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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쓴다.

엊그제 내 차에 내 또래 사람 몇이 동승했었다. 화제는 판문점 북미 정상 긴급회동. 모두 문 대통령을 칭찬했다. 어쩌다 말이 ‘503’(박근혜의 수인번호)으로 이어졌다. 한 사람이 고백했다.

“나는 박근혜를 찍었었는데 말이야.”

차 안에 있던 다섯 중 세 사람이 “찍었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 내 연배에 의외로 많다. 세 사람이 말하는 이유는 똑같았다. “박근혜는 자식이 없어서 잘할 줄 알았지.” 자식이 없어서라. 대통령 잘하고 말고가 자식 문제하고 무슨 상관인가? 자식들 문제만 없으면 대통령 잘하는 건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출처: 청와대) http://www1.president.go.kr/activity/photo.php?srh%5Bpage%5D=2&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8569&srh%5Bdetail_no%5D=1004
박근혜를 “찍었다”는 이들이 말했다. “박근혜는 자식이 없어서 잘할 줄 알았지.” 사진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정규직 과호보’ 발언이 있었던 2014년 11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출처: 청와대)

그들이 최소한 자식 문제만 만들지 않으면 좋겠다를 넘어 자식 문제만 없으면 잘하는 거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갖게 된 것은 그들 탓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한 사람들은 우선 전직 대통령 자식들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자식들은 그렇다 치고, YS 이후 자식들이 문제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 연배 사람들에게 대통령 자식 문제는 모든 것을 덮어버릴 만한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박근혜가 자식이 없어서, 자식들 꼬락서니 부리는 거 안 보겠지 싶어 찍었다고 지금 와서 말하는 사람들, 그들을 무시하지 마시라. 그들은 속은 것에 반성하고, 엄연히 문재인 정부 탄생에 기여했던 사람들이다.

자식 트라우마는 지금도 계속 중이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 때문일 것이다. 그런 문화를 정권 잡기 투쟁에 활용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 정적을 공격하는 것. 오늘[footnote]이 글이 쓰인 시점은 2019년 7월 6일입니다. (편집자)[/footnote] 옛 중앙일보 기자가 쓴 페북 글을 보았는데, 바로 그 없는 사실을 만들어 전직 대통령 아들을 공격한 데 대해 반성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어제 나눈 대화와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대통령의 자식에 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toggle style=”closed” title=”이진주 전 기자의 글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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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전 기자의 글을 우선 직접 독자가 읽고 판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해당 게시물이 올려진 플랫폼(페이스북)의 성격상 수정·삭제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이에 이진주 전 기자의 글 전문을 최대한 옮깁니다. 다만, 이 사안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특정한 인물 언급한 도입 부분은 제외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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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megajin/posts/2274883679216071

이진주 7월 4일 오전 2:16

십 년 전 저는 중앙일보 기자였습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서 시위대 반대편에 서고, 용산 참사 유족 분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를 취재했습니다.

나이 서른에, 메이저 언론사로는 아마도 처음으로 애엄마 수습기자로 들어가, 조직에 충성하고 선배들의 사랑을 받고자, 제 손에 여러 번 피를 묻혔습니다.

죄송합니다.

*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분노해서 시위대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성난 시민들이 “조중동 아웃” “개와 조중동은 출입금지”를 외치던 2008년 초,

저는 중앙일보 44기 공채 기자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하나 낳고 나이까지 서른이 꽉 차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었기에, 저를 뽑아준 조직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지금은 “기레기”라고 싸잡아 욕을 먹지만, 사실은 선배들도 동료들도 정말 좋았습니다. 삼성도 다녀보고, 국회도 구경했으나, 그처럼 우아하고 유능하며 지적인 이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을 믿고,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성난 시위대 속에서 동기들이 고립되고, 매일 밤 거리에서 날 선 말들이 오갈 때, 일개 수습기자의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함께 취재에 나선 데스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 취한 시위대가 어린 기자들을 향해 소리지르면,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대신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아직까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어린 것들이, 조직의 이름 때문에 한꺼번에 싸잡아 욕먹을 때는, 저희도 조금은 억울했습니다.

저희는 단지, 시험을 봐서 회사에 들어간 것뿐인데. 개중에는 시를 쓰는 친구도 있었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친구도 있었고, 그저 안정된 직장이 필요한 친구도 있었는데요. “왜 우리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느냐” “왜 대화의 기회조차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려 들 때마다 그 데스크는 우리를 달래 끌고 나왔습니다.

“다치면 안돼. 여기서 누구도 다치면 안된다.”

