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영국 셰필드에서 대중문화를 공부한 필자와 대중문화에 비친 우리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필드는 ‘흑백요리사’로 살펴본 공정한 경쟁이라는 ‘신화’. (⌚7분)

[흑백요리사], 이토록 흥미진진한 예능을 보면서 나는 ‘경쟁’에 관해 생각해 본다.
어른이 돼서 다시 읽는 ‘토끼와 거북이’
경쟁?
‘경쟁’하면 나는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 시합을 하기로 한다. 토끼는 잘 달리니까 산꼭대기까지 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거북이는 질 게 뻔했지만, 재미 삼아 시합한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북이의 승리.
이 우화는 무려 초등학교 국어책에 등장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린 나에게 한글을 익히기 무섭게 ‘성실’이라는 교훈이 주입됐다. 내 또래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경쟁에는 왕도가 없다는 걸 배웠다. 토끼처럼 자만하지 말고 거북이처럼 부지런히 ‘노오오오력’ 하면 보답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이 우화의 교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리고 조소하며 질문한다.
- 거북이가 한 번쯤은 이길 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 이 우화는 혹시 토끼들(타고난 자들, 금수저)의 음모는 아닐까?
- 그러니까, 너희 흙수저도 노오력하면 이길 수 있잖아! 라는…
- 그런데 도대체 왜 이겨야 하는 거지?
노예였던 이솝은 왜 하필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까. 그건 노예였던 시절에 쓴 이야기일까, 아니면 그의 재능으로 주인을 도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뒤에 쓴 이야기일까. 내 또래 우리들은 아니 ‘선진국’ 대한민국을 사는 이들은 지금 ‘토끼와 거북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이제 토끼와 거북이는 가짜 ‘신화’라는 것.

공정한 경쟁 혹은 성실함이 재능을 이긴다는 ‘신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은 국내 예능 프로그램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하다가 웬 예능?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보자.
최근 최고 인기를 누리며 방영된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물론 경쟁 예능은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예능 프로그램은 순위로 시상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은 꼴찌를 낙오시키는 시스템으로 진화했다.
이들 경쟁 예능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세상은 공정하고, 능력에 따라 ‘거북이’도 얼마든지 ‘토끼’를 성실한 노오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했으니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은 정당한 시스템에 의해 ‘걸러졌다’고 경쟁 예능은 설파한다. 무한경쟁적 신자유주의의 예능 버전. 그런데 정말 이 게임은 공정한가.
[흑백요리사]에서 공정해 보이는 경쟁의 리얼리티는 실은 정교하게 구성된 판타지다. 마치 디즈니랜드가 더 진짜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판타지로 미국이라는 양극화된 가짜 세계를 타자화해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흑백요리사]는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계급적 질서가 공정과 경쟁을 담보로 한 능력주의를 통해 뒤바뀔 수 있다는 판타지와 쾌감, 더 나아가 희망을 시청자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능력이라는 신화는, 실은 드라마처럼 정교하게 설계된 ‘판타지’로서의 요리 대결 예능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 속에서는 학벌과 지역과 인맥이라는 전근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질서에 의해 아주 손쉽게 짓밟힌다. 더불어 [흑백요리사]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요리사들’은 이미 그 현존 질서 속에서 도전하는 ‘뉴비’가 아니라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네임드’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쟁 예능’을 바라보며 공정한 게임과 드라마틱한 승리를 꿈꾼다. 그 승리를 동일시한다. 그런 희망이라도 있으면 좋은 걸까. 잘 모르겠다.

