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 칼럼] 세 차례의 탄핵. 우리는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15분)

군중이 법치를 부정하고 법원에 난입하는 상황에서 한가한 고민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세 차례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경험이 쌓일수록 앞선 경험을 통해 이후 제도를 보완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텐데, 탄핵이 반복될수록 상황 자체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공격하는 비상사태로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스스로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1. 인민을 신뢰하는, 인민을 불신하는 민주주의

오늘날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정치제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불신당하는 정치제도이다. 어떤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국가(체제)가 대중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다시 말해 병사를 징집해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대중에게 시민권을 주는 정치제도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를 영속시키기 위해 자본과 공모한 국가가 언젠가 대중을 위해 일하는 정부를 합법적 선거로 수립할 수 있을 것이란 헛된 기대를 제공하는 체제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어떤 신중함도, 책임감도 가져본 적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투표권을 아무렇게나 행사할 수 있는 위험한 정치제도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민주주의는 수많은 우려와 걱정거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잠시 꽃을 피웠을 뿐 역사에서 오랫동안 망각된 제도였다. 20세기가 막 시작하던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상의 국가 대부분은 왕국과 제국의 형태였으며, 1941년까지 지구상에서 민주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는 11개국에 불과했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엔 전체주의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거나 파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말을 기준으로(유엔에 가입한 192개 국가들 가운데) 119개 국가에서 최소한 ‘선거 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부활은 1776년 미국 독립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엄청난 부자였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민주주의의 오래된 고민 – 어리석은 민중에 의한 – ‘다수의 독재’였다. A. 토크빌은 이런 고민의 흔적을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에 의한 상호견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유일하게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의 ‘사법’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법부는 다수의 독재에 대한 안전판이자 유럽식 귀족주의의 흔적이었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민주정체는 법률가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는 데 유리하다. 부유한 사람, 귀족 및 군주가 정부에서 배제될 경우 마땅히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법률가들이다. 국민들 수준보다 높이 솟아 지식과 지혜를 갖춘 유일한 계층으로서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 사실상 법률가들은 민주제도를 전복하려 들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의 본성과는 이질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 진정한 방향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들려고 언제나 노력한다. 법률가들은 태생과 이해관계로서는 국민과 같은 편이지만 습관과 취향으로는 귀족의 편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중에서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이지만 정작 민주주의는 항상 그 인민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 동시에 그 인민이 선출한 권력에 대한 의심과 견제에 기초해 왔다.

2. 권력자에 의한 셀프 쿠데타

법치주의(法治主義, rule of law, nomocracy)는 특정한 사람이나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같은 ‘폭력’이 아닌 ‘법’이라는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 통치의 원리를 뜻한다. 플라톤은 ‘철인에 의한 지배’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기에 ‘법의 지배’는 그 다음의 차선책이었다(그런 의미에서 『은하영웅전설』은 플라톤적인 딜레마를 담고 있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욕망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법의 지배’, 즉 ‘욕망 없는 이성의 지배’를 주장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욕망에 굴복해 스스로 ‘위대한 인간’으로 망상하는 자들이 종종 출몰해왔다. 그 중에서 이미 권력자로 성공했음에도 임기와 권력을 법적으로 제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이들이 더 큰 권력(독재)을 열망해 시도한 것이 친위(親衛)쿠데타였다. 어차피 ‘쿠데타(coup d’État)’란 말이 ‘국가에 대한 일격’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기에 ‘친위’란 한자어보다 영어 ‘self-coup’가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이미 합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장악한 측이 더 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불법적 수단으로 입법과 사법기구를 무력화시키는 ‘셀프 쿠데타’를 말한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이가 어째서 ‘셀프 쿠데타’를 일으키는가? 나폴레옹 시절부터 역대 정권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정치적 생명을 이어갔던 프랑스의 노회한 정치인 탈레랑은 “이 세상에서 권력과 이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라고 말했는데, 친위쿠데타의 가장 큰 원인은 권력자가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권력 강화와 권력 연장의 꿈을 내려놓을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카를 마르크스가 “세계사의 중요한 사실이나 인물은 두 번 반복해 나타난다. 한 번은 비극(tragedy)으로, 또 한 번은 희극(farce)으로.”라고 말했던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와 1851년 12월 그의 조카이자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가 친위쿠데타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폴레옹 3세 또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

