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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이슬람주의의 불길

¶. 이 글은 ‘제3공화국과 안정화 프로그램’에서 이어집니다.

 

 

시계를 돌려 다시 1970년대로 가보자.

이 시기 터키에서는 좌익의 지적, 문화적 영향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터키에서의 좌파는 다른 많은 곳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제3세계에서 급성장한 마오주의 혁명론과 게릴라 투쟁에 자극 받으면서 점차 급진화되었다. 동시에 좌파적 대의에 공감하지 않는 도시 엘리트들의 불안감은 계속 커져나갔다. 터키는 북쪽으로 전통적 안보 위협이었던 소련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안팎으로 포위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계몽의 화덕’과 ‘튀르크-이슬람 종합’

1970년, 일군의 정계와 재계, 대학가의 보수적 인사들이 모여 바로 그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조직 하나를 창립했다. 바로 ‘계몽의 화덕(Aydınlar Ocagı)’이었다. 이 조직은 좌익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독점을 깨고 보수적 가치를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하였다. 관련 인사들을 모은 세미나가 조직되었으며,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주장을 알리려고 했고 문화, 교육, 사회, 경제 등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정책을 제시하여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계몽의 화덕' 로고와 심볼 (출처: aydinlarocagi.org) http://aydinlarocagi.org/

보수적 가치를 표방한 ‘계몽의 화덕’ (출처: aydinlarocagi.org)

하지만 터키 사회의 모순을 파고들어 계급투쟁과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좌파를 따돌리기에 기존의 지배적 사상인 케말리즘은 미흡한 점이 많았다. 케말리즘 정당인 공화인민당부터가 이미 좌익의 영향력에 잠식되어 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르크시즘과 케말리즘에서는 찾지 못하는 매력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계몽의 화덕’ 위원장이었던 이브라힘 카페소을루가 택한 대안은 바로 이슬람이었다. 물론 종교의 사회적 참여를 극도로 경계했던 군부의 입맛에 이슬람을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페소을루는 군부가 좋아하는 튀르크 민족주의와 이슬람을 결합하여 이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튀르크-이슬람 종합(Turk-islam Sentez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 내용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이전 고대 돌궐에서부터 이미 튀르크인들은 이슬람의 핵심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튀르크 민족이야말로 순니파 이슬람과 가장 적합하며, 강력한 무력으로 이슬람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고대 돌궐 문화와 이슬람 문화 모두 정의 관념이 강했으며, 일신론을 믿었고(돌궐인들의 천신 텡그리와 이슬람의 알라), 전통 가족의 가치를 믿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민족주의행동당과 민족구원당을 비롯한 우익 진영은 ‘튀르크-이슬람 종합’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크 민족과 이슬람 종교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기를 강요했었다. 하지만 최소 600년 간 터키인의 정신세계의 근간이었던 이슬람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서구화된 엘리트들에게나 환영 받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타튀르크가 공화국의 근간으로 삼은 튀르크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슬람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파타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파타 케말 아타튀르크. 그의 튀르크 민족주의는 70년대 들어 이슬람과 결합한다.

묵인되는 이슬람

군부도 ‘튀르크-이슬람 종합’이 세속주의에 은근히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먼저 이들도 강력히 성장하는 좌파에 상당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도시 빈민가에 대거 확산된 상태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소련이 개입한다면? 거기에 소수종파 알레비와 소수민족 쿠르드인들 사이에서도 좌파 사상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던 차였다.

군부 일각에서 보기엔 세속주의를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좌파를 막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였고, 다수 대중에게 훨씬 친숙했던 이슬람이라는 유령을 불러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이념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바로 1980년 쿠데타의 주역인 케난 에브렌이었다.

에브렌은 정권을 잡자마자 곧바로 이슬람이 지닌 가치에 주목했다. 1980년의 쿠데타가 이전 쿠데타와 비교해서도 유독 유혈낭자했기 때문에 정통성을 특히 더 신경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학교 교육과정에는 ‘종교와 윤리’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과거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종교와 윤리 과목에서는 순니파 이슬람의 핵심 교리와 가치를 가르쳤고, 동시에 애국주의와 가족에 대한 헌신 등을 이슬람의 의무로 규정하고 교육하였다.

쿠데타의 주역 케난 에브렌(Kenan Evren)도 이슬람에 우호적이었다.