그는 한 때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이였습니다. 누구보다 우직하게 조직에 충성했지만,”업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앵커를 했고, 지금은 아주 뜨거운 현역에서는 물러났습니다.

일년에 한 번이나 연락을 드릴까 말까 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 밤 그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고등학생 시위대라는 어린 친구들과 촛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새벽까지 토론을 했습니다. 어차피 집에는 못가고, 남대문경찰서 기자실은 돼지우리고, 저는 사우나 티켓을 끊어 겨우 씻던 시절입니다.

그 중 유독 이론이 풍부하고 화술이 대범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헤어질 무렵, 그 친구가 제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 이념 동아리에서 나온 친구였습니다.

당혹감이 지나간 뒤에는 배반감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왜 했을까.”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고민하다 당시 시경 캡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역시 제가 신뢰하고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캡이라는 위치는 현장의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선별하고 아젠다를 만드는 역을 했습니다. 조중동 데스크였던 그는 제게 “쓰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이걸 쓰면, 너무 많은 어린 친구들이 다친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기레기라고 비난받는 걸 보며, 그래도 누구 한 사람은 변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기레기인 사람은 오히려 드물 겁니다. 그는 제게 좋은 기자였습니다. 연락도 한 번 못해 보고, 개인의 능력이나 성정을 뛰어넘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만 여겼습니다.

수습을 시작하고 조금 지나 저에게는 경찰과 시위대의 정보가 동시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과는 유독 다른, 기이한 어떤 특성이란 게 있을 텐데요, 제게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성향의 사람들이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종류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보거나 들으려 하는 게 아닌데, 어쩌면 그것은 무당과도 비슷한 일일 겝니다.

그렇게 지위고하를 막론한 양측의 핵심 정보원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를 그러쥐고 있으면, 때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이중간첩 같은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사실은 제 존재부터가 그랬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온갖 것들이 뒤섞인 “키메라”라고, 정체를 모르는 “혼종”에 “잡종”이라고, 오래 생각해왔습니다.

*

저는 결혼을 통해 상위 중산층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편입했으나, 사실은 공부만 잘하는 “천출”이었고, 사춘기 시절 기생충의 “반지하방”을 오래 경험했으니 “로얄” 같은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조중동 기자가 되기 전에는 꼴보수 아버지를 뺀 온 가족이 “노빠”였습니다. 저는 노무현 탄핵에 폭주해 대학원을 작파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실에 들어간 뒤, 총선 승리를 지켜보곤 미련 없이 물러나와 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산층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전라도 광주의 가난한 정치 낭인의 딸이었고, 무학에다, 교사에 의한 미성년 성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했습니다.

외가는 당연히 모두가 김대중의 사람들이었고, 저도 자연스럽게 노무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근본 없음”이 닮았으니까요. 제 외사촌 오라비는 노무현 당시 최연소 청와대 행정관이었고, 지금도 정권 실세 누군가의 친구라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로얄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력서에 올라가거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펙들은, 저의 본질을, 비밀을, 우울을, 그림자를, 그러니까 달의 뒷면을, 섬세하게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늘 무언가를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는 듯,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때론 지주보다 더한 마름처럼 앞장서 위악을 떨기도 했습니다.

진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건, 마흔을 넘겨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입니다. 제 마음이 부대껴 더는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근본을, 제 계급을, 제 자신을 배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씻을 수 없는 업보가 되었습니다.

*

용산의 정보를 받은 것은 한 형사로부터였습니다.

저는 사람의 목숨값을 돈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어느 쪽에서 어떤 목적으로 생산된 정보인지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지면 판형을 바꾸고 특종 한 방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좋아하고 따르는 워킹맘 선배들이 아름다운 교육정책 기사를 기획했지만, 조직은 스트레이트를 원했습니다.

그때 데스크는 아까와는 다른 분이었는데요, 저는 그 데스크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습니다. 그가 기죽어 있는 게 싫었습니다. 저를 신뢰하는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용산의 비극을 쓰면서는 다시금 분열을 느꼈습니다. 저희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편 중에는 개포동 구룡마을의 “하꼬방”이 있었습니다. 재개발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이 떠올라 괴로워졌습니다.

그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는 무리를 해서 저와 동생을 영어 수학 보습학원에 보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학원 차가 구룡마을까지 들어오는 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엄마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실용적이고 안전하게 다니는 걸 바랐을 뿐.

별 같은 눈빛을 가진 남자아이가 저를 위해서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던 저녁이었습니다.

허름하고 다닥다닥한 “난쟁이”들의 집에, 학원 차가 우리 남매를 내려놓자, 남자아이 하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허, 진주 너 여기 살았어? 공주인 줄 알았는데 그지였구나.”

