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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처음으로 핵무기를 시험한 1953년 이후, 세계가 지금처럼 핵 전쟁의 위기에 근접했던 적은 달리 없었다. ‘둠스데이 시계’의 현재 위치를 설정하는 핵물리학자들의 진단에 따르면 그렇다. ‘지구의 종말의 날’을 뜻하는 ‘둠스데이'(Doomsday)는 그 가공할 파괴력과 위험성 때문에 흔히 핵 전쟁의 발발과 거의 동일시된다.

시카고대학에서 발행하는 핵물리학회지 ‘원자핵 과학자 불리틴’ (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은 1947년 이후 핵의 발달 상황과 국제관계의 긴장 수준을 반영해 비정기적으로 시계의 분침을 고쳤는데, 분침이 자정에 가까울수록 핵 전쟁의 위기가 높다는, 다시 말해 지구 종말의 날이 가깝다는 우려이자 경고였다.

또 다시 닥친 핵 전쟁의 공포 

지난 1월 24일, 분침은 자정에 더 가깝게 접근했다. 분침과 자정 사이에는 불과 2분의 간극이 남았다. 핵 전쟁의 위기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심지어 미국과 러시아 (옛 소련) 간의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보다도 더 높다는 과학자들의 진단이었다. 물론 ‘둠스데이 시계’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정(핵 전쟁)에 임박한 둠스데이 시계.
그 어느 때보다 자정(핵 전쟁)에 임박한 둠스데이 시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트럼프나 김정은 같은 누군가가 핵 단추를 누를 마음을 먹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연쇄반응으로 더없이 허무하고 비극적으로 지구 종말이 닥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경고판이다. 특히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되면서 탄핵 가능성까지 예견되는 트럼프는 인기 만회와 의회 중간 선거의 승리를 위해 북한에 선제 타격 (‘코피 터뜨리기’ 전략)을 가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마당이어서, ‘둠스데이 시계’가 주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여러 과학자, 역사학자, 정치평론가 들은 전세계 핵무기의 절반 이상을 보유한 미국이 그 동안 ‘핵 재난’을 회피해 온 사실 자체가 경이롭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컴퓨터 오류, 핵 경보 시스템의 오작동, 최근 하와이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허위 재단 경보 등의 사태가 적지 않았음에도 용케 핵 전쟁으로 확산되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핵 무기 작동 시스템은 회피하거나 억제하기보다 시작하기가 훨씬 더 쉬운 구조”라고 ‘와이어드’의 개럿 그러프 기자는 지적한다. “대통령의 명령이 떨어지면 4분 뒤에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이 사일로를 떠난다. 일단 발사되고 나면 그것을 멈출 도리가 없다. 날아오는 ICBM을 요격해 떨어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대니얼 엘스버그, [둠스데이 머신] 

[둠스데이 머신: 핵 전쟁 계획가의 고백] (The Doomsday Machine: Confessions of a Nuclear War Planner / 블룸스버리 퍼블리싱 / 432 페이지 / 2017년 12월 출간)을 쓴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과 관련된 여러 범죄 행위, 부도덕한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 그에 대한 은폐 시도 등을 고발한 소위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로 유명한 인물이다.

둠스데이 머신

 

근래 개봉해 화제를 모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포스트’ (Post)는 그 고발 문건의 보도를 둘러싼 ‘워싱턴포스트’ 내부의 드라마를 다루고 있다. 메릴 스트립이 여장부 사장인 캐서린 그레이엄을, 톰 행크스가 벤 브래들리 편집국장을 연기했다.

빼어난 픽션과 논픽션에 상(메달)을 주는 ‘앤드루 카네기 메달’의 최종 후보작 중 하나로 뽑힌 [둠스데이 머신]은 엘스버그가 세상에 폭로하려고 마음먹은 문건이 ‘펜타곤 페이퍼’만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아니, 어떤 면에서 ‘펜타곤 페이퍼’는 일종의 미끼(디코이)에 가까워 보인다. 엘스버그가 진심으로 세상에 폭로하고 싶었던 문건은, 미국의 핵 전쟁 계획서였다. 핵무기를 쓸 경우 얼마나 많은 인구가 살상될지 예견하고, 선제 핵 공격이나 대응 핵 공격 시나리오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는 내용의, 그간 극비로 분류되어 온 미국 정부의 핵 정책이었다.