이름 없는 거북이들이 만든 기적
거북이들이 만든 기적이 없는 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볼 것 없이 전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압축 성장을 이룩한 위대한 조국, 대한민국의 발전과 진화 과정을 바라보면, 거북이의 기적은 현실에서 존재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거북이들이 있다.
1945년 광복했지만 곧 이어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한국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추락했다. 1960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는 자신에게 없는 정치적 정당성을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을 통한 압축 성장으로 대신했다. 유교적 개발 독재의 계획 경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성장을 객관적으로 성취했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성장의 과실은 재벌에 집중됐고, 재벌은 점점 더 비대해졌다. 외화 차입과 문어발식 투자로 독과점이 심화했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지 불과 1년 만에 한국은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기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억압된 개인의 욕구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절묘하게 뒤섞였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를 넘어서 사회 전반의 의식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의 무한대 경쟁 논리를 지배적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그 방법론은 최상위 규범으로 사회를 지배했고, 이를 위한 형식적 공정 규칙에 대한 억압적 복종과 준수가 개개인에게 요구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형식적 공정의 ‘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귀속되는 무자비한 것이었다. 거기에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소위 ‘각자도생’의 외로운 성채가 개개인의 초라한 영혼 속에서 축조됐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공정’을 외치는 짐승들
압축 성장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문화적 실패 과정에서 ‘각자도생’은 공정의 탈을 쓰고 진화해왔다. 이 ‘시대정신’은 십년 넘게 유행하는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과 구조적 유사성을 띤다. 즉, 타인과 경쟁은 당위고 이러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참가자 개인은 소위 전문가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매력까지 과시해야 한다.
경쟁의 결과 역시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경쟁의 규칙 또한 한 명의 탈락자와 한 명의 최종 승리자가 상징하듯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다. 이는 ‘당신도 노력하면 이들처럼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정언명령으로 수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부여한다.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은 대중에게 일차적으로 즐거움은 물론 넷플릭스의 [흑백 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처럼 시청자들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그러나 이미 기득권자인 셰프들이 나와 혼신의 요리를 보여주며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이 예능 서바이벌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놀랄 만큼 닮았고, 또 이러한 믿음의 체계를 은연 중에 정당화하는 문화적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은 ‘진짜’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경쟁을 원하는 걸까? 사람들은 지나친 경쟁이나 공정하지 못한 경쟁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다고 토를 달거나 대개는 현실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아가 현실이 이 모양이니 차라리 어떻게 경쟁력을 높일 것인지 그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고민할 시간도 없다. 당장 자기 계발서라도 한 권 더 읽고 더 부지런할 체력과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일에 파고들며 경쟁에서 이겨 최고의 자리에 앉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마치 최후의 승리자만 살아남는 ‘배틀 로얄'(battle royal) 게임의 자원자 같다. 그 게임 속 냄비가 서서히 끓어오르면 거기에 빠진 개구리는 스스로 삶아지는 줄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한다.
경쟁(competition)의 어원
우리말에서 경쟁은 둘 이상의 사람이나 조직이 무언가를 놓고 겨루는 것을 말한다. 경쟁은 보통 한정된 자원을 가진 환경에서 공존하는 생물 사이에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동식물의 세상이나 사람 사는 사회나 늘 경쟁이 있고 그에 따른 갈등이 있다.
하지만 경쟁이 반드시 상대방을 죽이거나 쓰러뜨리는 개념은 아니다. 인류는 먹거리와 배우자를 놓고 다투다 가도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협력했다. 영어의 ‘경쟁'(competition)은 라틴어 ‘함께 (com-)’ 어떤 대상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petere)’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 어원을 통해 우리는 경쟁의 ‘진짜’ 본질을 알 수 있다.
‘컨피티션'(Competition)을 ‘경쟁'(競爭)이라는 한자로 만든 것은 일본 근대화 시절이다. 그 후 한자로만 해석하다 보니 경쟁은 목표 지향적이고 이기는 게 곧 목적이란 의미로 변질했다. 한국은 출세와 지위 상승을 중시하는 사회다. 이제 누구나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꺾고 말겠다는 ‘너 죽고 나 살자’는 방식으로 경쟁을 이해한다.

이러한 한국식 경쟁의 (진짜)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경쟁은 소수를 위한 게임이다. 승패로 나뉘는 게임은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소수만 성공하는 목표를 놓고 그것을 위해 모두가 달려간다는 것을 위장하고 숨긴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경험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 둘째, 경쟁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다. 경쟁의 승자는 ‘치고 빠지는’ 식이다. 이렇게 무한 경쟁의 원리는 결국 승자도 불안에 시달리게 한다.
- 셋째, 자기 파괴적 경쟁은 승자나 패자 모두 인간성, 공동체 등을 지속적으로 파괴한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경쟁을 ‘다시 디자인’할 필요
기득권이 경쟁을 강제하는 구조를 개선하기보다는 그 구조를 더 견고히 하며 개개인의 인생 목표로 ‘배타적 성공’을 구조화한 이유는 뭘까. 그 구조야말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승계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모방 욕구를 부추기는 각종의 사회문화적 기제들은, 그런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내가 스스로 원한 것처럼, 노예적 자기 동일시 현상을 일상화했다.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승자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주어진 현실 구조에 잘 적응해서 권력으로부터 인정받아 출세를 꿈꾼다. 우리는 그 욕망의 대상을 욕하면서 닮아간다.
신자유주의적 삶의 양식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도 노벨문학상이 탄생하는 기적의 나라. 5.18의 고통과 4.3의 절규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나라. 그렇다면 이 모순과 아이러니의 나라, 이율배반과 기적의 나라에서 우리는 경쟁을 다시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하지만 이기심은 이타심은 아니다. 공동체적 상상력은 관계 속에서 생성한다. ‘함께'(com) 노력할 때(petere) 그 공동체적 상상력은 꽃 핀다.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쟁의 진짜 모습,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의 위상에 맞는 경쟁의 모습이지 않을까.

말하려는 취지는 알겠으나 비문이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드네요. 기사 올리기 전에 글쓴이나 편집자의 꼼꼼한 퇴고가 필요해 보입니다.
김동우 님께
필자와 상의해서 전반적으로 글을 퇴고했습니다.
필자의 글을 조금이라도 먼저 독자들께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과해서 제가 미처 꼼꼼하게 글을 교정하지 못했네요. 이 점은 동우 님과 같은 독자께도 그리고 필자께도 송구스럽네요.
혹여라도 다시 들르시면, 퇴고한 글은 읽기에 좀 더 수월해지셨는지 피드백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전히 좀 읽기 어색하거나 불편한 구절이 있다면 다시 한번, 귀찮으시더라도, 알려주시면 앞으로 편집에 참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좋은 글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한가지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일반대중의 빠른 해독를 위해 문장을 좀 더 평이하게 썼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의 무한대 경쟁 논리를 지배적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과 무한 경쟁을 통해 사회를 지배했으며 ~~~~.
ky 님께
필자와 글에 관해 소통하고 상의하면서 늘 하는 말이 ‘단순, 소박, 겸손, 솔직’인데요. (^^;;; )
ky 님 말씀처럼 논문식(?) 표현이 여전히 좀 남아 있어서 좀 더 쉽고 직관적인 이해에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취지는 저희도 숙지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 필자와 더 긴밀히 상의해서 초고와 편집에 더 쉽고, 단순, 소박, 간결한 표현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피드백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