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구함 01.] 비언론인 최초로 안종필 자유언론상 대상을 수상한 김보라미(변호사, 디케)가 아직 한글로 번역 출판되지 않았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책은 ‘프라이버시와 기술에 대하여'(다니엘 솔로브, On Privacy and Technology, Daniel J. Solove, 2025). (⌚6분)

오래전 일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촛불집회 과정에서 시작된 ‘조중동’ 보도에 대한 비판이 소비자의 광고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소비자 운동에 관여했던 활동가가 ‘보이콧 리스트’를 게시한 일 때문에 구속되었다. 주로 한 일은 이미 공개된 조중동 신문 광고주를 매일매일 공개한 일이었는데, 당시 이런 구속 선례가 없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구속된 분의 변호인도 아니었지만, 바람이라도 쐴 수 있었으면 해서 접견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 접견후 가족을 부양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정의감으로 목소리를 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구속까지 갈 일이었을까.

그즈음 인터넷을 공부하려고 접한 책 중 하나가 솔로브 교수의 ‘인터넷 세상과 평판의 미래’ (비즈니스맵, 이승훈 역, 2008.)’였다.

변화할 수 있는 능력과 두 번째 기회

솔로브 교수는 이 책에서 디지털 인터넷 환경 속 개인이 얼마나 고통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며 인터넷의 어두운 측면을 경고했다. 특히 첫 장에 등장하는 한국의 ‘개똥녀’ 사례를 통해, ‘공공장소에서 애완견 배설물을 치우지 않은 잘못은 있지만, 전 세계가 그녀를 개똥녀로 낙인찍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솔로브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과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변화하며,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넘어서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 기회가 필요하다. 프라이버시는 후회할 수 있는 과거의 행동과 결정을 뒤로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을 그 때에도 강조했었다.

떳떳하면 숨길 게 없다고? 프라이버시 축소 해석이 어리석은 이유

이후 그는 ‘프라이버시 이해하기(Understanding Privac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적용, 프라이버시 개념을 상향식(bottom-up)으로, 맥락과 뉘앙스를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라이버시는 법에 정의된 개념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숨길 것 없음(Nothing to Hide, Yale University Press, 2013.)’에서는, 구글 CEO 에릭 슈미트도 옹호해왔던 ‘숨길 게 없다면 감시를 걱정할 필요 없다’는 정부와 기업의 오만한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솔로브는 ‘숨길 것 없음’ 논리는 프라이버시 이론을 매우 축소해서 해석한다. 그것은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숨기려는 특정 개인들의 보호 이론으로 프라이버시의 영토를 부당하게 빼앗는다. 프라이버시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익의 총합이고 이는 결국 사회적 선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이를 축소 해석할 수는 없다고 솔로브는 지적한다.

프라이버시, 개인을 넘어 사회적 가치로

올해 출간된 ‘프라이버시와 기술에 대하여(On Privacy and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2025.)’는, 1996년 예일 법학대학원에서 잭 발킨(Jack Balkin) 교수의 사이버스페이스 법 과정을 수강하며 시작된 약 25년간의 프라이버시 연구 여정이 집약된 책이다. 기존 저서와 논문에서의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주장들을 만날 때마다, 십 년이 넘게 솔로브 교수의 저작물들을 함께 읽으며 경험했던 일들이 떠올라 반갑다.

그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고찰은 이미 과거 저술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온 것처럼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 가치로 확장된다. 솔로브 교수는 프라이버시는 사회적 가치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다른 사회적 가치로 인정되어 온 다른 목적들과 비교될 때 쉽게 버려져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며 표현의 자유와 비교하며 그 의미를 짚는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 원칙은 특정 사례에서 한 개인의 발언을 보호하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발언을 보호하는 사회적 가치로 광범위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저속하거나 어리석거나 하찮을지라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는데,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개인에 한정하지 않는 보편적 원칙으로서 사회적인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에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개별 사례에서 프라이버시 침해가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 보호는 프라이버시가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를 넘어 민주적 사회구조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공적 신뢰와 자율적 인간관계 형성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프라이버시와 그 적들: AI와 은유의 문제

그는 점점 위협받고 있는 프라이버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정보는 공공재’라며 프라이버시 없는 미래를 체념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지키려 했던 인간의 가치에 대해 기술 발전 앞에서 별것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서글프다. 솔로브 교수는 이러한 패배주의적 태도가 “규제 회피를 원하는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는 “기술의 복잡함과 속도, 힘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독인다.

