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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의 도래: 평등주의의 폐허 위에서

2017년입니다. 정치의 실패, 대통령의 타락은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 할 ‘역사의 복수’가 되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숨죽여 탄핵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반면 세계는 트럼프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정체는 불안입니다. 트럼프의 시대가 절망의 초석을 마련하는 것은 아닌가 전 세계는 우려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그 말은 어제 유명 TV쇼의 ‘엽기적인 농담’이었지만, 오늘 너무도 생생하고 진지한 현실입니다.

2017년 초입, 슬로우뉴스는 두 번에 걸쳐 트럼프 시대를 잉태한 역사의 흐름을 짚어봅니다. (편집자)

평등주의의 시대는 결국 1980년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건과 대처는 평등주의의 대오를 분쇄하고 평등주의의 이상 하에 세워진 사회협약을 박살 냈습니다. 그 뒤에는 일사천리였습니다. 레이건 이래로 12년을 달려온 공화당 정권은 92년에 빌 클린턴이 승리하면서 교체되었지만, 사실 민주당으로 바뀌었어도 대세가 흔들린 건 아니었습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그해 중국은 남순강화를 통해 문을 열었고, NAFTA가 발효되어 북미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데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 일어난 닷컴 버블은 정보화의 파고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금융과 정보기술을 통해 성장하는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와 몰락해 가는 리버풀, 디트로이트, 피츠버그의 대비가 선명해졌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나 동네는 그들이 왜 잘 나가는 이유를 물을 때 자기들이 잘해서라고 하는 경향이 있죠. 절반은 맞습니다. 그리고 망하는 사람이나 동네에 가서 ‘너희가 망한 이유가 뭐니?’라고 물으면 남들이 나쁘다고 합니다. 이것도 대체로 절반 정도 맞긴 합니다.

디트로이트가 철저하게 몰락한 이유는 세계적 추세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디트로이트 시 정치의 문제도 컸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시 인구 대부분은 고졸이었고, 고학력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고부가가치 산업을 유치시키기에 유리한 인적자원에 재정을 투입했다면 디트로이트가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몰락하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권운동가 출신의 흑인 시장 콜맨 영의 정책은 무가치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재정을 낭비해 디트로이트의 하락세를 더욱 키워줬습니다.

콜맨 영(1981, 위키미디어 CC BY SA 3.0) https://en.wikipedia.org/wiki/Coleman_Young#/media/File:ColemanYoung1981.jpg

콜맨 영(1981, 위키미디어 CC BY SA 3.0)

그러나 디트로이트가 어떤 정책을 취했든 간에 80년대 이후의 거대한 흐름으로 결국 패자들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가정에 가정을 더해 디트로이트가 만약 고급 인적자원에 투자해서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혁신 클러스터로 도약했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결국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은 해고되는 것밖에 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선진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제조업 혁신은 모두 자동화와 도요타의 린 생산기법을 필두로 시작된 조직 방식의 근본적 변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MIT나 스탠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디트로이트 공대의 고학력자들이 자동차 공업을 끝간 데까지 자동화하고, 최첨단 전자장비로 무장한 차를 내놓아 세계를 놀라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부품을 제공하는 곳은 결국 중국일 것이고, 그걸 조립하는 건 결국 기계일 겁니다. 더군다나 운 좋게 러스트 벨트의 도시 하나가 이런 식으로 도약했다고 치더라도, 그 지역의 모든 도시가 이런 식으로 도약할 수도 없습니다. 뭐가 되었든 사회발전의 결과물로 러스트 벨트의 숙련공들은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Balpin, "Rust Belt Penrose", CC BY SA https://flic.kr/p/oCbBtz

Balpin, “Rust Belt Penrose”, CC BY SA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쩌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인가(물론 미국에는 그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은 상대적 손실에 민감하니까요)? 그들의 자녀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적어도 대공장에서 일하던 부모들은 안정적으로 취직해서 젊은 시절을 즐기기라도 했지, 이제 신세대들은 젊은 세월조차도 못 즐기고 맥도날드 알바나 전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묻는 것은 인간이라면 매우 이성적일 겁니다.