쿠데타의 주역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은 ‘튀르크-이슬람’의 열혈 지지자였다.

외잘 총리도 이슬람이 새로운 역할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그 자신부터 이슬람에서 중요한 금요 예배에 최초로 참석한 총리였다. 외잘의 조국당은 당의 지도 원리로 ‘튀르크-이슬람 종합’을 채택하였다. 이제 이슬람 세계에서 세속주의의 보루였던 터키에서도 이슬람주의가 태동할 토양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이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활동할 수는 없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해금 분위기를 적극 활용해 자신들의 사회적 공간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외잘 정권이 시작된 이래로 모스크 건설이 급증했고, 이슬람계 학교의 수도 늘어났으며, 교육과정에서 이슬람의 영향도 커져나갔다.

이슬람을 다루는 출판업도 급성장했으며, 이제 국영 라디오와 TV 방송국에서도 더 많은 시간을 이슬람에 할애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등한시 되었던 라마단 금식 또한 가장 중요한 종교적 행사로 부활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공적 영역에서 터키가 세속국가로 남겠다고 선언한 것과는 전혀 별개로,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진행되고 있는 파도였다.

왜 이슬람은 1980년대에 부활했는가?

무엇이 갑작스럽게 잠들어 있던 이슬람교를 깨웠던 것인가?

이슬람의 갑작스러운 부활은 너무나 논쟁적인 사안이라서 그동안 다양한 설명이 존재해왔다. 그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이슬람교는 정치와 종교를 태생적으로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으며, 따라서 호시탐탐 국가 권력을 장악해 사회를 종교 교리에 맞게 재편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슬람의 부활은 전근대 암흑시대로의 퇴행이며 근대와 계몽의 빛이 사그라들게 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각지에서 정권을 잡고 시행한 정책들을 고려하면 전적으로 틀린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의 설명이 전부 옳다고 하더라도 시점의 문제가 남게 된다. 왜 하필 케말리즘이 성립되었던 1923년부터 약 50년 간 잠잠하다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그토록 엄청난 성장을 이룬 것일까? 이슬람의 부활과 그 결과인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전체 이슬람 세계를 논하려면 또 다른 글이 필요할 것 같으니, 먼저 여기서는 하나의 대표 사례로서 터키를 더 상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터키에서 이슬람은 왜 유독 70, 80년대에 다시 부흥했을까?

터키에서 이슬람은 케말리즘 성립 시기(’23년)부터 약 50년간 잠잠하다가 70, 80년대에 부흥했다. 도대체 왜?

게제콘두: 국가가 그곳을 버렸을지라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1970년대 터키가 겪던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는 결국 기존의 정치적 기획이었던 케말리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극단주의 폭력 단체들의 난립은 도시에 갑작스럽게 늘어난 ‘게제콘두(Gecekondu; 빈민가)’의 증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인구는 증가했지만, 토지개혁이 미진하여 농업생산성은 늘 제자리 걸음이었다. 광활한 아나톨리아에서 앙카라, 이즈미르,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이촌향도의 물결이 있었고, 게제콘두는 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서구화된 엘리트들은 게제콘두 주민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경멸한 채, 제대로 된 사회기반시설과 교육도 제공하지 못했으며,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사회적 상향이동은 커녕 고착화된 빈곤에 몸부림쳐야 했다. 이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 바로 숱한 급진 청년단체의 등장과 테러 활동이었다. 터키 작가 라티페 테킨은 1984년에 발간한 [쓰레기 이야기] (Cop Masalları)에서 게제콘두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물과 일자리를 달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 쓰레기와 공장 폐기물 때문에 확산되고 있는 전염병의 치료약을 달라고 울었다.”

