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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시대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 ‘축의 시대’(Axial Age)[footnote]축의 시대(Axial Age)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그의 책 [역사의 기원과 목표] (1949)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 정신의 기원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대”로 축의 시대를 정의했다. 즉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기, 특히 종교와 사상이 생겨난 시기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여기에서 ‘축'(軸)은 말 그대로 바퀴의 중심에 끼우는 막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그 축을 의미한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야스퍼스의 이 개념을 빌려와 그 시기를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300년까지로 설정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900년에서 기원전 200년까지로 보기도 한다. (편집자) [/footnote]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300년까지 약 500년간 전개된 이 시기에 유라시아 각지의 농경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상적 혁신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유가, 도가, 법가 등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제자백가, 불교자이나교의 남아시아 사상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그리스 철학자들이 모두 이 시기에 태동했다. 이후 기독교, 이슬람교, 시크교, 혹은 신유학을 포함하는 모든 고등종교는 기본적으로 축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계라는 거대한 바퀴의 중심이 되는 되는 사상과 종교는 '축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태어났다.
거대한 바퀴(세계)의 중심이 되는 되는 축(사상과 종교)은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으로 명명한 시기에 폭발적으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런 비교적 짧은 시기에 집약적으로 종교와 사상의 만개가 시작된 것인가? 적어도 천재적인 사상가들끼리 텔레파시를 공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서아시아(+ 그리스), 남아시아,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이 직면한 어떤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축의 사상을 만들도록 몰아붙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축의 사상은 그렇다면 어떤 전환을 이루어냈는가? 짧게 요약하자면, 질서가 없는 세계에서 질서를 만들어내었고, 모든 인간을 어떤 질서와 윤리규범 앞에서 평등하게 만들었고, 그를 통해 고대 신왕(God-King)을 추상적인 왕조와 국가로 전환해냈다고 할 수 있다.

질서 

먼저 질서를 살펴보자. 축의 사상 이전의 원시종교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추상적 관념과 질서를 탐구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인식하는 것 너머의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자연현상의 작동원리에 초자연적인 설명을 붙이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논리나 체계성을 갖지는 않았다. 만약 들판에 불이 붙었다면 그것은 불의 정령이 힘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늪에 빠져 죽었다면 그곳에 있는 물의 요괴가 장난을 쳤기 때문일 것이다 등등. 기원에 대한 탐구도 있었으나 창조 설화는 그저 세계를 있게 한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지 세상에 질서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이 시기 신화는 그저 파편적인 사실들을 관찰하고 꿰내어낸 것에 불과했다.

인간은 '개념'을 통해 세계를 추상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개념’을 통해 세계를 추상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의 사상 이래로 무언가 다른 ‘개념’이 도입된다. 세상에 원초적인 의미만 부여했던 인류는 인류는 이제 거대한 서사를 통해 더욱 체계적이고 추상적인 설명틀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역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서사들의 세부사항은 달랐다. 예컨대 유일신의 질서와 모든 것을 굽어보는 도덕적 신은 조로아스터교와 히브리즘이 발전시켜나갔다. 혼란한 정치 구도에서 바른 사회를 고민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제자백가의 몫이었다. 생로병사로 귀결되는 무의미한 인생에서 열반을 찾아내는 것은 부처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들이 있다. 첫째로 지역 내에서 이 같은 사상적 스펙트럼은 대체로 모두 관찰되고, 둘째로 곧이어 문명 교류 채널을 통해 지역 간 사상의 교환과 흐름이 촉진되었다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시기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 사람들은 질서와 의미에 굶주려했다.

질서 vs. 신왕 

우주를 관할하기 시작한 추상적 질서는 곧바로 정치권력, 신왕과 경합하기 시작했다. 일단 신왕이 무엇인지 설명해야겠다. 초기 전쟁을 통해 성장한 군사지도자들은 권력을 항구적으로 공고히하기 위해서 신화를 조작했는데, 자신이 초자연적인 존재의 후손 혹은 현신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위대한 군사지도자일지라도 본인은 아무것도 한 아들에게 정치권력을 물려주는 게 정당화되기는 힘들었다. 이 같은 세습 시도는 평등지향적인 인간의 본성에 맞서 엄청난 저항에 직면했으나 전쟁이 문화적 선택압을 제공한 몇몇 사회에서는 힙겹게나마 성공할 수 있었다.

초기 전쟁의 군사지도자들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신화를 조작한다.
초기 전쟁의 군사지도자들은 자신을 신격화하는 신화를 조작한다.

