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의 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복기해 보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소장(★★)이었고 전두환이 체포한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정승화는 대장(★★★★)이었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불법 체포했던 날 저녁, 용산 육군본부 벙커에는 류병현(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과 김종환(합동참모의장, ★★★★), 윤성민(육군참모차장, ★★★), 이건영(3야전군사령관, ★★★) 등 전두환보다 계급이 높은 장성들이 수두룩했지만 아무런 결단도 지시도 내리지 못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는 실패할 뻔 했다.
- 첫째, 만약 미군 사령부로 도망 갔던 노재현(국방부 장관)이 차라리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전두환의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규하(대통령)가 국방부 장관의 동의를 받아오지 않으면 정승화 체포를 재가할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노재현은 밤새 도망 다니다가 새벽에 국방부에 나타나서 반란군에게 붙잡혔고 별다른 저항 없이 체포 동의서에 서명했다. 실제로 영화와 거의 비슷한 캐릭터였다고 한다.
- 둘째, 9공수여단(인천)이 제 시간에 출동했다면 반란을 조기에 진압했을 수도 있다. 수도권 4개 여단 가운데 유일하게 9공수만 반란군이 장악하지 못한 상태라 명령만 내리면 서울 용산까지 1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황한 전두환이 “9공수를 철수하면 1공수를 철수하겠다”고 제안하자 윤성민(★★★)이 철수 명령을 내린 게 패착이었다. (유학성과 황영시가 여러 경로로 육군본부를 설득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1공수여단(서울 강서구)을 그대로 밀어붙였고 순식간에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 셋째,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이 26보병사단(경기도 양주)과 수도기계화사단(경기도 가평)을 출동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이건영(★★★)이 국방부 장관 승인이 있어야 한다며 뭉갠 것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건영은 나중에 ‘패자의 승리’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내서 “경위야 어찌됐건 불행한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 때문에 일생에 어두운 과거로 남게 됐다”면서 “항상 국민과 전우들에게 죄스러움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 넷째, 육군본부에 있던 별들이 수도경비사령부로 철수하지 않았다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거란 분석도 있었다. 육군본부를 비운 것은 치명적인 판단 착오였다. 그때가 저녁 10시15분이었고 1공수여단이 육군본부를 점령한 건 새벽 1시30분이었다. 장태완 회고록에 따르면 수도경비사령부 장교 450명 가운데 390명이 이미 반란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일부러 잡으러 갈 판인데 반란군의 소굴로 걸어들어온 셈이다. 그 정도로 상황 판단이 안 됐다는 이야기다.
상명하복 시스템의 커다란 구멍.
- 군인은 지시를 받아야 움직인다.
- 국방부 장관과 ‘포 스타(정승화)’가 사라지자 지시를 내릴 사람이 없었다. ‘투 스타’가 날뛰는데 ‘쓰리 스타’들은 책임을 미루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 전방을 비워둘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아군끼리 정면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 만약 반란군과 진압군의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내전 상황으로 치닫거나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유혈 사태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어려운 결단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 장태완은 ‘투 스타’였지만 예하 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박희도나 최세창 등 ‘원 스타’ 여단장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 공수여단이 정병주(육군 특수전사령관, ★★) 직속이었는데 1공수와 3공수, 5공수는 일찌감치 반란군에 넘어갔고 남아있는 9공수를 출동시켰더니 윤성민(★★★)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병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윤성민은 왜 그랬을까. 심지어 장태완이 수도경비사령부를 정비해서 출동하려 하자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장태완은 윤석민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 장태완과 정병주, 하소곤(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 김진기(육군본부 헌병감, ★) 등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수직적 명령 체계의 한계였다. 윗 사람이 판단을 하지 않으면 권한도 책임도 아랫 사람이 대신할 수는 없었다.
- 실제로 장태완은 저녁 내내 출동 지시를 내려 달라고 여기저기 전화를 거는 게 전부였다. 영화와 달리 실제로 장태완이 관할했던 수도경비사령부는 한 발짝도 나가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내부의 적.
- 공교롭게도 박정희가 죽고 계엄이 선포되면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검찰과 경찰 등 모든 정보 기관과 수사 기관의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5년 월간조선이 공개한 녹취록을 보면 반란군은 3군 사령부를 비롯해 육군본부 산하 군단과 사단 지휘관들의 통화를 감청하면서 병력 이동 상황을 손바닥처럼 들여다 봤다.
- 내부의 적에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 상황에 대비한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없었다. 윤성민과 이건영 등은 반란군이 서울을 접수하는 동안 “유혈 충돌을 피해야 한다”, “허락 없이는 부대를 동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반복하고 확인했다.
- 장태완은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몰랐고 정병주도 1공수와 3공수, 5공수여단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병주는 심지어 3공수에 습격을 당했다.
- 장태완 회고록에 따르면 장태완이 장세동(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 ★★★)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반란군 집결지가 된 30경비단에는 유학성과 황영시(1군단장, ★★★), 차규헌(수도군단장, ★★★), 박준병(제20보병사단장 소장, ★★), 박희도(1공수여단장, ★), 최세창(3공수여단장, ★), 장기오(5공수여단장, ★) 등 서울과 수도권 주요 부대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 새벽 3시30분, 뒤늦게 나타난 노재현이 장태완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말은 “장태완!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였다. 노재현은 부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라고 지시했고 장태완은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심지어 윤성민은 장태완이 철수한 뒤 유학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종료됐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 국방부 장관이 조금만 더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전두환의 하극상을 문제 삼고 지휘 명령 체계를 수습했다면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 계엄사령부에 절대적인 권한을 넘겨주고 방치하지 않았다면 명령 체계가 이렇게 엉망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태완이 지적했던 것처럼 최규하가 윤성민에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확한 지시를 내렸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에서 말하지 않은 것.
