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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헌법과 법률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이유가 되었건 한 개인의 권익이 다른 개인의 권익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경우는 첫째로 헌법과 법률에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을 구현해야 할 때, 두 번째로는 긴급피난의 경우에만 해당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 당시 분노했던 이유는 긴급피난의 상황에서 정부가 당연히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하는 아이의 생명을 구할 책임을 아예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이나 노약자석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성인 남성이 맨 마지막에 탈출한 것도 그렇다.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만에 나타나 했던 소리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참담한 것이었다. (출처: YTN 당시 보도 화면)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만에 나타나 했던 소리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참담한 것이었다. (출처: YTN 당시 보도 화면)

통제와 개입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식당에 앉아 가만히 밥을 먹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어떤 가족의 아이[footnote]본문에서 ‘아이’는 영아(젖먹이)·유아(생후 1년부터 만 6세까지의 어린아이)·어린이(대개 4, 5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아이)를 모두 포함하되, 특히 유아와 어린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편집자)[/footnote]가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다니고 있다.

이러한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까지 이 아이가 뛰어다닐 권리가 내가 조용히 식사할 권리보다 우선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난 해당 식당에서 방해받지 않고, 식사하기 위해 돈을 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권익 침해 상황에서 그 책임을 아이에게 돌릴 수는 없다. 아이는 누군가의 권리를 자신이 침해하고 있다는 상황 인식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항상 부모나 선생님과 같은 관리 책임자의 적절한 통제와 개입이 필요하다. 즉 아이로 인해 내 권익이 침해됐다면, 그 침해에 관한 책임은 아이가 아니라 당연히 그 ‘관리 책임자’인 부모나 선생님에게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그 ‘전설적인 명언’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애는 그럴 수 있지만,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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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차별? 적대? 핵심은 부모의 책임

그래서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어린이에 대한 적대적 시선은 실제로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두 부모를 향한 것이다. 아이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자녀가 없어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지 않겠다면, 타인의 권익 침해라는 결과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염두에 두고, 그 위험을 부모는 감수해야 한다.

물론 아이를 24시간 통제하는 것은 말도 안 될뿐더러 부모가 순간적으로 통제에 실패할 수 있다. 이 정도는 당연히 성숙한 성인이라면 허용하고 감내할 수 있는 권익 침해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의 미시적이고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이 정도’ 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만 존재했다면 과연 노키즈존이 탄생했을지 나는 의문이다.

실제로 노키즈존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전에 수도 없이 언론에 등장했던 소란을 부리는 아이와 통제하지 않는 부모 사례는 다들 잊으셨나보다 싶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아이를 미워해서 노키즈존이 생긴 것이 아니라, 통제하지 않는 부모가 발생시킨 위험이 자녀 있는 부모 전체 그룹으로 전가된 것뿐이다. 무슨 적대감이냐.

아이를 적대한다고요?
아이를 적대한다고?

세월호에 분노했으면서 어떻게? 

이에 대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회 전반이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이에 대해 되묻고 싶은 말은, 사람이 각자의 권익을 침해받는 데에 대하여 모두 서로 다른 관용과 불관용의 영역이 있는 법인데 모든 사람이 아이에 대해서는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상황에서 무한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느냐는 거다.

소득이 있는 성인이 사회생활을 할 때도 이런저런 권익의 충돌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육아를 할 때는 그런 것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합의로 당연히 제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토론 대상이긴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처럼, 때와 장소(상황)에 따라 구별되는 문제를 구별이 안 되는 것처럼 접근하는 것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논리적 오류이다. 모든 상황에서 다른 어떤 개인의 권익보다 우선시되는 개인의 권익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세월호 참사 때는 분노했으면서 노키즈존을 어떻게 용인할 수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당연히 그건 내 권익에 대한 침해에 베풀 관용의 수준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까지도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은 보통 두 관용어구 중 하나로 토론을 거부한다.

‘넌 애가 없어서 그래.’ 
‘네가 아이였을 때를 생각해 봐.”

노키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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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는 ‘노키즈존’에 관한 다양한 의견과 활발한 토론을 환영합니다. 아래 기사들와 권고, 그리고 성명은 노키즈존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판단해 여기에 정리해 올립니다. (편집자)

엄마 입장:

인권위 입장: 

시민단체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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