두 사람 모두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나폴레옹은 민중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쳐들어온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명성을 쌓았고, 이를 명분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표면적인 명분은 혁명의 사수였지만, 혁명을 최종적으로 목 졸라버린 것은 그 자신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 정부와 노동자의 갈등을 배경으로 자신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적임자를 자부하며 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하던 의회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

그는 삼촌과 똑같은 방식으로 군대를 동원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째서 12월 3일 비상계엄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루이 나폴레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12월 2일은 삼촌의 영광을 기리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전기념일이었다. 이날 프랑스 국민들은 공민(公民)으로 잠들었는데, 눈떠보니 신민(臣民)이 되어 있었다.

1946년부터 2021년까지 대략 148건의 친위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부산에서 일어났던 ‘부산정치파동’ 역시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헌병 등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내각제를 추진하던 국회를 힘으로 무력화시켰던 친위쿠데타였다. 대통령 박정희의 1972년 ‘10월 유신’ 역시 행정․입법․사법 권력을 모조리 대통령이 차지하고, 스스로 임기제한 없이 종신 집권하려 했다는 점에서 친위쿠데타였다.

1972년 12월 27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제왕적인 종신 대통령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대통령 윤석열이 입으로는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지난 2024년 12월 3일, 현직 대통령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 활동을 불법적으로 중단시킨 뒤, 비상입법기구를 설치하려던 계획 역시 셀프 쿠데타였다. 제아무리 멍청한 권력자도 ‘권력 강화와 연장의 꿈’을 단지 군대의 무력에 의지해서만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 응축되어 온 내란의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도 꾸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누구를 위한 자유민주주의인가?

헌법재판에 나온 대통령 윤석열은 “저는 철들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특히 공직생활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란 신념 하나를 확고히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보수에게 ‘그냥’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여야만 한다.

말은 ‘자유’라고 하지만, 저 말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소유권과 그 권리의 행사에 대한 제한 없는 ‘경제적 자유’를 의미한다. 경제적 자유주의, 이른바 서구의 고전적 자유주의 정부 아래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부정당하고, 아동노동 등 극심한 노동 착취가 이루어졌던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지만, 한국의 보수에게 ‘자유’란 여기서 더 나아가 ‘반공’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유신헌법이 제정된 1972년의 일이었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말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들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하자던 시대로의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내란 상황을 전후해 출몰하고 더욱 강화되고 있는 ‘친미반공’의 목소리 “중국 정부가 한국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 중국 공안의 한국 경찰 내 암약설 등”은 1기 트럼프 정권 이후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는 미중 갈등을 배경으로 ‘반북혐중’ 감정과 만난다.

2017년 1월 21일 박사모 탄핵 반대 집회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문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어째서 민주주의와 경합하는가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란 ‘인민의 자기지배(통치)’를 의미하지만, 앞에 ‘자유’가 붙는 순간 민주주의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흡수통일에 대한 열망을 강화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 내부의 목소리에 대한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어 민주주의 자체를 축소∙훼손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약한 민주주의’이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기초는 “국가는 개인의 경제적 권리, 정치적 권리에 대해 되도록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보수주의이다. 에드먼드 버크와 알렉시스 드 토크빌로 대표되는 보수주의가 가진 기본적인 두려움은 ‘가난한 자들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오랫동안 자산 계급은 투표권이 기층민중에게 확대되는 것을 반대해왔다. 그러나 더 이상 투표권 부여를 막을 수 없게 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자 자유민주주의 이론은 부와 기득권의 엄청난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방어 논리를 개발해야만 했다.