- “장군들의 어조와 그들의 질문 방식은 ‘저쪽’이 병력을 동원해서 육참총장을 연행해 간 사태의 정치적·군사적 목표와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서로 묻고 싶은 충동을 감추고 있다. (중략) 반란군 측의 정치·군사적 목표는 확연히 드러났고, 육본 측 장성들은 밤새 종적을 감춘 장관이 ‘저쪽’과 어떤 정치적 타협에 도달함으로써 문제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 1995년 월간조선이 반란군의 통화 감청 테이프를 공개했을 때 김훈(당시 시사저널 기자)이 쓴 칼럼 가운데 일부다. (월간조선 1995년 9월호는 30만 부가 발행됐다.)
- 육군본부의 지휘관들은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했고 전언과 풍문을 교환하면서 서로 눈치를 봤다. 육군 참모총장이 잡혀 갔는데도 쉬쉬하고 있는 상황. 이들에게 반란을 진압하는 것보다 더 큰 관심사는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였다. 누가 저쪽으로 돌아섰는지도 알 수 없고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신변도 확인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장태완조차도 반란군들이 30경비단에 모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지 못했고 다른 장성들은 어느 쪽이 됐든 이기는 편에 서고 싶어했다. 이미 성공한 쿠데타라면 섣불리 나섰다가 반란군에 처형 당할 위험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필요한 질문.
-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검찰 쿠데타’란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 조국(전 법무부 장관)의 잘못과 별개로 2019년 9월 인사 청문회가 열렸던 날 검찰이 정경심(조국 부인, 당시 동양대 교수)을 기소한 건 명백한 공소권 남용이고 정치 개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검찰이 계속해서 언론에 피의사실을 흘렸을 뿐 정경심은 검찰 조사 한 번 받지 않은 상태였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첫날 자택 압수수색을 벌인 것도 다분히 의도된 공격이었다.
- 애초에 조국이 강도높은 검찰 개혁을 예고했고 조국의 지시를 받게 될 윤석열(당시 검찰총장)이 조국의 임명을 막기 위해 가족의 약점을 공격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와 무관하게 검찰 개혁에 대한 반발 성격이라는 걸 모든 국민이 알았다. 설령 조국과 정경심이 법원에서 유죄를 인정 받더라도 검찰의 권력 남용과 먼지털이 수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 결국 조국은 쫓겨났고 조국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문재인 정부는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쿠데타를 밀어붙였던 윤석열은 당시 야당에 합류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 전두환이 탱크를 몰고 와서 권력을 찬탈했다면 윤석열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검찰 권력과 무소불위의 수사권, 받아쓰기 바쁜 언론을 동원했다. 무능한 집권 여당에 견줘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고 선거를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는 게 차이다.
- 검찰총장이 권력의 비리를 수사할 때 대통령이나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복종할 이유는 없지만 윤석열은 검찰 조직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정권과 정면 충돌했다. (조국도 흠결이 많은 사람이지만 검찰과 맞장을 뜨지 않았다면 윤석열과 척을 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였고 명실공히 검찰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윤석열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는 상태다.
- 정승화가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한 의혹이 있다는 전두환의 주장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못했던 것처럼 조국 가족의 범죄를 들춰내면서 검찰 개혁을 무력화한 윤석열의 쿠데타는 정의와 공정으로 포장됐다.
- 영화 ‘서울의 봄’은 단순히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데 끝나는 게 아니라 권력의 위임과 통제, 책임에 대한 질문과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이기는 것이 정의가 아니고 뒤틀린 역사는 뒤늦게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읽어야 한다. 위임 받은 권력을 사유화하는 자들이 민주주의의 적이다.
- 다음은 참여연대가 정리한 윤석열 정부의 검찰 출신 주요 인사들이다. 검사 또는 검찰수사관 출신인 장차관급과 대통령실 고위공직자(23명, 사임자 포함), 법무부 소속 또는 법무부 파견 검사(67명), 국회 등 외부 파견 검사(48명)와 법무부와 외부 파견 검찰수사관(28명)을 합하면 164명(법무부 장차관 중복 제외)에 이른다.
- 한동훈(법무부 장관).
- 원희룡(국토교통부 장관).
- 박민식(국가보훈처장).
- 김홍일(국민권익위원장).
- 박성근(국무총리 비서실장).
- 이노공(법무부 차관).
- 이완규(법제처장).
- 이복현(금융감독원장).
- 김남우(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 정승윤(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 김용원(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석동현(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 한석훈(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
- 복두규(대통령실 인사기획관).
- 윤재순(대통령실 총무비서관).
- 강의구(대통령실 부속실장).
- 이원모(대통령실 인사비서관).
- 이시원(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 주진우(대통령실 법률비서관).
- 이영상(대통령실 국제법무비서관).
- 권영세(전 통일부 장관).
- 조상준(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 정순신(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