서 진입해야 했던 반면,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바로 동쪽의 저지 카라바흐와 더 긴밀히 통합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둘째, 모스크바에게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거래수단이기도 하였다. 당시 잔게주르에서는 험준한 지형을 끼고 볼셰비키의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반란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다른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런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고려했었고, 그중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게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게주르에서의 반란이 신속히 진압되면서 볼셰비키의 셈법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인을 특별히 더 달래줄 이유가 없다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귀속시킨 뒤 일정한 자치를 부여하는 방안을 선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더 많은 교류를 하고 있던 저지 카라바흐와 아제르바이잔에 성공적으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었고, 아제르바이잔과 나히체반의 이격도 그렇게까지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무슬림 지역 문제도 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산이 바뀌고 있는 가운데, 아제르바이잔 볼셰비키의 지도자 나리만 나리마노프는 캅카스국에 적극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카르스 조약의 기초가 될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나리만 (1913년 당시 모습)

아제르바이잔의 총리(1920. 5~1921. 5) 나리만 나리마노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권리를 주장한다.  (1913년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소련 체제하의 ‘평화’ 

여러 논란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의 결정은 빠르게 수용되었다. 이후 캅카스 지역은 소련 전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겪으면서 전체 연방에 긴밀하게 통합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망이 확충되었고, 각종 산업 시설이 들어서고, 새로운 개간지가 생겨났다.

이 지역 역시 당연하게도 스탈린 치하에 있었던 집단화와 숙청과 같은 비극적 사건을 공유했다.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땐 두 민족에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선으로 나가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 집단화와 산업화, 숙청, 전쟁 등의 기억을 통해, 그리고 모스크바가 제공하는 공통의 소비에트 국민 문화를 통해 소련 체제의 틀 속에서 다양한 민족이 공유하는 소비에트 정체성이 생겨나고 있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누구도 소련 체제의 견고함을 의심하지 못할 때, 소련은 여러 소수민족을 연방에 성공적으로 통합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 소련 당국의 새로운 교육 정책을 통해 민족 관료, 엔지니어, 지식인 등이 성장하여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엘리트가 되었다. 이들은 중앙 정부가 허락하는 선을 지키면서 고향에서 활동하거나, 아니면 연방의 중심지인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지로 이주해 전국적 명성을 떨칠 수도 있었다.

모스코바에 정착한 이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이가 많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소련 최고위급 정치인인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미그 전투기 개발자 아르티옴 미코얀, 세계적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얀을 배출했고, 아제르바이잔에서도 국민 가수인 무슬림 마고마예프와 시베리아 유전을 발견한 엔지니어 파르만 살마노프와 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아람 하차투리얀의 동상 (사진 제공: 임명묵)

아람 하차투리얀의 동상 (사진 제공: 임명묵)

한편으로는 두 민족 간의 갈등도 봉합되어 아르메니아의 아제리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랜 기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1997년 IBM의 인공지능 딥 블루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한 ‘인간 대표’ 체스 그랜드마스터인 가리 카스파로프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1963년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의 혼혈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계속 거주했다.

아르메이아인과 유대인의 혼혈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난 가리 카스파로프(1963년생)는

아르메이아인과 유대인의 혼혈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난 가리 카스파로프(1963년생)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소련 체제의 ‘이완’과 되살아나는 민족 갈등

그러나 민족 감정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소련 체제 하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것에 불과했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러시아 제국 시기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모스크바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되돌려달라는 아르메니아측의 요청과 절대로 그 요청을 허락해주지 말라는 아제르바이잔의 반대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구태여 이미 잘 정해진 행정구역을 변동 시켜 당내에 불필요한 위기를 초래하는 것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했던 모스크바는 언제나 아제르바이잔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65년에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거대한 집회가 열렸는데,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학살 50주년을 추모하고자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몇몇 이들은 터키가 빼앗은 서부 아르메니아 영토를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특기할 것은 카라바흐에서 온 아르메니아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귀속시켜달라는 내용의 시위를 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민족적 갈등과 불만이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두 민족 간의 갈등은 스탈린 사후 소련 체제가 점차 이완되면서 계속해서 불거졌다. 특히 브레즈네프 시대(1964~1982)에는 이런 체제 이완이 극심해져서, 모든 하부 기관들이 각자 독자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혼란이 심하게 퍼지고 있었다. 민족 갈등도 이에 속했고, 소련의 여러 지역에서 자신의 민족적, 파벌적 이익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그런 문제가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였다.

아르메니아인이 주도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에서는 계속해서 아르메니아로의 귀속을 요청하고 있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그런 노력을 체계적으로 방어하려고 여러 수단을 썼다. 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고대부터 아르메니아와 별 다른 연관이 없었다는 식의 역사를 창조하기도 했고, 아제리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주시켜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주도권을 희석시키려고 시도했다.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교통 연결 사업 등에도 아제르바이잔은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이런 모든 시도와, 멀리 떨어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 관해 보이는 모스크바의 무관심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모스크바의 통제가 흔들리면 언제든지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두 민족 간의 앙금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치(‘개방’)로 인해 정말로 불이 붙어버렸다. 지역에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개혁과, 그간 억눌려 왔던 목소리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개방이 겹치자, 소련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은 각자의 이익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일부는 아예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체제의 이완을 가속하면서 위성국가들의 민족주의 이슈를 다시 불붙게 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체제의 이완을 가속하면서 위성국가들의 민족주의 이슈를 다시 불붙게 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는 당연하게도 모스크바의 통제가 풀리자마자 아르메니아로의 귀속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88년에 아르메니아 측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통합을 소련의 입법부인 최고소비에트에 제의했다. 이에 대응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이탈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했고, 마침내 80여 년 전에 시작되었던 민족 간 유혈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소련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폭력 사태가 점차 통제 불능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완전히 무너지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최종적으로 독립하면서, 두 민족, 아니 두 국가는 이제 언제 서로 잘 지냈냐는 듯이 전면전에 돌입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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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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