자본주의하에서 능력껏 부를 축적할 권리(능력주의)는 기술, 능력, 창의성을 가진 개인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획득된 부와 자산은, 기술이나 능력이 있든 없든 다음 세대로 세습될 수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세습은 점차 한 사회의 생산 자원인 생산시설, 부동산, 자본, 천연자원과 신용에 대한 접근권을 통제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계급을 창출했다. 사람들이 그러한 불평등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들에 의해 민주적 결과가 좌우되는 부의 권력을 수용했다는 증거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말은 과거 제헌의회 시절부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공화국이란 말에는 “공화주의에 걸맞은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남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는 평등의 이상이 녹아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 오랫동안 지역 정서에 기생하며 유지되어 온 양당 체제는 더욱 강고한 진영이 되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평등과 진보의 목소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위축되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선거 때마다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한국에서는 시장에서 어묵을 사먹고, 유권자 앞에서 큰 절을 하는 누군가에게 주기적으로 투표하는 행위로 축소되었다. 서민은 더욱 가난해졌고, 더욱 부유해진 자들은 능력주의를 배경으로 갈등을 부추기며 더욱 대담해졌다.

어묵 먹는 이명박(당시 대통령). 2009년 6월25일 서울 이문동 골목시장. 청와대브리핑.
사이 좋게 떡볶이를 나눠 먹는 이재용(삼성전자 회장)과 윤석열. 2023년 12월7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 대통령실.

이런 와중에 재미있는 지점은 이념적으로는 매우 복고적인 주장을 펼치는 보수 세력이 대중 동원의 양상만큼은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 빈부 양극화에 맞서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태평양 건너 캐나다 퀘벡에서도 시민의 직접 행동에 의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바 있다. 퀘벡에서 시위자들이 경찰 저지선을 돌파했을 때, 권력자들은 그것을 민주적 법질서 위반이라 주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의 아스팔트 보수(‘약한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옹호하는 이)들이 누구보다 빨리 그들의 언어(‘강한 민주주의’의 언어), 예를 들어 ‘국민저항권’ 같은 개념들을 전유한다.

내란수괴 윤석열 옹호하는 극우 그룹을 대표하는 전광훈.

4. 법원 문 앞에서 멈추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 언어와 결합할 수 있지만, 자유주의 시민혁명 이래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 왔던 것은 ‘법치주의’이다. 그러나 불의한 권력에 의한 통치, 또는 합법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거나 권력의 정당성이 매우 약화된 국가, 국론이 분열된 국가, 실패한 국가에서 민주와 법치가 항상 일치해왔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법원 문 앞에서 멈추기도 하지만, 법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멈춰 세우기도 한다.

앞서 친위쿠데타의 몇몇 사례들을 살펴보았지만, 히틀러 역시 바이마르 헌법의 허점을 이용한 친위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 소유권의 의무성(사회적 책무)을 강조한 –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지만, 헌법 제48조에는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비상대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서 극좌파와 극우파의 군사적이고 모험적인 준동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히틀러와 나치의 법률가들은 바로 이 조항을 이용해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수권법’과 ‘민족과국가수호를 위한제국대통령령’ 등의 독재 조항을 만들어냈다. 법의 허점은 결국 법체계가 갖고 있는 논리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 체제에서 탄생한 역사상 가장 독재적이고 전체적인 히틀러 정권.

현재의 독일은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소조항들을 면밀히 검토해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26년간의 권위주의 군부독재를 경험한 한국 역시 1987년 9차 개헌에 따라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고 있다. 우리 법은 비상계엄 상황에서도 국회를 해산할 수 없으며, 비상계엄 상황에서도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지체 없이 해제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오랫동안 서로 긍정적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왕정 치하에서 정치적 자유주의가 당연한 진보였던 것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불법적으로 개헌을 하거나 법을 위반해 가면서 장기집권을 꾀하고 국민의 인권을 탄압한 적이 많았으므로, 민주화 운동의 목표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쟁취함으로써 한국정치에서 ‘넓은 의미에서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법치주의의 실현은 민주화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법치주의는 오랫동안 독재 권력(행정부 수반)으로부터 ‘입법’과 ‘사법’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기능해왔고,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법치주의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인권 신장 및 민주주의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반대세력들은 지속적으로 헌법을 동원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면서 두 정부를 공격했다.

2002년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선거 유세 중 승리의 ‘브이'(V)를 들어보이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 출처 노무현사료관.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였다.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는 당시 국정 최대 현안인 행정수도이전계획의 근거법인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물론 그 이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개혁을 시도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권 독점을 깨고자 했던 시도에 검찰 권력이 개혁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면으로(법치가 민주를 제약한) 충돌한 최초의 사례이자, 민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의 정책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린 사건이었다.