터키 이스탄불의 빈민가('게제콘두') 모습 (1968)

터키 이스탄불의 빈민가(‘게제콘두’) 모습 (1968)

하지만 이들은 절망에만 빠져 비틀거리지 않았다. 게제콘두 주민들은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었고, 정부와 엘리트가 버린 빈민가에서 독자적이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미국의 기자이자 안보 전문가인 로버트 카플란은 앙카라에 있는 게제콘두인 ‘알튼다아'(황금산)를 방문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앙카라의 가파른 진흙길 언덕에 형성된 빈민가 알튼다아, 혹은 황금산은 시각상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알튼다아는 콘크리트 블록과 골함석으로 쌓아올린, 빈민들의 꿈이 어린 피라미드다. 하나하나의 판잣집이 다른 판잣집 위에 얹혀 있는 모양의 피라미드는 불편한 자세로 힘겹게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모습이다. 그 하늘이란 시내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부유층의 세계다. 나는 지구상 어떤 다른 곳에서도 가난을 탈피하려는 인간의 애절한 노력이 이곳에서처럼 마음에 사무치는 상징적 형태로 구조화된 것을 본 적이 없다.

– [무정부 시대가 오는가] 49쪽

이슬람의 사회적 응집력 ‘아사비야’ 

카플란은 바로 그 곳에서 세속주의 60년 통치가 결코 끊어낼 수 없었던 터키 이슬람의 600년 전통을 재발견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여타 빈민가, 예컨대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과는 전혀 다르게, 황금산에서 ‘안전’과 ‘질서’를 느꼈다. 황금산은 결코 불신과 범죄가 횡행하는 다른 제3세계 빈민가가 아니었다. 빈민가 안의 가정들은 서로가 응집력을 갖고 뭉쳐 독자적인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비장의 빈민가와 황금산을 구분지어준 가장 큰 요소는, 다름 아닌 이슬람이었다.

게제콘두 주민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원래 갖고 있던 사회적 연결망을 상실하는 위기를 겪었다. 농촌에 있을 때 의지하던 전통 공동체의 상호부조와 연대감은 원자화된 도시 사회에서 더는 통하지 않았고, 만성화된 실업과 빈곤, 극도로 부족한 사회기반시설은 삶의 조건을 위협했다.

하지만 게제콘두 주민들은 이슬람을 매개로 다시 응집하여 협력할 수 있었다. 모스크에 모여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류했으며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기반시설 대신 무슬림의 협력이 들어섰다. 농촌에서 밭일을 하느라 라마단 금식을 지킬 수 없던 이들은 도시에서 다 같이 금식의 계율을 지키며 자신이 거대한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갔다.

강렬한 종교적 체험은 다시 높은 수준의 공동체 상호부조로 이어졌다. 카플란이 황금산에서 발견한 질서정연한 모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원천은 이슬람이라는 뿌리깊은 문화적 접착제가 제공하는 사회적 자산, 오래전 마그레브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이 주장한 ‘아사비야’(asabiyyah; 유목민 부족을 협력하게 하는 고도의 사회적 응집력을 뜻하는 아랍어)였다.

이븐 할둔(혹은 이븐 칼둔)은 이븐 할둔(Ibn Khaldun)은 고전이 된 그의 책 [역사서설]에서 높은 아사비야를 지닌 유목민이 낮은 아사비야를 지닌 도시민을 제압하고 왕조를 세우고, 이들이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 아사비야를 상실할 때가 되면 사막에서 높은 아사비야를 지닌 새로운 유목민이 등장하여 다시 도시민을 제압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주장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2.5)

이븐 할둔(혹은 이븐 칼둔 Ibn Khaldun)은 고전이 된 책 [역사서설]에서 높은 아사비야를 지닌 유목민이 낮은 아사비야를 지닌 도시민을 제압해 왕조를 세우고, 이들이 도시 생활에 젖어들어 아사비야를 상실할 때가 되면 사막에서 높은 아사비야를 지닌 새로운 유목민이 등장하여 다시 도시민을 제압한다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주장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2.5)

제국의 폐허 위에서 발견한 기억

한편 도시의 미디어는 이들에게 전통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게제콘두에서 이들은 농촌에서 보지 못한 라디오와 TV를 접했다. 새로운 미디어는 이들에게 과거 세속주의 엘리트층의 전유물이던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법’을 터득했다.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고대 돌궐로부터 시작되는 튀르크 민족의 역사와 아타튀르크의 영웅적 항쟁으로 획득한 터키 공화국의 독립, 공화인민당 엘리트들이 수행한 근대화 프로그램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프랑스나 독일의 도시 중산층과 비교해서 전혀 부족할 것이 없는, ‘문명화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게제콘두 주민들에게 사정은 전혀 달랐다. 카플란은 테킨의 [쓰레기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 소설에는 빈민촌의 무단 거주자들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옛날에 오스만 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는 대목이 있다. 그런 역사는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런 얘기를 처음 들었다. 비록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와 그 개가 그리스인들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터키 역사의 농축된 의미와 민족주의는 터키 중산층, 혹은 상류층이나 나처럼 터키의 개념을 파악할 필요를 느끼는 외국인의 영역이었다.”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교육에 접근하기 시작한 터키 빈민들은 바로 게제콘두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떤 역사적 서사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드디어 직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체성의 근간인 이슬람을 앞세워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꼈다.