‘TV에서는 양복 빼입은 젊은 금융인들이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긁어모았다고 나오는데, 왜 우리들은 태어난 것조차 버거워서 삶의 무게에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가?’

불평등이 심해지자 150년 전 그들의 조상들을 사로잡은 질문들이 다시 자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조상들은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를 탓할 수 있었고 실제로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착취를 한다 만다와 별개로 투쟁 및 교섭 상대를 잘 골랐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손들은 이제 자본가들이 우리를 착취한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갈등 축을 노동자 대 자본가라는 틀로 제공해주던 평등주의가 세계적 산업구조 재편을 거치면서 파산해버린 것입니다. 소련의 몰락이 평등주의의 명성에 완전히 파산을 선고한 것도 컸지만, 국내에서는 기존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인들에 실망한 것이 결국 주효했습니다.

조직 노동이 후원해주는 이들 평등주의 정치인들은 오랜 세월 노동자들과 같은 세력동맹을 이루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고, 수많은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자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자본은 해외로 계속 나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과거 대공장 체제의 유물인 평등주의 이념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곧 선거 경쟁에서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몇몇 평등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하던 대로 활동적 타성을 보여주다가 결국 몰락했습니다.

노동 노조

한편 다른 평등주의 세력들은 노조를 버렸습니다. 기존 노동계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파탄이 난 것까진 아니었어도 과거처럼 의회에서 확고한 노조의 대변자 포지션을 취하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영국 노동당이 채택한 제3의 길은 이러한 현실을 대변해줍니다. 근대 평등주의, 혹은 전통적 좌파정치는 그 기반도, 그리고 결과물도 이제 폐허만 남았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르고 있던 1996년, 마이클 잭슨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는 보여주지 못한다고 사회를 고발했던 유명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They don’t really care about us(그들은 사실 우리를 보살펴주지 않아)! 그리고 그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죠.

내 권리가 어떻게 되었나 한번 말해보시지
나를 무시하다 못해 이제 보이지조차 않나?
당신들의 선언은 나에게 자유를 약속했지, 이제
나는 수치스러운 희생물이 되는 것에 지쳤어
그들은 나를 모욕하는 이름으로 분류해 던져버리지
난 이 땅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내가 정말 이런 말 하기 싫어하는 거 너도 알겠지만
정부는 우릴 보려 하지 않아.
만약 루스벨트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걸, 절대. 절대.

Tell me what has become of my rights
Am I invisible because you ignore me?
Your proclamation promised me free liberty, now
I’m tired of being the victim of shame
They’re throwing me in a class with a bad name
I can’t believe this is the land from which I came
You know I really do hate to say it
The government don’t wanna see
But if Roosevelt was living
He wouldn’t let this be, no, no

이 가사는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울림이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이 노래에서 루스벨트 시절의 “좋았던 옛날”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스벨트가 만들어낸 뉴딜 동맹이 제대로 작동하고, 미국의 대공장은 여전히 잘 굴러가던 1950년대에 이 노래가 나올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1950년에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미국 자동차 빅 3(포드, GM, 크라이슬러)는 전미자동차노조의 연금과 임금상승을 보장해주는 “디트로이트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귀국한 위대한 세대는 이 시기 공장으로 들어가 미국의 놀라운 번영을 이끌었고 안정적인 고용과 소득의 꾸준한 상승으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진보와 발전의 낙관주의가 지배하던 평등주의의 전성기였다면, 과연 이 노래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더욱 애석한 점이 있습니다. 루스벨트가 심지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평등주의를 재건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회발전의 장기적인,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본인을 세계적 팝스타로 만들게끔 했던 그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이 바로 이러한 사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언 모리스의 말대로 사회발전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또한 만들어 냅니다.