정치권과 사법부의 긴장과 갈등은 ‘민주주의(다수의 지배)’와 ‘법의 지배(소수의 지배)’의 충돌이다. 특히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에서 사법부의 법 해석을 통한 법의 지배를 문제 삼는 이유는 다수의 지배로서 민주주의를 표상하는 대통령의 직무상 활동이나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민주적 대표성이 결여된(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법부의 반다수결주의적인 결정에 종속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주적 정당성이 가장 결여된 권력이 사법부인 탓에 보수 세력은 누구보다 ‘법치주의’를 강하게 주장하고 옹호한다. 게다가 우리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은 물론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 등도 직무상 위법행위로 인해 탄핵 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탄핵제도 자체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미국의 경우 동일한 입헌주의 원리를 따르더라도 탄핵 심판을 헌법재판소, 즉 사법부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국민의 대표기관인 상원이 수행한다. 다시 말해, 국민적 대표성이 결여된 ‘반다수결주의적인 소수의 지배’(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라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상원의 다수 결정에 의한 탄핵 결정은 역시 하원과 달리 구성된 ‘다수의 지배로서 다수의 지배가 소수의 지배에 종속당한다는 불합리’함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삼권 분립에 의한 사법 권력의 탄핵 인용이 입법 권력인 상원의 탄핵에 비해 민주주의의 불안요소로 작동하지 않는 까닭은 정당과 국민 모두가 헌법 기관인 판사의 판결에 승복해왔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의 모습. 2016. 11. 19. 광화문. 옥토.

그러나 최근 정치적 진영논리가 더욱 극심해지며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설득이 사라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우리의 정치현실, 즉 대통령 대 국회, 여당 대 야당이 정치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기보다는 번번이 대립과 충돌을 일으켜 정국 경색이 나타나는 정치문화였다.

내란을 기도한 윤석열은 그렇다쳐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은 대통령의 행위가 중대한 위법행위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결국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가 실패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보수세력이 탄핵제도를 이용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탄핵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 탄핵의 첫 번째 문을 열었던 것은 보수세력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 주기와 국회의원 선거 주기가 불일치함으로써 대통령의 소속 정당과 국회의 다수당이 상이한 분할 정부가 자주 발생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제도 하에서 여야 상관없이 누가 대통령이 되던 임기 중 상당 기간 동안 입법 권력과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편으로 오랜 역사 속에 누적된 적폐를 5년 단임제 대통령이 단숨에 해소시켜주길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통령이 절대적 권한을 휘둘러 독재자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대중의 정치적 열망은 ‘노빠, 대깨문’ 등 이른바 ‘대통령 메시아주의’로 출현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이어 중간선거 격으로 치러지는 총선은 정작 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형태로 출현했다. 이는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결말이 입증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세 차례의 탄핵 경험과 서부지방법원 침탈 사건 이후 한국의 법치주의는 앞으로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어떻게 기능하도록 만들 것인가? 라는 고민이다.

1.19일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 당시 7층 판사 사무실을 발로 걷어차고 있는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 ‘특임 전도사’ 이 모 씨 모습. JTBC 뉴스 캡처.

민주화 이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적폐청산 내지 과거사 청산을 시도했지만, 그나마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것은 넬슨 만델라의 남아공 정도에 불과했다. 과거사 청산이 어려운 점은 비록 민주화를 통해 정권을 교체했더라도 오랜 세월 기득권을 누리며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여전히 그들의 강고한 권력을 온존시키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과거사 청산은 지지부진하고,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법과 제도를 이용해 그들의 안전과 권위를 보호받는 상황이 지속되면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법은 공유지에서 거위를 훔친 불운한 도둑을 잡아가두지만, 거위에게서 그 공유지를 훔친 더 큰 도둑은 활개 치고 다닌다.”는 민요가 있다. 이런 광경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스스로 체득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강자 편에 서고 싶어질 것이다.

