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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현대판 ‘헬롯(노예)’,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 야만과 폭력의 구조 벗어나려면…이주노동자 ‘정주권’ 부여해야. (서선영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5분)

지난 7월,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비닐에 묶인 채 지게차에 실려 나르는 영상이 공개되어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해당 28초 분량의 영상을 공유하며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 인권도 지켜져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번 나주에서의 사건 이후, 고용노동부 장관은 농가 현장을 방문해 ‘이주노동자 이름 부르기’ 캠페인을 제안했고, 법무부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은 서울과 경기에서 이주민을 대상으로 두 차례 현장 간담회를 여는 등 관계 부처들이 현장을 찾아가 목소리를 듣겠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지금까지 이주노동의 현장을 몰랐단 말인가?

2025년 대한민국 인권의 자화상. 이재명 대통령은 나주 벽돌공장 스리랑카 외국인노동자 학대 영상을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야만적 인권침해를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3340명의 죽음, 기초 정보 파악한 경우는 214명뿐

대통령이 공유한 이주노동자 집단 괴롭힘 영상은 공포와 모욕을 동반한 폭력 그 자체였다. 영상을 본 시민들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들은 수십 년 동안 이주민 노동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져 왔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망치로 머리를 맞거나,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히는 일이 흔했다. 관리자가 얼굴에 뜨거운 커피를 쏟고, 폭행으로 귀가 반쯤 잘린 채 응급실로 실려 가는 등의 사례는 이주노동자들의 증언 속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증언은 살아남은 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써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 현장을 증언한다.

지난 7월, 구미에서는 40도에 달하는 폭염 속 공사현장에서 베트남 청년이 앉은 채 숨을 거뒀고, 포항에서는 제초작업 중이던 네팔 노동자가 예초기를 멘 채 쓰러졌다. 김포의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는 야근 후 두통을 호소하던 미얀마 노동자가 의식을 잃었으며, 최근 화성에서는 네팔 청년이 기계를 청소하다 압축 롤러에 빨려 들어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만 3,340명의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참고로 이들 가운데 국적, 성별, 나이, 사망 원인, 사망 시점 등의 ‘기초 정보’를 파악한 경우는 214명, 산재 인정을 받은 경우는 137명에 불과하다. 편집자)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폭염이나 사고 같은 일시적 재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오랫동안 방치된 구조적 폭력과 착취, 차별이 빚어낸 비극이다. 이주노동 현장의 이 끔찍한 현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폭력과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을까?

임시 노동이주 체제와 구조적 폭력

대통령의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 발언 이후, 정부 관계 부처는 언론에 보도된 인권 침해, 임금 체불, 산업재해 사례를 개별적으로 처리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단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개별적 인권 침해로 축소하고, 그 책임을 특정 사업장이나 사업주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법·제도·정책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가려진다.

이것은 몇몇 사업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들은 ‘고용허가제’로 대표되는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이주노동정책은 처음부터 임시 노동이주 체제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왔다. 현행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국내 체류를 최대 4년 10개월로 제한하며, 가족 동반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이주민의 영구적 정착을 막고,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구조다.

하지만 이렇게 임시 체류만 허용하는 제도는 많은 이들을 미등록 상태로 내몰며, 가장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되게 만든다. 결국 이 정책의 본질은,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해 인력 부족을 메우고 자국의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데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노동력을 수탈해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오늘날 선진국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불러들여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이 착취 구조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임시 노동이주 체제다. 인간을 단순히 ‘사용가치’와 ‘노동 추출 가능성’으로만 평가하고,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민낯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임시적 존재

이주 및 디아스포라 연구자인 로빈 코헨(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국제이주연구소장)은 초과 착취 상태에 놓인 이주노동자를 고대 스파르타 사회의 노예인 ‘헬롯’(고대 그리스어: είλώται)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이들이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박탈당한 존재라고 지적했다.

즉, 국민국가의 시민이 아닌 경우 기본적 권리 보장이 제한되는 현실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과 시민권 획득이 불가능한 이주노동자는 ‘시민이 될 권리’조차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권리는 제한하고, 노동력만 추출하는 이주노동정책은 초과 착취를 구조화하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로빈 코헨이 말한 ‘현대판 헬롯’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는 다양한 형태의 제한된 임시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고용허가제 노동자(임시 체류만 허가되며, 체류 기간은 최대 4년 10개월, 가족 동반도 불가), 미등록 체류자(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는 법적 불안정 상태), 인도적 체류자(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임시적 지위), 계절노동자(단기간 노동 후 출국을 전제로 하는 고용 형태), 난민신청자(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불안정한 상태) 등이다. 이처럼 영구 정착이 제도적으로 차단된 이들은 모두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임시 체류자’다.

이러한 제도적 불안정성은 곧 노동현장에서의 안전 문제와 권리 침해로 직결된다. 부당한 업무지시, 위험한 작업환경, 차별적 대우 앞에서도 이들은 ‘거부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산업의 최하층에서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로빈 코헨이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현대의 헬롯들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수많은 산업현장 한가운데에 있다.

안정적 취업비자와 장기 체류권, 그리고 시민권

나주 이주노동자 인권침해 사건 이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단편적인 사안으로 다루지 말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제를 발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이 차별 없이,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으며,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문제의 근원부터 직시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인권침해는 단지 일부 사업장의 일탈이나 관리자의 악의적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국가 정책과 제도가 만든 구조적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이주노동력을 ‘임시 노동력’, 곧 소모품처럼 다루는 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장에서 권리를 말하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쓰러지고, 잊히는 현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정부 부처의 일회성 현장 방문 같은 전시행정이나 고용허가제 일부 조항의 미세 조정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제도의 뿌리를 바꾸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 진정한 변화와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20년을 한국에서 살다가 안정적 체류자격을 얻은지 4개월만에 산업재해로 숨진 고 강태완씨 장례식. 민주노총 전북본부

무엇보다 현행 고용허가제에서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사업장 변경 제한’이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열악한 처우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도 이주노동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고용허가제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임시 노동 이주 체제인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취업비자와 장기체류권, 나아가 시민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

아울러 짧게는 5년, 길게는 30년 넘게 한국 사회에서 일하며 지역의 일원으로 살아온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는 체류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들은 더 이상 ‘임시 체류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만약 이러한 정책적 재구성 없이 이주노동자 정주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결국 현대판 노예 `헬롯’을 단지 이 땅에 묶어 두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곧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한국 사회가 성장을 지속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주민을 단순한 경제적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이자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정책이다. 노동하는 이주민이 ‘권리를 가질 권리’를 회복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근본적 변화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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