터키 공화국은 실체를 알 수도 없는 돌궐인이나 전혀 다른 언어를 썼던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를 이은 국가가 아니었다. 터키는 바로 100년 전만 해도 3개 대륙에 걸쳐 있는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민족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을 계승한 나라였다. 그들이 보기에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세속주의 엘리트는 과거 오스만 제국 시대 외국에 나라를 팔아넘겼던 이들과 다름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시기별 영토 . 터키 빈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며 현실의 가난을 잊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의 시기별 영토 . 게제콘두의 빈민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법을 터득해 갔다.

이슬람주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무기

80년대 마침내 국가의 묵인이 시작되자 이슬람은 이런 사회문화적 토양을 딛고 들불처럼 확산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이 거대한 사회적 열정을 투사할 정치적 이념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마드라사(이슬람 학교), 모스크, 미디어를 등에 업고 이슬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운동이 등장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이슬람주의 운동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 새로운 이슬람 계열 출판사들이 외부의 ‘신선한’ 시각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집트의 사이드 쿠틉, 이란의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알리 샤리아티, 파키스탄의 아불 알라 마우두디 등 터키 바깥의 이슬람 세계에서 나온 이슬람주의 서적들을 찍어냈다.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호메이니.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뽑힌 이란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

이슬람주의는 여느 정치 이념이 그렇듯이 과거에 대한 반감을 부추겨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공유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경멸하는 세속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불신을 키워갔다. 또한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지난 60년 간 기회를 줬는데도 경제를 성장시키지 못했고, 일자리를 주지도 못했다. 이슬람주의는 이제 그 가증스러운 엘리트에 대한 복수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약속했다. 이슬람주의 아래에서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이 결합했고, 기존 좌파는 이슬람주의와의 경쟁에서 차츰차츰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외래사상이었다.

케난 에브렌의 임기가 마무리된 해인 1989년, 이슬람주의 성향의 여학생들이 대학교를 비롯한 공공장소에 히잡을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조국당 내의 다수 파벌로 등장한 ‘신성동맹’은 이들에 공감하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에브렌은 마지못해 헌법재판소에 이 문제를 넘겼고, 대학교에서 히잡 금지는 제한적으로 해제되었다. 이제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그동안 눈 감고 외면해왔던 존재가 눈 앞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이슬람주의는 이제 현실이었고, 그들의 세속적 도시생활을 위협할 것이 틀림 없었다. 1989년의 히잡 논쟁은 1990년대에 터키에서 본격화될 세속주의-이슬람주의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히잡을 금지하는

’89년, 이슬람주의 성향의 여학생들은 공공장소에서 희잡을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청원을 냈고, 이는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90년대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 투쟁의 서곡.

회색 튀르크, 아나톨리아 호랑이

하지만 이런 분노는 이란처럼 혁명을 일으키는 데 유용할지는 몰라도 선거에서 이기는 데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쿠데타로 얼룩지긴 했어도 어쨌든 터키는 수십년의 선거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나라였다. 다시 말해 이슬람주의자들이 각성한 게제콘두 주민들의 박탈감을 자극해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낼 수는 있어도, 그런 분노만으로 선거에서 이기고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진행된 외잘 개혁은 이 부족한 점을 메워줄 완벽한 사회집단을 탄생시키게 된다.