그러나 엘스버그는 공개에 따른 파급 효과와 당시 정세를 감안해 베트남전에 대한 극비 문서만 폭로하기로 결정한다. 미국의 핵 전쟁 계획서는 이후에 적당한 타이밍을 찾아 추가 폭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생에게 맡겼던 엘스버그의 ‘둠스데이’ 문서는 미국 첩보 기관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 은폐 장소가 계속 바뀌다가 절벽 근처의 땅에 묻었는데 하필 열대성 태풍 ‘도리아’가 닥쳐 그 지역을 초토화하면서 문서가 든 가방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몇년간 포크레인까지 동원해 매립지를 뒤지는 노력도 허사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후, 엘스버그는 미국의 정보공개법을 이용해 관련 정보를 취득한다. 그 동안 기밀이 해제된 문서도 있었고, 여전히 기밀로 분류된 문서는 해당 내용이 삭제된 채 제공되었지만, 엘스버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은폐된 부분을 퍼즐처럼 다시 짜맞출 수 있었다.

2010년 고발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벌어진 미국의 민간인 학살 관련 국사기밀자료 39만여 건을 폭로한 블래들리 매닝을 구명하기 위해 위해 그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들고 있는 대니얼 엘즈버그.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Moizsyed , CC BY SA 3.0)
2010년 고발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벌어진 미국의 민간인 학살 관련 국사기밀자료 39만여 건을 폭로한 블래들리 매닝을 구명하기 위해 위해 그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들고 있는 대니얼 엘즈버그.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Moizsyed , CC BY SA 3.0)

회고록 형식을 빌린 [둠스데이 머신]은 그래서 더 친밀하고 곡진하며 긴장감에 넘친다. 스릴러 소설을 방불케 한다. 미국 정부의 끔찍한 핵 전쟁 계획을 폭로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계기도 더없이 극적이다. 1961년 봄, 대통령의 안보 담당 참모차장이 그에게 극비로 분류된 문서 한 장을 보여준다. 케네디 당시 대통령의 질문에 연합사 측에서 보낸 답장이었다. 케네디의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귀 측의 종합 ‘핵’ 전쟁 계획이 계획대로 수행될 경우 소련과 중국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살상될 것으로 예상합니까?”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제공된 문서에는 이런 그래프가 들어 있었다.

가로축은 핵 전쟁이 개시된 이후의 시간을, 세로축은 살상 인명의 예상 숫자를 나타낸다. 저 그래프에 따른다면 살상 규모는 개전 초기 2억7,500만 명~6개월 뒤 3억2,500만 명에 이른다. 엘스버그는 사실상 문명의 종말과 인류의 멸절을 초래할 수 있는 전쟁 계획이 오래 전부터 수립되어 왔고, 트럼프 행정부에 이르러 그 위험성은 전례없이 높아졌다고 경고한다.

핵전쟁 사망자

[둠스데이 머신]은 특히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핵 전략을 더없이 명확하고 상세하게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둠스데이 머신]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현실판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인류의 미래를 안전하게 담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명저다.

루이스 토머스, [말러의 9번 교향곡을 듣는 늦은 밤의 명상]

“만약 워즈워드가 의대에서 공부했다면 루이스 토머스의 에세이와 매우 흡사한 글들을 남겼을 것”이라고 ‘타임’이 극찬했던 루이스 토머스(1913-1993)는 주로 생물학 분야의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명철하고 심도 깊은 에세이를 남긴 미국의 의사이자 작가, 교수였다. [세포의 삶: 생물학 관찰자의 노트] (1974)와 [메두사와 달팽이] (1974)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할 만큼 빼어난 에세이스트였다. 록펠러 대학은 그의 업적을 기린 ‘루이스 토머스 상’을 제정해 첫해인 1993년에는 토머스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겼고, 이후 해마다 과학 분야의 주목할 만한 저자를 선정하고 있다.

토머스의 에세이 모음 중 하나인 [말러의 9번 교향곡을 듣는 늦은 밤의 명상] (Late Night Thoughts on Listening to Mahler’s Ninth Symphony / 펭귄 랜덤하우스 펴냄 / 176 페이지 / 1995년 재출간)은 1980~1983년 사이에 쓴 토머스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책 핵전쟁

이중 책 제목이 된 에세이는 미국과 옛 소련 간의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초의 사회 분위기, 시대 정황, 당시 사람들이 끊임없이 상기받아야 했던 핵 전쟁의 공포를, ‘죽음에 관한 음악적 명상’으로 흔히 평가되는 구스타프 말러의 9번 교향곡과 연관지어 차분하지만 비극적으로 전개한다.

