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세상 소식을 전합니다.
육체노동은 고달프다
올해 들어 6월부터 주로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어쭙잖은 노동이지만, 덥고 따가운 한낮 햇볕을 감당하는 일이 버거워 아침과 저녁에 주로 몸을 놀리고 있다. 보통 육체노동을 두고 3D라는 말을 썼다. 어렵고(Difficult), 위험하며(Dangerous), 더럽다(Dirty)는 뜻이다. 지금은 3D업종이라는 말이 좀 더 다양한 의미와 용도로 변용되지만 1980년대 말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는 주로 몸을 써서 일하는 직종을 콕 집어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실제로 몸을 써서 일해 보니 그 어려움·위험함·더러움이 온몸으로 실감이 되었다. 왼쪽 손목은 삐었고 오른쪽 발등은 쇳덩이에 찍혔다. 팔뚝과 종아리는 성한 데 없이 여기저기 긁혔다. 가슴팍과 허벅지 곳곳에는 언제 들었는지 모르는 시퍼런 멍들이 짙어졌다 옅어지기를 반복했다.
육체노동은 매력적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힘든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노동이든 다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며 자판을 두드리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육체노동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정신노동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결이 다른 보람이 있었다.
정신노동은 그 결과가 언제 구체화될지 알기 어렵지만 육체노동은 움직이고 꼼지락거린 만큼 그 성과가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구멍을 뚫고 볼트를 치면 구조물이 생기고 볼트를 풀면 해체된다. 그라인더로 갈면 녹과 찌꺼기가 사라지고 페인트를 칠하면 거무튀튀한 쇳조각이 뽀얗게 된다. 청소하면 그만큼 주변이 깨끗하고 환해진다.
땀을 흘리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매 순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면서 거기에 투영되는 자신의 존재와 가치도 실시간으로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육체노동의 매력임을 몸으로 느꼈다. 여기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에 대한 하찮은 편견에 우리가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 얘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섯 개는 많으니 하나만 사라는 직원
육체노동을 매개로 만났던 몇몇 사람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부품이나 공구를 파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금속 중량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자에 가깝다. 가게 주인도 대부분 공장 노동을 하다 독립해 직원 한둘과 함께 가공·조립·제작·판매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님인 내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며 무엇보다 정직했다.
철판에 구멍을 뚫는 데 필요한 드릴 비트를 구입하기 위해 우연히 들른 데가 팔룡동 공구상가의 ‘제일종합상사’였다. 제일 좋은 걸로 다섯 개 달라고 하자 젊은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보통 품질로 하나만 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두 개를 쓰고 있었는데 금세 부러지고 망가졌다고 사정 얘기를 하자 직원은 양손으로 시늉을 해 보이며 비트가 돌아가는 속도에 맞추어 세지 않게 지그시 눌러주면 부러지는 일이 없고, 또 절삭유를 충분히 뿌려주면 날도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고 했다.
덕분에 다섯 개를 사는 대신 여유분까지 쳐서 두 개를 구입했다. 돌아와서 일러준 대로 힘껏 누르지 않고 살살 다루면서 기름을 듬뿍 치고 작업했더니 구멍을 300개 넘게 뚫었는데도 아직 하나는 쓰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있다.
사실 자기 이끗을 따라 손님이 달라는 대로 물건만 팔면 그뿐이다. 그런데도 비싼 것을 많이 사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사도록 일일이 설명까지 해 주는 모습이 내게 아주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해타산이 빠른 각박해진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는 씁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리해 주고도 돈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
놀라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철재 표면의 녹과 찌꺼기를 없애려고 고압세척기를 꺼냈더니 고장이 나 있었다. 모터는 괜찮은데 호스가 찢겨져 있었고 물을 뿜는 총(건=gun)도 끝부분이 막혀 있었다. 함께 일하는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호스는 교체할 수밖에 없겠고, 건도 일단은 수리가 되는지 알아보고 안 되면 교체하자.” 선배가 가보라고 지정한 데는 팔룡동 공구상가의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성보기공’이었다.
세척기 건과 호스를 내밀자 또래로 보이는 가게 주인은 이리저리 만지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먼저 호스는 길 건너 맞은편 다른 가게에 가면 고칠 수 있으니 다녀오라고 했다. 가서 고쳐 오자 그새 고장 난 건을 말끔하게 분해하고 소제해서 물이 잘 통하도록 해놓았다. 그러면서 수압도 약하지 않으니 아직 쓸 만하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주인아저씨는 이 정도로는 돈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안 드리면 안 되는데요 했더니 “그러면 만 원만 주시오” 한다. 그러면서 “내가 김우중이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거든” 하며 웃었다. 나도 만 원 지폐 한 장을 건네며 따라 웃었다.
좀 더 착해지기로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선배에게 했더니 최근에 페인트를 사러 갔다가 주인아줌마로부터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같은 팔룡동 공구상가의 노루페인트였지 싶은데(실제로는 조광페인트일 수도 있다. 선배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바닷가라서 해풍과 염해에 잘 견디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도 그런 페인트가 있지만 그래도 벽산을 못 따라간다면서 그리로 가보라 했다는 것이다.
쇠는 정직하다는 말이 있다. 쇠는 정직하게 대하면 꼭 그만큼 정직하게 반응할 뿐 사람을 속이는 일이 없다.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쇠를 다루는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산업재해도, 다리가 무너지고 집이 쓰러지는 대형 사고도 쇠를 정직하게 대하지 않고 속일 때 일어난다. 사람들은 죽고 다치지 않으려면 사람은 쇠를 정직하게 대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는 좀 더 착해지기로 했다. 육체노동을 통해 만난 팔용동 공구상가 사람들 덕분이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기분 좋게 즐겁게 가르쳐 준 사람들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이번 여름에 내가 억수같이 쏟아냈던 땀은 하나도 헛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