현실적으로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매우 적극적으로 지난한 과정을 감내해야 하지만, 솔로브 교수는 이런 개인적 고통스런 노력만으로는 개인을 보호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진실을 밝힌다. 개인정보 처리 방침을 꼼꼼히 읽거나, 옵트아웃(선사용 후배제 방식의 정보주체 개인정보 보호 방식)을 클릭하고, 삭제를 요청해도 내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행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유럽연합의 개인정보보호법(GDPR)은 분명 빛나는 성취지만, 이를 모델로 한 다수 국가의 법률도 아직 충분하지 않고, 미국은 연방 개인정보보호법조차 없다. 각 주법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기술기업이 만들어낸 은유와 환상은 제대로 된 입법 과정에 심각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기술을 인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한다. 솔로브 교수는 “AI 알고리즘은 생각하지도 않고 지능적이지도 않다. 이들은 수학과 데이터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AI를 인간처럼 생각하며 학습하는 디지털 두뇌로 여긴다.”라고 은유의 문제를 상기한다.

테드 창, “인공지능이 아니라 응용통계학이다. 머신 러닝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배움은 상호작용이다. 의인화된 표현을 쓰는 건 잘못된 환상을 일으킬 수 있다.”

솔로브는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를 끊임없이 숙고해야 한다. 은유가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 수 있는 반면, 다른 문들을 닫을 수도 있다. 은유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권력에 대한 핵심 차원을 우리에게 숨길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은유가 메시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기술에는 인간의 편견과 결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기술기업이 강요하는 은유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피할 수 있다.

AI에 관한 은유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는 정부∙기업에 대한 ‘권력 제한’

이 책에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권력관계다. 개인정보 보호 역시 권력의 문제다. 기술기업은 감시를 통해 개인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체계적 식별로 그 권력을 강화한다. 또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와 책임을 준비되지 않은 개인에게 전가한다. 현실에서 권력은 권력에 의해서만 제어될 수 있을 뿐이다.

솔로브 교수가 지적하듯이, 프라이버시는 정부와 기업의 권력에 대한 제한을 상징한다. 개인정보는 결정을 형성하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그것은 큰 해를 끼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 동안 인류의 역사는 정부와 기업이 개인 정보로 일반 개인을 공격하고 신용을 떨어뜨리며, 차별하고, 부당하게 구금하고 제거하며, 억압적인 사회 통제에 이용한 예가 가득하다.

오래전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으로 구속됐던 그 평범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비자불매운동의 경계에 대한 법리적 논쟁은 결국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까지 이어졌다. 법리 다툼을 겪어야 했을 평범한 사람의 인생에 남은 상처는 쉽게 회복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권력화된 미디어에 맞선 힘없는 개인이 아니었다면 구속까지 되었을까. 솔로브 교수의 프라이버시와 권력에 관한 논증을 읽을 때 그때의 불합리함과 억울함을 함께 떠올렸다. 그 문제의 본질은 결국 권력의 불균형이었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던 기업은 감시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장본인이 되고, 1년도 되지 않아 오픈AI 역시 비영리의 사명에서 멀어졌다. 기술기업의 변덕스런 권력 앞에서 개인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법과 윤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일반 개인은 이런 현상에 익숙해져 갈 뿐이다. 솔로브 교수는 “우리는 키르케(Circe)의 음식을 열심히 먹고 그녀의 포도주를 마신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을 알지만 멈출 수 없다 – 음식은 너무나 맛있고, 포도주는 너무나 취하게 만든다”라고 감성적으로 표현했다(참고: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 부하들을 마법약이 담긴 포도주로 유혹해 돼지로 만든다. 편집자).

이러한 현실 앞에 솔로브 교수는 다시 민주주의 가치를 돌아보며 프라이버시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으며 이를 살리는 길은 정부∙기업에 의해 전복된 권력 관계를 시민∙소비자가 다시 회복하는 것임을 힘주어 외친다. 법정에서, 학계에서, 그리고 사회의 각 영역에서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계속 기술 발전에 따른 프라이버시의 사회적 가치 역시 함께 살펴봐야 한다. 프라이버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보라미의 ‘번역자 구함’

김보라미(변호사, 디케)의 이 서평은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미디어 후토크-번역자 구함’에 게재된 글을 퇴고하여 게재하였습니다. 뉴스레터 홈페이지에서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회에서 발행하는 ‘미디어후토크’ 뉴스레터 홈페이지에서 구독신청 및 지난 레터를 모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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