“나는 말러의 9번 교향곡을, 과거에 그 음악을 들으며 느끼곤 했던 낯익은 서글픔, 거기에 뒤섞인 깊은 쾌감을 느끼며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그 음악에서,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죽음에 대한 담백한 수용과 더불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평온에 대한 조용한 찬미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음악을 위안의 비유로, 모든 체험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생명체의 죽음은 평화로운 체험이어야 한다는 나 자신의 강한 예감을 확인시켜 주는 음악으로 여겼다. (……)

모든 현이 시나브로 잦아드는 마지막의 긴 패시지는,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침묵 그 자체에 가장 근접한 것이었고, 나는 그 음악을 고별에 대한 말러의 절창으로 여기며 듣곤 했다. 그러나 항상, 나는 이 음악을 고독하고, 사적인 음악 감상자로서, 죽음을 생각하며 들어 왔다.

지금은 그 음악을 다르게 듣는다. 나는 말러의 9번 마지막 악장을, 문을 쳐부수듯 들이닥치는 거대한 새 상념의 침입 없이는 들을 수가 없다. 온세상에 만연한 죽음, 모든 것의 죽음, 인류의 종말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에 실린 루이스 토머스의 에세이들은, 쓰여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당대성을 유지한다. 핵 전쟁이 터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 그럼에도 전쟁은 불가피하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을 계획하는 군부와 정치인들의 발언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인류의 생존은 물론 지구의 온갖 생명체의 가치와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는 토머스의 에세이는 작금의 흉흉한 시대 상황, 다시금 ‘둠스데이 시계’가 자정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는 위기 상황 때문에 더욱 긴박하고 깊은 울림을 안긴다. 번역 추천.

로렌스 프리드먼,  [전쟁의 미래: 혹은 역사]

영국 학계의 대표적인 전략 전문가로 평가되는 로렌스 프리드먼의 [전쟁의 미래: 혹은 역사] (The Future of War: A History / 앨런 레인 펴냄 / 400페이지 / 2017년 출간)는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옵저버’ 서평)이다. 실제 전쟁의 역사뿐 아니라 과거 전쟁과 관련된 유명 이론, 소설, 상상, 편견 들로부터 전쟁의 미래를 전망하려 시도한다. 가령 1912년 아서 코난 도일은 잠수정들이 전투를 벌이면서 여객선을 침몰시키는 단편을 발표했는데, 당시 영국 해군 장성들은 이를 터무니없다고 무시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민간인이 탄 선박을 침몰시키는 행위가 문명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미래 핵전쟁 책

이즈음 시국과 관련해, 프리드먼의 [전쟁의 미래]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전쟁에 대한 뿌리깊은 환상과 편견, 착각이다. 특히 ‘속전속결’의 환상이다. 가령 북한에 대한 제한 핵공격을 주장하는 한국의 보수 매파들은 ‘일주일만 견디면,’ 혹은 ‘한 달만 참으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으로 삽시간에 북한의 전력을 무력화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전 초기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 단기에 전쟁을 끝낸다는 전략은, 몇몇 성공 사례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대부분 허구나 희망 사항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지적이자 경고이다. 가령, ‘충격과 공포’ (Shock and Awe)라는 작전명에 걸맞게 압도적 화력으로 이라크를 공습한 미국의 전략은, 당시로서는 잘 맞는 듯 보였지만 그 뒤로 이어진,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이라크의 내전과 그에 따른 혼돈은 속전속결 전략의 허구를 더없이 잘 드러낸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전쟁의 양상은 급속히 진전되는 신기술과 긴밀히 연관된다. 인공지능 기술을 탑재한 무인 드론이 적국을 감시하는 것은 물론 요인 암살에 활용된다.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첩보전과 사이버 테러, 더 나아가 사이버 전쟁은 점점 더 물리적 세계와 가상 세계 간의 경계를 허문다. 이러한 기술 변화는 전쟁의 인명 피해를 줄이게 될까? 더 ‘수용할 만한'(acceptable) 외교 전략의 일종으로 개선될까?

프리드먼의 전망은 부정적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 소위 ‘슈퍼 파워’ 국가들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공산은 핵 전쟁의 공포 때문에 여전히 낮겠지만, 국지전, 특히 정정이 불안한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같은 나라들의 내전은 지속되거나 더 악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추세로 본다면 가까운 미래의 전쟁은 대부분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들에서 주로 벌어질 것으로 보이고, 대다수 전쟁은 물리적 충돌에 거짓 정보, 가짜 뉴스, 해킹 등 사이버 테러리즘이 가미된 소위 ‘하이브리드’ 양상을 띨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조차도 대체로 불분명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제대로 맞는 경우는 사실상 극히 드물고, 따라서 미래를 점친다는 행위 자체가 대체로 허망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프리드먼이 제기하는 경고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압도적 화력으로 단번에 전쟁을 끝낸다’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 ‘상대방의 자원과 전력을 과소평가해 쉽고 빠르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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