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2022년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인근 골목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불과 몇 분 사이 159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20~30대 청년들이었으며, 외국인 유학생과 관광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태원 참사”라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슬픔의 사회 ― 제도의 침묵


“악은 종종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

더 큰 비극은, 그 죽음이 너무 빨리 ‘잊혀진 죽음’이 되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며칠간 추모 보도를 쏟아내다가 곧 정치적 논란과 책임 공방으로 초점을 옮겼다. 정부는 애도 기간이 끝나자마자 분향소를 철거했고,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은 “질서 유지를 위해 해산하라”는 경찰의 통제 속에 진행되었다.

이태원 이후 한국 사회는 슬픔의 언어를 잃었다. 애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드러냈다. 언론과 정부가 처음 사용한 단어는 ‘참사(disaster)’가 아닌 ‘사고(accident)’였다. 단어의 선택은 이미 정치적이다.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을 전제하지만, ‘참사’는 구조적 책임을 포함한다.

이태원은 명백히 예측 가능한 재난이었다. 경찰청의 사전 보고서에는 이미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예상된다”는 기록이 있었고, 현장 경찰은 연속적인 신고 전화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치 인력은 137명에 불과했다. 현장 통제도, 인파 관리도, 비상 대처 체계도 없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전 통제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언론은 ‘핼러윈 축제’, ‘외래문화’, ‘젊은이들의 일탈’ 같은 수사를 반복했다. 죽음은 사회적 불운으로 전환되었고, 책임은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았다. 언어는 책임을 은폐하는 장치가 되었다.

애도의 정치학 ― 슬픔을 결정하는 권력


“사회는 어떤 삶을 애도할 수 있고, 어떤 삶은 애도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주디스 버틀러, ‘전쟁의 틀’

모든 죽음이 동일하게 애도 되지 않는다. 세월호, 제천 화재, 구의역 청년, 이태원. 한국 사회의 재난들은 언제나 애도의 위계를 드러냈다. 세월호는 ‘국가 실패의 상징’으로 남았고, 비교적 긴 시간의 집단적 애도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태원은 달랐다. ‘핼러윈’, ‘청년의 유흥’, ‘외국 문화’라는 프레임이 그들의 죽음을 ‘공적 슬픔’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이태원 희생자들은 바로 그 ‘애도 불가능한 삶(ungrievable life)’의 경계에 놓였다. 사회는 그들을 ‘축제의 군중’으로, 혹은 ‘타인의 사건’으로 위치시켰다. 그들의 죽음은 인정되지 못했고, 따라서 애도도 허락되지 않았다.

재난 이후 국가는 애도의 주체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태원 이후 국가는 오히려 애도를 억압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광화문광장 분향소를 불법 시설물로 규정하고 철거 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분향소 앞을 차벽으로 막았고, 추모행진은 불법 집회로 규정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적 공방보다 희생자 추모가 우선”이라 말했지만, 정작 그 말은 정치적 책임을 지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수사는 슬픔을 비정치화하고, 슬픔의 주체를 무력화했다. 결국, 애도는 허락받아야 하는 행위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슬픔조차 제도적 허가를 필요로 하는 사회로 변했다. 슬픔의 표현이 곧 저항의 언어가 되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미디어의 이중기술 ― 기억과 망각


재난 이후 미디어는 언제나 이중의 기술을 구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기억의 장치’로 작동하며, 비극의 순간을 기록하고, 공동체의 슬픔을 공유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미디어는 그 기억을 일정한 속도로 소멸시키는 ‘망각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기억을 남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을 빠르게 소비하고 폐기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이태원 참사 보도는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사고 직후 언론은 며칠 동안 ‘슬픔의 포르노그래피’라 부를 만한 감정의 과잉을 쏟아냈다. 카메라는 유가족의 울음을 클로즈업했고, 희생자의 사진이 무차별적으로 노출됐다. 골목길의 국화꽃, 불 꺼진 상점, 흰 국화와 검은 리본은 하나의 시각적 장식처럼 반복됐다. 슬픔은 사회적 공감의 언어라기보다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감정의 연출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불과 보름이 지나자, 화면은 돌연 달라졌다. “이태원 상권 회복” “이태원, 다시 활기” 같은 제목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비극의 현장은 다시 ‘일상 회복’의 서사 속으로 흡수되었다. 슬픔은 완결된 사건으로 봉인되었고, 애도는 ‘끝난 일’로 간주되었다. 언론의 시선이 바뀌는 속도는 마치 ‘망각의 알고리즘’처럼 정교했다.