이 단계까지 온 신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며 종교적 카리스마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믿음까지 구성원에게 강제했다. 16세기 예수회 수도사들이나 19세기 인류학자들이 고대 국가로 이행하기 직전의 추장사회를 보고 관찰한 기록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보편적으로 관찰된다. 예컨대 폴리네시아에서는 추장 혹은 왕으로 갈수록 절대적인 마나(mana; 만물을 창조한 초자연적인 기운)를 보유하고 있고, 노예로 갈수록 마나는 점점 옅어져 간다. 이처럼 고대 국가는 극도로 불평등한 문화적 개념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했으며, 인신공양을 비롯한 국가의 공식 의례는 엄청나게 폭력적이었으며 유혈이 낭자했다. 아스텍과 은나라가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인신공양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축의 사상은 이 불평등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ā;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야(Yahweh; 유대교의 유일신), 다르마(Dharma, 法; 인도철학의 자연법), 천명(天命; 하늘에서 부여받은 명령 또는 운명) 앞에서 평등했다. 물론 왕, 귀족, 백성, 노예는 여전히 불평등했기 때문에 현실 정치권력에서 축의 사상들의 질서는 정지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최소한 축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존 신왕 체제의 불평등이 무언가 문제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축의 사상에서 명시한 질서들을 수호하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존재라고 천명하며 권력을 정당화했다. 스스로가 신 그 자체라고 외치는 군주들은 대체로 미친 자로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왜 이런 전환이 일어났는가? 

자,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자. 왜 이런 전환이 일어난 것인가? 축의 사상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매력적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문명 붕괴 이후 등장한 2차 축의 사상(대승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은 문명 발전의 단계에 상관 없이 보편적으로 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원전 500년에 등장한 1차 축의 사상 고도의 문자전통 도시성을 요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몰라도 일정 수준의 식자 엘리트들과 도시성을 오랜 기간 유지하면 축의 사상이 출현할 제반 조건을 갖췄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많다. 일단 축의 사상이 지닌 엄청난 확산력, 그리고 ‘왜 그 당시 유라시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 사상들이 출현했는가’하는 시기의 문제가 설명이 안 된다는 점이다.

1. 니콜라 보마, 에너지 획득 가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첫째는 2015년에 니콜라 보마(Nicolas Baumard) 등이 제시한 ‘에너지 획득 가설’이 있다(논문 ‘요약’ 링크). 여기서는 축의 시대 사상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을 1인당 1일 2만kcal의 에너지 확보로 간주한다. 이 임계점을 넘으면, 당장 자원을 처분하여 보상을 얻는 ‘빠른 전략’에서 조금 더 기다려서 더 많은 보상을 얻는 ‘느린 전략’이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축의 시대에서 ‘느린 전략’은 영성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각성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세계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야하며, 당장의 물질적 결핍으로 고통 받지 않아야 했다. 핵심적인 축의 사상들이 거대 제국보다는 부유한 도시국가, 소국에서 출현한 것은 이 가설을 어느 정도 지지해준다.

에너지 가설

2. 피터 터친, 유목민 가설 

다른 가설은 2016년에 피터 터친 등이 기한 것인데, 그의 책 [초협력사회]에서 잘 소개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기마민족이 가져다준 충격이 축의 사상을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킨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유목민이 빠른 기동성으로 고대 국가의 전쟁에 충격을 주기 전까지는, 신왕 사상 정도로도 국가를 유지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신왕과 함께 생명력을 나눠받은 조직화된 소수의 무력은 얼마든지 승자연합을 구성해 다수를 지배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신속하게 움직이는 기마 유목민이 초원과 맞닿은 북쪽 변경지대 전체를 위협하자, 더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할 압박이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그 결과 왕과 백성을 질서 앞에서 평등하게 대하는 보편윤리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초협력사회

비판과 종합 

두 가설 모두 흥미롭다. 2018년 현재 그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별론으로, 내 나름으로 두 가설을 보완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첫째 니콜라 보마의 에너지 가설의 약점은 에너지 획득량 2만kcal 이전에도 축의 사상이 등장할 조짐을 보이거나 혹은 그 이후에도 축의 사상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초기 축의 사상에 영감을 주었던 많은 모티프들, 대표적으로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천년까지도 그 생애가 소급된다. 중국의 천명 관념 또한 그 무렵 서주 시절에 청동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로마 제국 시대 이후에도 축의 사상을 한참 동안 받아들이지 않은 아라비아의 사례도 있다.

