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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고 100미터 랜선의 추억

nohrz, "Cabled Earth" (CC BY ND SA)

nohrz, “Cabled Earth” (CC BY ND SA)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이 발의한 게임 셧다운제 강화법안(청소년 게임 제한 시간을 오후 10시에서 다음날 오전 7시로 확장)을 보고 속이 뒤집혔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다 그야말로 트위터에 ‘폭트’(폭풍 트윗)를 날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http://storify.com/raftwood/by-superrabbitbear

나는 애니고 4기 영상과 졸업생이다. 애니고는 2000년에 100명의 첫 입학생을 받았고 그 중에는 내 친언니도 있었다. 언니의 졸업과 동시에 내가 입학했으니 애니고 초창기 6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셈이다.

언니도 나도 애니고를 지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유를 원했다. 마음껏 그림 그릴 자유, 마음껏 영화보고 게임할 자유. 중학교 수업시간에 그림 그리다가 노트를 한두 번 빼앗겨본 것이 아닌 우리 자매에게 애니고는 꿈같은 곳이었다. 만화와 애니와 영화와 게임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기숙사 학교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피카츄가 만든 천국, 애니고등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란 학벌 사회의 토대에 학교의 통제와 부모의 간섭이라는 벽돌로 견고히 쌓아올려진 요새다. 그 요새에 디지털문화산업의 폭발적 성장이라는 강펀치가 만들어낸 작은 틈, 그것이 애니고였다. 애니고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기획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피카츄 한 마리가 번 돈이 뼈 빠지게 자동차 조립해 판 돈에 버금간다는 말에 혹한 정부가 지시한 산업육성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어쨌든 이 틈바구니에서 자유의 샘물이 새어나왔고 학생들은 허겁지겁 목을 축였다. 처음 만나는 자유였다.

“공부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그림 그려!”

학교가 채 완공되기도 전에 입학한 언니가 가끔 주말에 집에 와 들려주는 ‘애니고 판타지’는 꿈만 같았다. 학생들의 자유와 창의성이 비례한다는 전제가 애니고의 소울(soul)이었다. 두발 제한 따위는 없었고 사복과 교복의 혼용이 자유로웠다. 교복도 학교 로고도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했다.

수업시간에는 만화를 분석하고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크로키 수업을 위해 학교 안에 온갖 동물들이 살았고, 학생들은 유난히 사이좋은 두 총각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동인소설을 썼다. 어느 날 밤에는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별똥별이 쏟아지니 다들 옥상에 올라와서 구경하라고 방송을 했다.

자유에 관한 사용법

그러나 이 자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유가 흘러나오던 틈새를 누군가 다시 막아버리기 시작했다. 학부모와 교장, 교감이었다.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학생들이 주어진 자유를 다루는 방법이 완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처음 랍스터를 먹을 때는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법이다.

이제껏 한 번도 구체적인 자유를 제대로 맛본 적 없는 학생들이 좌충우돌 스스로 자유를 학습해나가는 과정을 성질 급한 교장과 학부모는 안타깝게도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기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리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의 실수를 학습 과정이 아니라 본질적인 미숙함으로 간주했다. 그러니 사사건건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방종을 탓하며 ‘주었던’ 자유를 도로 빼앗기 시작했다. 학교가 자유에 관한 사용법을 학습하는 아이들에게 학습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학,교,가 말이다.

교사 선생님

학교가 내세우는 논리는 이랬다.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한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서 잠을 잔다. 그러면 일반교과 공부가 부족하니 대학을 못 보낸다. 대학을 못 보내면 학부모로부터 항의가 들어온다. 그러면 학교의 평판(과 교장교감의 경력)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통제해야 한다.

학부모가 내세우는 논리는 이랬다. 애들이 기숙사에 있으니 관리는 학교 책임이다. 한국 사회는 학벌 사회다. 대학을 못 가면 사람 구실을 못 한다. 애니고를 졸업해도 대학은 가야 한다. 그러므로 학교가 책임지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거나, 그럴 능력이 안되면 학부모회의 결정에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풀어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 학교 안에 가둬놓아야 한다.

“이제 학교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어디에도 학생의 자기결정권은 없었다. 만화가 좋고, 애니가, 영상이, 게임이 좋아서 애니고에 들어온 아이들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학생들 자신의 생각은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 대학 문화, 앞으로의 전망, 부모의 기대가 어쩌고 하는 논의가 전부였다.

교장이 밥먹듯 갈리고 표류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예전의 자유를 그리워하며 저마다 깜냥껏 숨통을 트거나 소위 ‘현실’을 받아들이며 일찌감치 수능학원에 등록했다. 성숙한 자유의 문화 대신 학생들의 가슴 속에 아프게 뿌리내린 것은 ‘현실’에 대한 개인적인 타협과 냉소 섞인 작은 반항이었다. 학교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이 애니고생의 암묵적인 교훈이었다.

절망 억압 자유 고통

경기도 하남시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입시설명회에서는 이제 고등학교를 묻지 않는다. 모든 학부모는 대학을 묻고, 명문대에 들어간 졸업생들이 와서 어떻게 자기들이 그런 곳에 들어갔는지를 설명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착해졌다’고 한다. 학교가 그리워 찾아간 졸업생들은 몰라보게 맥아리 없는 후배들의 모습에 가슴속의 허전함을 감추지 못한다. 어쨌거나 학교는 돌아간다. 후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애니고는 ‘다른 학교에 비해 여전히 애니고’라는 것이다.

이제 막 ‘미운 세 살’ 한국의 게임 문화

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모처럼 도래한 창작과 향유의 자유가 애니고를 만들고는 점차 그곳에서 사라져간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법과 제도를 결정하는 사회인식과 감수성에는 어떤 뿌리 깊은 독재가 있다. 게임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정작 게임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저 이제껏 이런저런 정책을 결정해왔을 뿐 게임하곤 별 상관없다. 한편 게임 정책을 정하는 데 게임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하니 이런 정책결정 행태가 우리나라 고유의 정책결정 문화라고 한심한 소리를 할 바보는 없으리라 믿는다.

저 트윗은 내 트위터 역사상 가장 많은 리트윗 수를 찍었다. 놀라운 것은 타임라인을 돌고 돌던 저 트윗이 나와 몇몇 재학생 후배들을 연결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번 법안 발의에 대한 깊은 ‘빡침’이 나와 그들의 공감대를 형성해주었으니 그 부분은 손 의원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과거의 패기를 영영 잃은 줄만 알았던 애니고에 아직도 이렇게 부당함에 분개하며 여차하면 백미터짜리 랜선을 들고나올 것 같은 후배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뻤다.

한국의 게임 문화라는 아이는 이제 막 ‘미운 세 살’이 되었다. 세 살배기 아이가 종종 말썽을 피우는 것은 사탄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자식이란 자유로운 말썽과 실수로부터 삶을 학습하는 동물이다. 한국의 게임 문화가 자유 속에 좌충우돌하며 자율을 배워나갈 기회를 지켜야 한다. 그 자유란 바로 놀며 배울 우리의 자유다.

아이 첫걸음 출발 시작 초보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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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필자, 미디어 아티스트

놀고 먹고 자며 일을 합니다. 네트는 광대하고 인터넷의 자유는 소중합니다. 술이 없는 인생은 서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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