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것은 너무도 매력 없는 선택지가 되었다. 당장 SNS만 켜더라도, 온갖 쇼츠와 릴스, 각종 광고는 우리에게 매일 ‘버킷리스트’를 쌓아 올린다. 그리스 산토리니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 하는 것, 몽골의 은하수나 노르웨이의 오로라를 보는 것. 돈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지,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현실적으로도 청년들은 막연히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안정적인 주거 환경 정도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2년 혹은 4년마다 쫓겨 다니지 않고, 전세 사기로 절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 ‘안정적인 주거환경’이 당장 10억짜리 아파트라는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양가가 한 3억씩 지원해 주는 게 아니라면, 맞벌이 부부가 1년에 허리띠 졸라매고 3천만 원씩 모아도 30년 걸리는 돈이다.
설령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상상되는 건 노키즈존에 문전박대당하면서, 기차나 비행기 탈 때마다 눈총받고, 아이가 크면 영어유치원부터 사교육 경쟁에 내몰리는 것이다. 아이가 어쩌다가 생기면 몰라도, 미래 계획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면, 이 일에 뛰어드는 게 보통 마음으로는 쉽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양가의 물질적이고 헌신적인 지원이 충분한 경우는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당장 다른 쪽의 버킷리스트를 쌓아 올리고, 그것부터 하나씩 실현해 보는 게 훨씬 ‘현명한’ 삶을 사는 일처럼 보인다. 아파트 빚에 30년씩 시달리며 아이를 사교육 경쟁 지옥에 밀어 넣는 것보다, 발트 3국 여행하고, 발리랑 다낭에서 한 달 살기 하는 게 훨씬 근사해 보인다. 아이 키우는 비용을 생각하면, 아이만 낳지 않아도 매년 해외여행 다니고 샤넬 백을 하나씩 구매해도 된다. 그게 훨씬 ‘가까운’ 삶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기존의 부부 둘이 합심하여 원룸에서 시작하여 아이 둘 낳고 살아가다 보면, 점점 집도 넓히고 자가도 가질 수 있으며, 하나의 완성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이상’이 더 이상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이상’은 말 그대로 끝났다. 더군다나 기성세대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결국 그 끝에 ‘행복’이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했다. 상당수 어른은 죽지 못해 부부가 같이 산다고 말하면서, 너희는 엄마, 아빠처럼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우리 사회가 만약 ‘저출생’ 혹은 ‘합계출산율’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이처럼 기존 이상의 붕괴,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상들(버킷리스트들)의 탄생과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 너희도 뼈 빠지게 일하면서 아등바등 지지고 볶으며 살면 어떻게든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삶에서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가장 매력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건 당신 선택이지만, 아이를 낳아 키울 경우 국가가 나서서 가장 매력적인 삶으로 초대하겠다는 시그널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안정된 커리어, 세제 혜택, 살인적인 경쟁 없는 아이들의 행복, 그로 인한 가정의 행복, 안정적인 삶의 장기적인 전망까지 국가가 그 ‘매력’을 보장하지 않으면, 청년들은 그 이상으로 다시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극심한 경쟁과 그로 인한 줄 세우기,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문화, 나아가 현실적으로 접근 불가능해진 안정적인 주거 환경과 양질의 일자리 부족 등이 종합적으로 구축되어, 이제 대한민국에서 ‘결혼과 육아’는 가장 매력 없는 선택지로 완성되었다. 오랜 세월 온 사회가 나서서 빌드업 해온 이 완성된 절망을 허물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의 마지막 키는 국가가 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년들에게 모든 걸 줘서 그들의 등을 돌리든지, 아니면 이대로 쇠락을 향해가든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