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스포일러 주의: 본문에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줄거리를 알 수 있는 서술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의 불안을 염려하는 독자께 알려드립니다. 독자에 따라 ‘약한 스포일러 ~ 다소 강한 스포일러’ 사이입니다. (편집자) [/box]
영화 [레미제라블](2012, 톰 후퍼)에 500만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회자한다. ‘감동적이다. 우리도 불신과 반목을 사랑으로 승화하자’는 이야기는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이어 가기 위해 [장발장]이 아닌 [레미제라블]을 읽거나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하는 게 유행일 정도이다. 대선 직후 이른바 ‘멘붕’에 빠진 야당 지지자들을 위한 힐링 산업의 장자 노릇을 하는 [레미제라블]은, 이제 거기에서 더 나아가, 2013년 새해 벽두 남한 사회 교양의 척도가 된 것 같다.
일반화된 교훈으로만 확대재생산 되는 영화의 감동
영화 [레미제라블]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모습을 보면 관객들은 분명 영화를 보고 감동 받은 것 같다. 아니 감동에 더해 ‘어떤 자극’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보고 감동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이나 감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낱낱이 분석하고, 해체하는 일이 꼭 권장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영화가 주는 울림을 언어화하지 않고,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비정형적인 울림 그대로 간직하는 것도 영화의 감동을 의미있게 기억하고, 보존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영화에서처럼 만연한 남한 사회의 불신과 반목을 사랑으로 승화하자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손쉬운 타협이고,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다. 이런 감상이 일반적으로 유통된다면 영화 [레미제라블]의 감동은 성급하게 일반화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지나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지나침이 남한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반목, 불신 그리고 분열을 종식 시킬 수 있는 어떤 중요한 통찰을 놓치는 것이라면 어떡할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받은 감동의 정체를 다시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 사랑으로 승화된 혁명을 보았나
더 구체적으로 묻자. 정말 우리는 영화에서 사랑으로 승화된 사회혁명을 본 것일까. 아니다. 사회혁명을 “꾀하는” 한 무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마지막 장면의 바람과 설렘을 보고 지레 혁명 성공의 축배를 들고 취해 있다. 우리가 봤다고 착각하는 건 다름 아닌 혁명의 환상이다. 실제 영화에서 사회 혁명은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형상화되는 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사회 혁명이 아니라 악의 평범함을 뚫고 나오는 소시민들의 자기 혁명이다.
나는 영화 내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랑과 용서, 자비 같은 착한 의도의 나열은 이 영화에 찍혀야 할 방점도, 영화가 주는 감동의 원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일상화 된 악이 치열한 자기반성을 통해 비로소 자기 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감동적이었다고 본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쉽게 지나치는 점이 ‘악의 평범성’이다.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하면 흉악범죄나 전범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를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악은 의외로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악은 내 처지에 급급해 나와 세계의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외면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악의 평범성을 통해 본 [레미제라블]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975)는 2차 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악은 특별한 게 아니라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조직에서 부여한 임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단지 ’자상한 아버지이고 성실한 공무원이고자‘했던 오히려 ’선량하고 순박한‘ 틈을 비집고 드러난다고 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깔려 있는 ‘악의 평범성’ 또한 그러하다. 영화에서 ‘악의 평범성’은 집중 연출되는 주인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코러스 즉, 주변 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 악의 평범성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처해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도 악은 가난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에 깊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세계와 내가 무관하다는 인식…악의 일상화
영화에서 악의 평범성은 신과 법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하려는 자베르 경감을 통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베르에게 법은 맹목적으로 정당화된 도그마다. 자베르 경감은 자신이 처해있던 악의 평범성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자멸한다. 전과자의 재취업 기회를 외면하는 사회와 판틴의 해고 원인을 제공하는 동료 노동자의 가난도 그 자체로 악의 평범성이다.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남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악은 평범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가시를 무시한 채 남의 가시를 먼저 뽑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다. 세계는 내가 있어야 비로소 있다. 그렇지만 이 세계가 나와 무관하다고 믿는 순박한 개인주의가 만연할 때 악은 일상이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이런 악의 평범성을 깨뜨리고 비참한 자기 한계를 벗어나려는 자기 혁명을 시도하는 모습을 영화가 보여줄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경험한다.
뮤지컬에서 장발장은 착한 자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장발장은 코제트를 입양하고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사랑’에 눈뜬다. 이런 형상화가 이루어진 이유도 종교인의 위대한 사랑이나 신의 이름으로도 극복되지 못했던 장발장의 또 다른 자기 한계가 가장 여리고, 약한 생명을 통해, 그러니 우리의 비루한 일상을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악의 소굴에서 성장한 에포닌에게 악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을 이어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에포닌이 짝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는 장면 역시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 번째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골목에 나와 흥건한 핏물을 닦아내는 장면에서 자기 혁명의 형상화는 극대화 된다. 가난과 비참한 생활에 벗어나려는 처절한 자기 반성과 자기 혁명의 바람은 광장으로 옮겨진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일상에 숨겨진 악을 응시하고, 이를 깨뜨리는 용기
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 사회 혁명을 보지 못했다. 어떤 유명 논객은, 잘못된 번역 자막을 그대로 받아들여, “혁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가에게 낚인 셈이다. 내가 본 영화 [레미제라블]의 의미는 궁핍한 삶에 찌들어 보지 못했던 스스로 내재한 악의 실체를 응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처절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그 악의 조건들을 깨뜨리고 자기 혁명을 이루는 과정 자체에 있었다. 이를 섣불리 사회 전체의 혁명으로 확대해석하지는 말자. 그게 내가 하고픈 말이다.
사회 혁명, 필요하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위대한 종교자 한 사람의 자비나 착한 자본가 한 사람의 선행으로 사회 혁명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등한시한 채 힐링을 선동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보다는 비참한 삶의 일상에 숨겨진 악을 끊임없이 응시해 발견하고, 그 악을 깨뜨리려는 용기, 즉, 자기 혁명이 먼저다.
“어떤 유명 논객은, 잘못된 번역 자막을 그대로 받아들여, “혁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가에게 낚인 셈이다.” 진중권씨 이야기군요.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악을 어떻게 응시하고 마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훌륭한 글이네요. 응?
좋은 관점입니다. 앞으로 좋은 글들 기대할게요^^
정말… 좋은 글입니다! 앞으로도 기대해용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회가 많은 문제들을 개인의 영역으로 돌리고 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의 악마성을 지켜보지 않는 세상인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다짐하고 됩니다. 괴물이 되지 말자고.
평범성, 이기주의, 스스로의 합리 속에 숨겨진 악을 직시하는 것은 세상 모두에게 공평하게도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죠. 그 과정 속에서 “자기안의 괴물”에게 먹혀버리는 일도 다반사. 매일 매일을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투쟁 속에서 살아갈 때 그것이 윤리, 정의 그리고 양심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아름다운 글 잘 보았습니다.
개인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이며, 세계와 무관하지않음이 아니라 타자화된 개인입니다. 자기혁명의 발화는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에서 잉태되는 것이지요, 김낙쑨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