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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발음 습득의 과학과 ‘한국 발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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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영어에는 한국어 억양(accent)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중학교 입학 직전에서야 영어를 처음 접했고 이후 내내 영어를 글로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테이프 속 낯선 외국인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에 대해 가졌던 반감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해?’라는 생각이었달까요?

돌아보면 퍽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한국 억양을 완전히 없애고 그들처럼 되진 못했을 테니까요. 만에 하나 원어민들에 근접한 발음을 가지게 되더라도 제 이야기를 하면 되는 거였고요. 근거도 실익도 없는 반감이었던 셈이죠. 지금 와서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발음 좀 섞이면 어때? 내 일 할 만큼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시민에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인간의 뇌가 특정 언어의 발음을 인지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놀랍게도 한 연구[footnote]Molly McElroy, While in womb, babies begin learning language from their mothers(UWNews, 2013. 1. 2.) [/footnote]에 의하면 태어난 지 몇 시간 되지 않는 아기도 모국어와 외국어의 발음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모국어에 대한 감을 익힌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겠습니다.

패트리샤 쿨(Patricia Kuhl)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 두 아이의 발음습득 능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패트리샤 쿨(Patricia Kuhl)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 두 아이의 발음습득 능력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동의 발음 습득에 대한 전문가인 패트리샤 쿨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테드 강연(TED Talk)에서 아이가 아무 어려움 없이 어떤 언어든 습득할 수 있는 연령을 만 1세 정도로 잡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발음 습득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를 훌쩍 앞서는 때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는 R과 L 발음의 구별이 중요한 언어임에 반해 일본어는 그렇지 않은데요. 6~8개월 정도 된 아기들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와 관계없이 L과 R 발음을 쉽게 구별합니다. 하지만 10~12개월에 접어들면서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일본 아기들은 L/R 구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미국 아기들은 훨씬 더 구별을 잘하는 것입니다.

쿨 교수는 이것을 “세계시민(citizens of the world)”과 특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생후 6~8개월의 아기들은 어떤 국가의 소리 시스템도 자연스럽게 발달시킬 수 있는 세계시민임에 반해, 10~12개월 이후의 아기들은 한 나라의 시민으로 편입된다는 것입니다.

  • 6~8개월 아기(‘세계시민’): 어떤 국가 소리 시스템도 발달시킬 수 있음
  • 10~12개월 이후 아기(‘한 국가 국민’): 한 나라 언어권으로 편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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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동영상

유아기 발음발달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패트리샤 쿨(Patricia Kuhl) 교수의 테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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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계속 세계시민으로 남지 못하는 운명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단순히 외국어 발음 습득의 관점에서라면 안타깝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 중요한 이유가 있지요. 돌(12개월) 무렵의 아동은 모국어 발음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후 자신이 살아가야 할 환경으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아기들은 모국어 발달에 필수적인 L/R 발음을 구별하게 되지만, 일본 아기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국 아동들은 L/R의 차이에 더 민감해지지만,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아동들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신경 쓰지 않게 되죠. 어느 아동이든 자신이 처한 환경 하에서 생존하고 발달하는 데 최적의 상태로 두뇌가 적응하는 것입니다.

외국어 발음 습득이 어려운 이유 세 가지

초등학교 진학 이후에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학습자들은 대부분 외국어 억양을 가지게 됩니다. 사춘기 이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라면 모국어가 짙게 밴 외국어 발음을 피할 수 없죠. 저명한 언어교육학자이자 어휘 연구자인 폴 네이션(Paul Nation)은 그의 저서 [제2언어/외국어로서의 영어 듣기 말하기 교수법] [footnote]Teaching ESL/EFL Listening and Speaking[/footnote]에서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강한 외국어 억양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더 많은 설명을 위해서는 이 책의 78쪽을 참고하세요.
더 많은 설명을 위해서는 이 책의 78쪽을 참고하세요.

먼저 신체적인 이유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뇌의 유연성이 떨어져 새로운 언어의 소리를 구별하거나 만들기 힘들어진다는 설명이죠.

두 번째는 모국어 지식 때문입니다. 모국어가 주요 언어시스템으로 두뇌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를 든 L/R 발음의 경우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화자는 나이가 들수록 두 소리의 구별도, 발음도 힘들어지는 것이죠.

마지막으로는 심리적인 이유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발음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성격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발음을 익히는 일은 언어기능의 습득을 넘어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됩니다. 원어민 발음을 무작정 따라 하기를 거부했던 저의 모습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한국식 억양이 좋은 이유

소위 ‘국내파’였지만, 영어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여 꾸준히 공부했고, 영어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가며 읽기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빼어난 언어습득 능력을 지녔지만,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영어사랑에 감동한 부모님은 중학생이 된 그에게 미국의 한 명문대에서 열리는 영어캠프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며칠 후, 한 교수가 영어공부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려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습니다. 교수는 영어공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을 물었고 학생은 주저 없이 ‘한국식 억양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너의 발음을 명료하고 알아듣기 쉬워. 한국어 억양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미미할뿐더러 소통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강점으로 생각될 정도인데?”

영어학습에 대한 고민을 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발음을 ‘고칠’수 있을까 질문을 했더니,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은데 왜?’라는 답이 돌아온 것이죠. 하지만 이 면담 이후 발음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수년간 자신을 따라온 영어공부의 큰 짐을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민족지학 전문가인 사빌-트로이케에 따르면 비원어민 화자는 너무 원어민 같은 발음을 따라 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기도 합니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할 경우 원어민과 같은 언어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며, 맥락에 따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화용(pragmatics) 능력을 비롯 해당 언어와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높은 기준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발음만 좋은’ 혹은 ‘발음은 좋은데’라며 타인의 외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장면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 저 사람 발음 진짜 최고다. 그럼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농담하기 모두 완벽하겠지?
오! 저 사람 발음 진짜 최고다. 그럼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농담하기 모두 완벽하겠지?

외국어 발음은 나의 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혀를 살짝 말아야 하는 R 발음(/r/)을 위해 혀 밑동을 절개하는 야만적 수술은 사라진 듯합니다. 하지만 영어로 태교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여전히 영어실력의 기준은 원어민 발음(native pronunciation)이라는 신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듯합니다.

구어(spoken language)를 통한 소통은 결국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로 이루어지는 만큼 좋은 발음을 위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고 괴로워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상대를 깔보거나, ‘좋은 발음’이 수반하는 높은 기대감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발음은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사람들을 가르고 편견을 주입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 영어에 배어든 한국어 억양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저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지요.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나를 키워낸 이들과 소통하며 미세하게 조정된 안면 근육과 구강 구조, 한국어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기능 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앞으로도 영어공부는 계속되겠지만, 중학교 이후 저의 인생과 늘 함께였던 이 발음을 너무 미워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야만 발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이리 저리 판단하는 얄팍한 일을 그만둘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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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11. 언어는 습득하는 게 아니라고?
  1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3. 영어는 인풋? – 5. 인풋 가설의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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