1983년 처음 집권했을 당시 외잘은 재계와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좌익 소요을 방지하고 터키 경제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자 이스탄불 재계의 업계단체였던 터키산업기업인연합회(TUSIAD; 튀시아드)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하지만 이스탄불 재계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기업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외잘의 자유화 개혁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외잘은 자신들이 누리던 지대와 특권을 포기하고, 국제시장에서 경쟁하도록 몰아넣고 있었다. 결국 튀시아드는 외잘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논란 많던 안정화 프로그램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견고한 지지 그룹이 필수적이었기에, 외잘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바로 그 때 외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스탄불 대기업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아나톨리아의 중소기업들이었다. 아나톨리아 중소기업들은 기존 케말리즘 계획경제에 가장 불만이 컸던 세력들이었고, 외잘이 세계 시장을 열어주자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기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외잘도 이들에게 수출 차관과 세금 환급 등의 인센티브를 주어가며 국제 시장에서 경쟁을 하도록 부추겼다. 외잘 개혁은 몇몇 거대 재벌 기업만 성공시킨 것이 아니었다. 사실 사회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성장한 아나톨리아 중소 자본가들, 즉 ‘아나톨리아 호랑이들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아나톨리아 호랑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세계화된 터키 경제 속에서 기회를 잡고 사회적 지위를 빠르게 올렸다. 다수 터키인들이 외잘 개혁에 의해 힘겨운 시기를 보내긴 했어도 수출 기업과 연관된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은 큰 수혜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도시화되고, 교육 받은, 사회적으로 상향 이동을 한 전혀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근대화된 사회의 일반적인 중산층의 모습, 즉 개인주의나 타자에 대한 관용이나 다양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거의 다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과거 ‘검은 튀르크’ 시절에 갖고 있던 종교, 즉 독실한 이슬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혹자는 이런 모호한 모습을 두고 시장개혁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중산층‘회색 튀르크’라고 칭했다.

투르구트 외잘 (1986년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은 군부로부터 지원받지 않는 '유일한 야당'이라는 이유로 어부지리 혹은 반사을 얻어 총선에서 제1당이 되고, 투르구트 외잘은 총리에 오른다.

투르구트 외잘(1986년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 총리의 ‘안정화 프로그램'(경제개혁)은 재벌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의 중소 자본가들’과 함께 이슬람 신앙을 가진 중산층, ‘회색 튀르크’를 출현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문명의 충돌

회색 튀르크의 등장은 터키 정치에서 새로운 시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과거 신실한 무슬림은 곧 촌스럽고, 후진적이고, 교육 받지 못했고,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신실한 무슬림이면서 동시에 세련되고,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들은 이제 돈까지 갖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이스탄불의 세속주의 성향 기업인, 중산층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었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그들은 더이상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너무나도 낡았고 고루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적시 생산 체제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정보 시대가 되자, 그 격차는 더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케난 에브렌이 퇴임하고 투르구트 외잘이 그 뒤를 이으면서 1989년부터 터키도 완전한 민주주의로 이행했다. 탈냉전의 1990년대를 맞이하면서, 터키에서도 이제 정치적 전선은 전혀 새로운 곳에 놓이고 있었다. 세속주의 엘리트들이 무시했던 역사와 지리가 21세기의 문턱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것이다. 1) 한쪽에는 겨우 한 두 세대만에 경험한 급속한 도시화를 통해 종교성을 각성한 빈민이 있었다. 2) 다른 쪽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의 영향에 자신들의 문명적 생활양식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한 도시 중산층들이 있었다. 3) 그 가운데에는 종교성과 현대 문명의 양립을 주장하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터키 경제 안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신흥 중산층들이 있었다.

도시화된 빈민과 기존의 중산층 그리고 신흥 중산층

세속주의적 도시 중산층 vs. 도시화를 통해 종교성을 각성한 빈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이슬람과 문명의 양립을 주장하며 성장한 신흥 중산층.

이 세 사회집단은 모두 터키인이었고, 많은 것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아마 세속주의적 중산층들은 터키어를 못하더라도 시리아나 이집트의 세속주의적 중산층에게 더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를 지지하는 빈민가 주민은 다마스커스와 카이로의 무슬림형제단에게서 아주 확실한 연대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성장한 ‘무슬림 부르주아’들은 안 그래도 서로가 긴밀한 사업 네트워크를 맺으면서 협력하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초국적 정체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정체성보다도 더 강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문명적 의식이었다.

1990년대가 되자, 터키 전역에서 문명은 충돌했다. 이스탄불의 중심가, 앙카라의 게제콘두, 동부 쿠르드 촌락을 가로지르며 말이다.

(계속) 

참고 문헌:

  • Erik Zurcher, [Turkey: A Moder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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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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