피착취자들은 다시 일어나라

그렇다면 폐허 위에서 자동화와 세계화, 정보화로 이루어진 제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은 이제 누구에게 기대야 했을까요? 한동안은 그래도 경제가 어영부영 성장했기에, 불만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진 않았습니다. 일단 맥도날드 알바, 혹은 고용안정성과 봉급이 썩 좋지 못한 사무직이라도 자리를 잡으면 선진국 사회는 이미 기초적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과거 그들 선조의 불만을 희석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가 다시 본래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 일자리를 앗아간 중국 공장에서 나온 저가의 ‘메이드 인 차이나’와 역시 그들의 직장을 몰락시킨 기술 혁신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줬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 세대는 GM 공장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긴 했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렴한 중국산 하이얼 백색가전에 더하여 수많은 오락거리와 편의를 제공해주는 소프트웨어 모두를 구비할 수는 없었던 것과 대비되지요.

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상태는 지속할 수 없는 법입니다. 2007년-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이러한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경제적 충격이 너무 큰 폭으로 찾아왔고 살기는 더 팍팍해졌습니다(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진짜 뭔가 잘못되어감을 느꼈고, 살아갈 미래가 어두워진 젊은 세대와 빛나는 과거가 그리운 옛 세대 모두가 현 상황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https://flic.kr/p/apdfwv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상징이 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출처: Helge V. Keitel, Lehman Brothers, CC BY)

스탈린이 소련의 핵 개발 프로젝트를 전담한 이고리 쿠르차토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기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겠소? 필요한 모든 것은 내게 말하시오.”

인간의 아이는 연약하기에 울음을 통해 어머니나 주변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조금 더 자란 뒤에는 언어를 익히게 되고 언어를 통해 조금 더 상세한 의사전달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3차 산업혁명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이런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서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이들은 현상을 나름대로 진단해보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비참하게 내몰았는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하자 미국 내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Who Lost China?”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는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들도 ‘누가 우리 자신들을 잃어버렸는가?”하는 책임소재를 규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아야 그들을 향해 울어보거나, 정중히 말해보거나, 주먹질이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한 그룹은 과거의 평등주의가 여전히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평등주의 세력은 대공장 노조 위주라서 자신들을 포괄할 수 없었고, 자본가들의 탐욕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더 폭넓은 좌파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금융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의 1%가 자신들의 협소한 이익을 위해 99%를 착취한다는 주장이 폭발했습니다.

Michael Fleshman, Occupy Wall Street October 7, 2011, CC BY SA https://flic.kr/p/au7m61

Michael Fleshman, “Occupy Wall Street October 7, 2011”, CC BY SA

그 시작은 다들 기억하실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잘 아시다시피 5년 뒤 버니 샌더스의 엄청난 인기로 귀결되었습니다. 재밌는 건 샌더스는 매우 새롭고 참신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런 평가가 어느 정도 맞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의 사상과 신념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샌더스의 주장은 조직노동의 지도부가 포괄해온 기존 평등주의 정당들의 변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지지자들, 즉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을 통해 조금 더 퓨어한 평등주의를 밀어붙인 것에 가깝습니다. 러스트 벨트의 일반 노동자들이 노조 지도부와 달리 힐러리 클린턴을 싫어하되 샌더스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줍니다.

DonkeyHotey, Bernie Sanders - Portrait, CC BY https://flic.kr/p/vVL7to

DonkeyHotey, “Bernie Sanders – Portrait”, CC BY

노조 지도부들은 민주당의 충성스러운 지지파로서 민주당이 점차 조직노동 의존도를 탈피하는 과정에 있었어도 그저 관성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왔기에 민주당의 변화상도 그럭저럭 따라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오래된 자들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들은 그런 것보다 자신들의 기대이익에 맞춰서 지지자를 결정했습니다. 이제 더는 조직노동이 온전히 포괄하지 못하는,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은 과거 1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에 매료되었습니다. 이쪽도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오래된 사상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벨트웨이를 포격하라(그리고 The City도 포격하라)

그러나 이것이 평등주의의 부활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평등주의 세력뿐만이 아니라 보수주의 세력도 3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선거 경쟁을 통해 지지자를 동원하던, 고전적인 20세기의 정당 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디어의 발전, 소득 불균형의 심화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보수주의자였건 평등주의자였건 과거에는 당 기관지를 비롯한 신문들과 지역 사회의 당 세포들을 통해, 그리고 교회, 노조 등 자신들의 지지세력이 포진하고 있던 사회조직을 통해 경쟁해왔습니다.