이러한 변화는 감정이 자본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보여준다. 미디어는 슬픔을 상품화하고, 공감을 콘텐츠화한다. 슬픔이 더 이상 수익을 창출하지 못할 때, 미디어는 재빨리 다른 감정을 판다. ‘감정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애도는 하나의 일시적 체험으로 전락한다. 시청자는 그 체험 속에서 잠시 울고, 분노하며, 안도하지만, 그 감정은 곧 다른 자극에 덮인다.

결국 애도는 ‘기억’이 아니라 ‘체험’으로 남는다. 체험은 즉각적이고 휘발성이 강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쌓이고 이야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지속된다. 그러나 오늘의 미디어는 그 느린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억’의 자리를 ‘경험의 소비’가 대체하면서, 재난은 다시 상품의 형태로 순환된다. 미디어는 기억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것을 잊는 속도로 작동하는 기계다.

디지털 애도의 모순 ― 연결과 망각의 동시성


“기억은 저장이 아니라 지속의 문제다.”
알레이다 아스만, ‘기억의 윤리’

세월호의 애도가 광장에서 이루어졌다면, 이태원 이후의 애도는 디지털로 옮겨갔다. SNS에서 해시태그 #1029memorial, 검은 리본 프로필, 추모 영상이 넘쳐났다. 하지만 디지털 애도는 빠른 확산과 동시에 빠른 소멸을 내포한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오래된 감정보다 새로운 트렌드를 우선시한다. 애도는 피드의 아래로 밀려나고, 기억은 스크롤의 속도에 따라 잊힌다.

SNS의 기억은 지속되지 않는다. 플랫폼은 새로운 감정을 판매하고, 오래된 슬픔은 ‘비활성 콘텐츠’로 분류된다. 디지털 애도는 공감의 도구인 동시에 망각의 기술이 된다.

희생자 다수는 20대였다. 이 세대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청춘의 시간을 통째로 억눌린 세대였다. 거리두기가 해제된 첫 번째 핼러윈, 그들은 잠시 자유를 누리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의 순간이 죽음의 순간으로 바뀌었다.

“근대화는 위험을 생산하는 체계다.”
울리히 벡, 위험사회

이태원은 바로 그 위험의 사회화를 보여준다. 국가의 시스템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고, 개인은 다시 ‘운명’의 시대에 던져졌다. 이 사건 이후 청년 사이에서 ‘국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감정이 일상화되었다. 그들은 다시 모이지 않는다. 축제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변했고, 공공장소는 불안의 공간이 되었다.

애도의 예술 ― 슬픔을 다시 말하기


“기억은 사회적 틀 속에서만 존재한다.”
모리스 알박스

그러나 이태원에는 그 틀이 없었다. 학교도, 직장도, 공동체도 없었다. 정부는 희생자 명단조차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존재를 지우는 일이다. 이름 없는 죽음은 역사 속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세월호의 학생들은 ‘단원고’라는 이름으로 남았지만, 이태원의 희생자들은 ‘사고 사망자’라는 행정 용어로 불렸다. 기억은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야기로 구성되지 못했다. 이태원은 한국 사회의 ‘기억되지 못한 비극’으로 남았다.