저는 그 때 제 동생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응, 나 여기 살아. 그래서 뭐? 우리 집안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너희 집안은 너로 인해 끝날 거야. 똑똑히 기억해 두길 바래.”

그리고는 더 이상 그 학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별 같은 눈의 소년은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용산의 기사가 나간 뒤, 유족들의 편에 섰던 대학 선배 하나가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했던 법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어 탄성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 종류의 사람이었고요.

사시를 보지 않고 여태 빈민운동을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박하게 나이들었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제게 짧게 물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만, 사과할 때를 놓쳤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용산의 비극을 다룬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읽고, 온통 불에 타는 악몽을 꾸며, 다시금 알았습니다. 이 손이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썼다는 것을.

며칠 전, 그 트라우마로 돌아가신 분의 기사를 읽고 다시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일부가 된 건,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의 실수 같습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일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십 년이 되어도 이 일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평생 그럴 겁니다.

어느 날, 데스크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

가방에는 여권이 있었고, 저는 일을 잘했고, 모든 것이 남들보다 조금씩 빨랐습니다. 저보다 훨씬 유능했던 선배도 구하지 못했다는 표를 구하고, 남편과 아이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아침에 출근했던 그 차림으로 건너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노건호 씨를 취재하라”고.

제게는 마침 스탠포드의 친구들이 있었고, LG의 친구들이 있었고,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의 모든 곳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저밖에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를 아끼던 데스크가 만약에 진짜 제 모습을 알았다면, 결코 시키지 않았을 일이었기도 했습니다.

팔로알토에서 저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노건호 씨의 집, 회사, 자동차, 투자, 여행, 골프 모든 사소한 것들을 탈탈 털어 말해주었습니다. 언제 어느 비행기를 타고 누구와 어디를 다녀왔는지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대통령의 아들과 다투어 어울렸던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모두 다 말씀드릴게요. 제 이름은 빼주세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망하고도 슬펐습니다. 사자의 새끼가 고작 이런 자들과 어울렸다니. 그의 아비는 우리 가족의, 저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우상이었는데, 그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아 참담했습니다.

술에 취한 그의 아들을 인터뷰하고, 며느리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로 불이 났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은 타사의 선배와 동료들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진보 거물 기자 하나는 “휴, 잘했다.”라며 비난, 격려, 아쉬움, 안타까움,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하는 꼴보수 아버지가, 어느 날 미국까지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거, 그만 해라. 시골서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보기 좋더라. 이제 그만 해라.”

“아버지, 알아요.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

제가 쓴 것들과 제가 쓰지 않은 것들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들었습니다. 목숨까지 위협받을 때, 친구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진주야, 제발 네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내가 댓글을 달까? 너 그런 사람 아니라고 내가 댓글을 달까?”

그 때 저는 말했습니다.

“아냐, 내 이름이니까, 내가 함부로 내 이름을 빌려주었으니까, 대가를 치를게. 괜찮아. 너까지 다치지 말고, 그냥 내가 다 받을게.”

그 때도 우리 선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사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진보는 부패의 크기가 아니라, 부패했다는 사실 자체로 무너진다.”

그 말들이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지향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을 적은, 익명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들은 무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몇 번은 침묵했지만 저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저도 유산을 하였다고.

그 계정으로 다시는 메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하혈이라고만 밝혀왔지만, 그 때 저는 아마도 아이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달 내내 하혈을 하면서 아이가 사라진 것을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제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퇴사를 고하고 한 달 동안 집에 누워있는데, 매일처럼 저희 집에 들러 죽을 사주며 함께 울었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죽어버릴까 봐, 데스크가 선배를 저희 집으로 출근시켰던 겁니다. 그 선배가 요즘 그럽니다.

“진주씨, 십 년 전이랑 똑같구나. 내가 죽 사주고 싶다.”

저는 온 국민의 우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고, 매일, 매순간, 그의 죽음을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제 손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내지 못할 것을 압니다. 몇 번 이 일을 고백한 바 있지만, 평생 동안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죄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서른 살의 죄가 마흔 살의 죄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 죄를 부인할 마음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역사의 죄인이며, 그 트라우마를 안고 어떤 방법으로든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

시간이 흘러 조직을 떠나고 보니, 조금 더 선명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기사를 쓰는 일부 후배 기자들을 볼 때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시를 쓰고, 세상을 바꾸고 싶고, 그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은 어린 친구들이, 조직 속에서, 조직의 좋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죄를 지을 때, 십 년 뒤 저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만큼은 아니어도, 평생 그 이름과 살아가야 하는 친구들 때문에 슬펐습니다. 그들은 꼭 과거의 저 같았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때도, 김용균 때도 그랬습니다. 슬펐습니다.