분명 1인당 하루 2만kcal, 국제화된 도시, 식자층과 문자전통의 누적은 개인적 초월과 영성, 올바른 사회 등에 대한 질문을 촉발시켰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 안 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종교, 무엇보다 하늘 위에 올라 선악을 판단하는 “거대한 신”으로 대변되는 축의 시대 종교가 인간 사이의 신뢰와 협력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가 안 되어 있다.

둘째 피터 터친의 유목민 가설의 약점은 역시 유목민이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사회에서 활약하기 이전인, 혹은 유목민과 제대로 맞닦드리지 않았던 사회에서 축의 사상이 활발히 출현했다는 점이다. 제자백가의 경우 예컨대 법가를 채택한 진나라는 강족, 서융, 흉노 등 이민족과의 투쟁을 통해 단련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원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탄생했다.

그리스 철학도 기본적으로는 폴리스 간의 쟁투에 천착하여 등장했고 불교가 탄생한 갠지스 평원 또한 유목민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유목민 가설은 유목민과 투쟁하며 생존을 도모했던 고대 제국들이 축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확산시켜 제국 내의 이민족들을 통합하는 메커니즘은 잘 설명하지만 출현 자체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에너지 가설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에너지 가설과 유목민 가설만으로는 설명 안 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다면 보다 점진적인 과정으로, 두 가설을 종합해보면 어떨까? 먼저 1인당 2만Kcal의 에너지를 획득하는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되어 문명 외부 세계와 강도 높은 영향력을 주고 받는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전쟁과 교역은 문명 바깥 주변부를 문명 핵심부 깊숙히 끌어들이는 가장 중요한 기제였다. 장강 유역의 초, 오, 월, 인더스 평원에서 갠지스 평원으로의 중심지 이동, 기원전 1200년 지중해 서부의 바다민족 대이동은 기마 유목민이 아니더라도 문명 주변부가 문명 중심부로 놀라운 속도로 파고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말 그대로 중심부 속으로 침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중심부를 모방한 사회를 만들어 중심부를 확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두 기제가 다 펼쳐졌다.

이 때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은 철기의 도입 보병전의 확산이었다. 서양과 동양 어디서나 전쟁의 주력은 전차였고, 전차는 그 성격상 굉장히 엘리트 지향적이었다. 전쟁 또한 굉장히 의식적인 면이 강해 당시 종교적 믿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값싼 철기를 든 대규모 이민족 보병군단이 기존의 룰을 깨며 등장하자 사태는 달라졌다. 청동기 시대 고대 근동은 이에 적응하지 못해 한 번 붕괴했으며, 춘추시대는 바로 전국시대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공자, 노자, 장자
공자, 노자, 장자

따라서 이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것이 축의 시대 사상들에 각각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 없다. 군사적 혁신으로 인해 국가는 갑자기 대규모 동원이 필요해졌고 정치적 불안은 심화되었다. 이 같은 군사-정치적 요인은 다양한 정치철학과 통치의 논리,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철기의 도입은 농업생산력(에너지 획득)을 증대시켰는데, 이는 엘리트층에게 물질적 안녕을 줌과 동시에 사회불평등도 확산시켰다. 이 같은 경제적 요인과 곧이어서 등장한 심리적 요인(니콜라 보마의 가설)은 도덕적 사회에 대한 고민과 세계를 관할하는 질서에 대한 관념의 발전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사상들은 곧이어 발상지를 넘어 지역적으로 확산되었고 활발한 지적 생태계, 축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끝으로 이 모든 과정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영향을 끼쳐 유목제국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강력해진 정주세력은 곧 유목국가의 수립에 필수적인 약탈거리를 의미했다. 이 시기 페르시아인들은 중앙아시아를 바라보며 문명세계인 이란야만세계인 투란을 설정했고,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인들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국가들은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유목민 기마병의 압박은 고대 세계의 정치적 진화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로마, 한, 마우리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탄생하는 것을 자극했다.

그리고 제국의 핵심 소프트웨어는 바로 축의 시대 사상들(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유가와 법가, 불교)이었다. 제국의 화려한 수도에서 엘리트들은 축의 시대 성현들의 가르침을 외웠고, 관료들은 그 시대 집필된 통치술을 제국 각지에 적용하고 있었으며 이민족들을 점차 문명 세계로 동화시키고 있었다. 이 고전기 제국들이 붕괴하고 아라비아, 게르만 세계, 동남아시아, 한반도 등으로 축의 사상과 국가 체제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리고 이 글에 사용된 수많은 한자 어휘를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축의 시대의 유산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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