국가가 침묵할 때 예술이 말한다. 다큐멘터리 〈기억의 거리〉, 사진전 〈이름 없는 사람들〉, 시민의 글쓰기 프로젝트 〈1029, 기억의 편지〉 등은 비공식 기억의 아카이브가 되었다. 이 예술적 시도들은 슬픔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의 풍경’을 기록한다. 예술은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다. 감정의 윤리를 복원하는 시도다. 예술은 또한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만든다. 관객이 작품을 마주할 때, 그는 타인의 고통을 감당하려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리처드 세넷이 말한 ‘공공성의 윤리’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실현된다.

기억할 권리를 위하여 ― 제도화된 애도


한국 사회의 재난 대응은 언제나 사건 중심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적 회복은 ‘제도화된 애도(institutionalized mourning)’에서 시작된다. 애도의 제도화란 단순한 추모비의 설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기억의 윤리’를 어떻게 사회 구조 속에 새겨넣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 독일 베를린 ― 죄의 기억을 제도화하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독일 사회가 죄와 부끄러움을 공간으로 변환한 상징적 장소다. 회색 석비들이 불규칙하게 배열된 공간을 걷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수행이다. 기억은 반복되는 의례 속에서 제도화되고, 부끄러움은 민주주의의 근육으로 전환된다.
  • 일본 고베 ― 일상의 회복으로서의 애도: 1995년 한신 대지진 이후 조성된 고베의 메모리얼 파크는 붕괴된 부두 잔해를 그대로 보존했다. 시민은 그 잔해를 산책하듯 걷는다. 기억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일상 속에 통합된다.
  • 미국 뉴욕 ― 그라운드 제로의 ‘부재의 존재’: 9·11 테러 이후 세워진 ‘그라운드 제로 메모리얼’은 부재 자체를 기억의 중심으로 삼는다. 두 개의 깊은 낙수 공간은 사라진 빌딩의 자리를 표시하며,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이름이 새겨진 벽을 손끝으로 만지는 행위는 개인적 추모이자 시민적 행위다. 애도는 감정이 아니라 시민권의 실천으로 제도화된다.
  • 노르웨이 우토야 ― 교육으로서의 기억: 2011년 청소년 캠프를 향한 테러 이후, 노르웨이는 우토야섬 일부를 그대로 보존하고, 나머지 공간에 ‘학습센터(Learning Centre)’를 세웠다. 피해자의 기억은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 변환되었다. 기억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사회적 학습의 제도적 형태로 자리 잡았다.
  • 프랑스 파리 ― 바타클랑의 문화적 추모: 2015년 바타클랑 극장 테러 이후, 프랑스 정부는 사건 현장을 폐쇄하지 않고 복원해 공연장으로 다시 열었다. 이는 ‘공포에 굴하지 않겠다’는 문화적 애도의 선언이었다. 무너진 공간을 다시 공동체의 무대로 되돌리는 일, 그것이 프랑스식 기억의 정치였다.

잊지 않는다는 약속 ― 기억의 공공성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알레이다 아스만

이태원에는 공식적인 추모와 기억의 공간이 없다. 분향소는 철거되었고, 임시 추모 공간은 행정 절차 속에서 사라졌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기억의 제도화’ 대신 ‘관리의 논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애도의 제도화는 국가의 도덕적 의무이자 민주주의의 기본 인프라다.
이태원 현장에 상설 추모관을 세우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며,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애도할 수 있는 공공장소를 조성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국가는 생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 최소한 죽음을 기억할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재난 이후 자신을 재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이태원 유가족들은 여전히 광장에서 싸운다. 그들은 울기 위해 모이지 않는다. 기억하기 위해 모인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선언이다. 애도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행위다. 슬픔을 사유화하는 사회,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회는 결국 진실을 잊는 사회다. 애도를 억압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애도는 타자의 상실을 통해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주디스 버틀러

이태원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애도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 감정이다. 그것은 기억의 지속, 정의의 회복, 공동체의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태원은 우리에게 그 약속을 요구하고 있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다른 이름의 재난을 맞을 수밖에 없다.

관련 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