그 때도 제 미래를 조금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판사 한 분이 저를 불러 말씀하셨죠.

“앞장 서 칼을 휘두르다 화살받이가 되지 마세요. 로얄들은 손에 피 안 묻혀요. 어쩌려고 그래요?”

*

광우병과 용산과 노무현을 거치며, 사람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오류가 많으며, 가슴 아픈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죄가 얼마나 큰지도 새록새록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조직 때문에, 사람 때문에, 스스로에게 거슬리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교사에 의한 성폭력 생존자의 딸이어서, 이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웅크려 유예된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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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옛 중앙일보 기자는 그런 가짜 뉴스 공격이 어떤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는지 짐작이나 하고 그런 글을 썼을까 싶다. 대통령 자식 문제를 건드리면 사람들은 내용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전에 “또야?” 하고 짜증을 냈다. 이진주 기자가 기사를 쓸 즈음에는 “노무현 당신도?”까지 이르렀다. 노무현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은 자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도 광우병 사태 직후 그 뉴스가 불거졌을 때 사실관계를 따질 생각은 못하고 절망부터 했으니까. “당신도 그랬어?” 하고.

이쯤 되면, 그게 아니다, 그건 가짜뉴스다 하는 후속 기사가 아무리 쏟아져 나온다 한들 내 연배 사람들은 눈을 닫고 귀를 막는다. 정치 혐오증이다. 그래도 한때나마 지지했던 사람한테 받는 배신감은 몇배나 더 큰 법이다. 이른바 한국의 유력 보수지들은 바로 그것을 노렸고 ‘503’을 앞세워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

‘503’은, 한때는 노무현 지지자이기도 했으나 정치혐오증에 걸려버린 앞서 말한 내 연배 사람들의 지지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0대의 반란으로 이겼다고 했으니까. 내놓고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이런 사람들 주변에 의외로 많다. 한때는 그래도 전두환 타도를 외쳤던 50대 사람들이다.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가 노건호 관련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3565028 . 10년 뒤 이진주 기자는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2009년 당시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가 쓴 노건호 관련 기사 중 일부. 기사가 쓰인지 10년만에 이진주 전 기자는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이진주 전 기자의 발언을 부인했다.

그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간추려 말하자면 이진주 옛 중앙일보 기자는 노무현의 자식과 관련해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썼노라고 했다(소설 폄하 아닙니다. 그냥 흔히 쓰는 평범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했고 반성한다고 했다. 그이가 말하는 이른바 ‘조중동’ 출신 기자 가운데 지금까지 이나마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기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분노에 가득 차 있다. 그 글에서는 기자로서 했던 바로 그 일이 한국 사회에 어떤 불행을 끼쳤는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언급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자기가 했던 행동, 그런 기자들의 그런 기사들이 모여서 한국 사회에 어떤 불행을 가져왔는가에 대한 통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기자로서의 능력과 인맥이 탁월해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미국행 명령을 받을 정도의 대단한 기자라면 그이가 말하는 조중동, 사람들이 한국 최고의 신문들이라고 믿는 조중동의 가짜 기사 생산물 중에서도 가장 양질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 순도높은 가짜 기사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바로 내 또래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혐오증을 갖게 하고, “자식 문제는 없을 테니 박근혜 찍는다”를 유도하고, ‘503’ 당선을 이끌어냈다.

그 이후에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대통령이 탄핵되는 혼란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내 연배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태극기부대는 지금도 건재하다. 이진주 전직 기자의 반성문은 이런 내용에 대한 언급 혹은 성찰은 하지 않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잘못한 것 같아요’라고 읊어대니, 사람들이 싸늘함을 넘어 화를 내는 것이다.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 (출처: 걸스로봇) https://www.facebook.com/GirlsRobot/photos/a.1522350701425120/2315779672082215/?type=3&theater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 (출처: 걸스로봇)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는 데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나도 노정연 씨 호화 아파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릎이 꺾이는 듯한 느낌을 맛보았다. 노통이 타계하고 나서도 자식 문제는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뉴저지에 가서, 그 호화판 아파트 뉴스가 가짜뉴스였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몸을 떨며 분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단언하건대, 가짜뉴스가 틀렸다는 내용을 아무리 올려도 내 연배의 대다수는 보지도 믿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진주 기자가 말하는 바로 그 조중동이 만든 충격에서 벗어날 만한 유연성이 떨어지는 세대이다. 수많은 이진주 기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물, 그것이 ‘503’이고, 오늘날 한국의 모습이다.

잘못했다고 했다. 손에 피를 묻혔다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동원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텐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그 글은 반성문으로서의 효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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