위헌정당해산제도는 헌법에 내재된 가치 및 질서를 훼손할 목적으로 조직했거나 활동하는 정당을 헌법재판에 따라 해산하는 제도이다. 이는 1956년 경무대 공보실장이던 오재경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조봉암의 진보당을 해산할 수 있었던 경험을 거울삼아 4․19혁명 이후 만들어진 제도였다. 한국의 위헌정당해산제도는 이 제도에 따르지 않고서는 정당을 해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도리어 정당 설립의 자유에 대한 보호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제도를 통해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는 사건이 있었다. 과연 이 제도를 이용해 ‘국민의힘’을 해산할 수 있을까?

로보트 폴 볼프는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로보트 폴 볼프,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정치적 좌우를 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의 역사에서 운동이건, 체제가 되었건 상관없이 그 제도, 방식, 감성을 말할 때는 항상 ‘인민의 거대한 반란’에 경의를 표해왔다.

나치 역시 ‘인민’이 더는 무시될 수 없으며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 반대로 인민의 필요와 욕구가 인정되어야 하며 나아가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는 힘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체주의는 항상 대중의, 대중을 위한 통치이자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한 통치였다. 그런데 과연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정치인가?

아스팔트 극우가 국민저항권을 외치는 것이 낯선 경험이었던 것처럼 ‘법과 질서’를 우선해야 할 보수가 ‘법과 질서’를 공격하고, ‘민주’를 우선해야 할 진보가 ‘법과 질서’를 수호하자고 외쳐야 하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과거 권위주의 독재 시절의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를 수호하자, 권력자의 의지가 아닌 법대로 하자’는 주장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1.19 서울서부지방법원 극우 폭동 사태.

그보다 우리 헌법에 구현된 법의 정신을 최대주의로 실현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법치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를 안고 있는 보수정당이 앞장서 사법부를 공격하고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행태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이 반복될 때마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위상 자체가 격하되는 상황이 초래될까 그것이 두렵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기본 명제가 단지 말뿐이라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든 법률과 제도의 뒤에 숨어 모든 기회를 활용해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법이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다면, 그때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위기가 시작될 것이다.

5. 우리가 함께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진정한 문제는 내란 이후 탄핵 심판 과정에서 전면에 등장한 ‘아스팔트 극우’이다. 그 희망을 보수정치에서 찾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열망은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환상과 노스탤지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희망을 찾는다. 한국 사회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바 있다.

개발근대 시절을 상징하는 기업 CEO 출신의 이명박과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로 상징되는 박정희 레짐의 상징 박근혜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퇴임 후 또는 재임 중 탄핵받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결과는 두 번의 실패로 남았다. 진보와 보수, 모두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고, 보수 세력은 한 번 더 실패할 예정이다. 역대 정권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승리가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실패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 윤석열이 문제적인 것은 자신의 뜻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여러 제약 상황(게다가 자신과 그 아내를 둘러싼 법적 문제들로 인한 특검 상황 등)과 맞닥뜨리자 이를 헌법적 질서 아래에서 민주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비상대권(권위주의 독재)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연장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윤석열이 아무리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그가 추구했던 권력강화와 연장의 꿈이 단순히 군대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를 부추기고, 그가 의지했던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법을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자행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기생하여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려는 기성 정치 세력 역시 존재한다.

언젠가 고(故) 노회찬 의원은 야권연대에 대한 비판에 응답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선예비후보 전북지역 합동연설회 현장에서 연설 중인 노회찬 후보 모습. 2007년 7월 25일. 노회찬재단.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툭하면 갈등 관계에 빠지는 사이라도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면 힘을 모아서 지구를 지켜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회찬

플라톤은 단 한 번도 민주주의자였던 적이 없지만,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대한민국을 고민한다면, 차기 대통령을 누굴 뽑을 것인지, 어떤 당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지지할 것인지, 개헌을 한다면 어떤 제도가 스스로에게 유리할지 게임하듯 계산하기에 앞서 먼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의 준동을 멈춰 세우고, 공화국의 규칙을 짓밟는 자들에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질서인지 먼저 일깨워주어야 할 때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이다. 지금은 당신이 이 나라의 내일을 결정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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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의 준동을 멈춰 세우고, 공화국의 규칙을 짓밟는 자들에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질서인지 먼저 일깨워주어야 할 때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이다. 지금은 당신이 이 나라의 내일을 결정할 순간이다. 쉽게 읽힌 글은 아니지만 명쾌한 진단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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