매튜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ㅣ서복경 옮김 ㅣ 후마니타스 | 2013

매튜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ㅣ서복경 옮김 ㅣ 후마니타스 | 2013

하지만 이제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이 엄청난 금액을 정치인들에게 기부해주고, 안방까지 스며든 미디어가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을 결정짓게 되자 대중을 동원할 유인이 사라졌습니다. 의회는 잠재적 지지동맹의 이익에 근거하여 정책을 내놓고 협상을 하던 정당 간의 게임이 아니라 지하드 전사들의 성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결정들은 이제 법원에서 법조 엘리트들이 결정하게 됩니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실패는 오바마가 임기 말에 쉴새 없이 터트린 진보적 업적에서 잘 드러납니다.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오바마케어, 동성결혼 등 수많은 진보적 의제들은 오바마 의중대로 놀아나 버렸죠. 이는 해당 정책들이 의회에서 지지자들 간의 세력 싸움으로 결정 난 것이 아닌 최고위층 엘리트인 연방대법관들의 심사로 결정 났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이 실제로는 전혀 보여주는 게 없다고 생각한 보수주의자들 또한 이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대중정치는 대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게다가 3차 산업혁명은 보수주의자라고 비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라고 모든 이슈에 진보적일까요? 사회문화적으로 진보적이냐 아니냐의 중요한 변수로는 대체로 교육이 작용합니다.

러스트 벨트는 고등교육 받은 사람이 많지 않죠. 이곳 노동자들이 평등주의 정치인들을 지지한다고 민주당을 뽑긴 해도 동성결혼 문제에서는 절대 반대로 나오는 신실한 기독교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 중 유의미한 수는 힐러리도 샌더스도 아닌 다른 사람을 지지하게 되고 그 결과를 우리는 얼마 전에 목도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였지요. 사람들은(저를 포함해서) 트럼프가 처음에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고 했을 때 다들 비웃었습니다. WWE에서 빈스 맥마흔과 대결하던 천박한 백만장자가 무슨 대통령 선거를? 사람들은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중도 포기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테드 크루즈와 경선 최종레이스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루즈에게는 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Grand Old Party’, 링컨의 당인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검증된 후보”라는 힐러리 클린턴을 물리치고 45대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WWE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의 트럼프 ⓒWWE

WWE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의 트럼프 ⓒWWE

이언 모리스는 “각 시대는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트럼프 같은 이들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소위 포퓰리즘의 역사는 상당히 장구합니다. 그렇다면 하필 지금, 2016년에서야 트럼프류의 사람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옛날에는 굳이 트럼프 같은 극단적이고, 검증받지 못한(여과되지 못한) 인물을 지지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사회가 안정적으로 굴러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까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이 다시 창끝을 자본가로 돌리면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샌더스를 소환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 중 또 다른 그룹은 자신들의 이익을 기존 공화당이나 보수당이 대변해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들 나름대로 ‘누가 우리를 잃어버렸는가’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는, 워싱턴 벨트웨이1, 다시 말해 검증되고 합리적이라는 ‘기성정치인’들이 더는 자신들의 불만을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분노는 세계화로 인해 다양해지는 미국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민자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멕시코 놈들이, 아랍 놈들이, 동유럽 놈들이, 아시아 놈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 그들이 이 위대한 나라에 무임승차해서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물론 내 직장도 같이 타락해서 나를 해고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DonkeyHotey, "Donald Trump's Taj Ma WALL", CC BY SA https://flic.kr/p/FnQ2cC

DonkeyHotey, “Donald Trump’s Taj Ma WALL”, CC BY SA

트럼프 지지자들과 샌더스 지지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이익이 더는 기존 정치 구도, 즉 보수주의자와 평등주의자의 경쟁에서 전혀 대변 받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와 샌더스 지지자가 공통점으로 밀어붙이려는 정책이 있습니다. 바로 보호무역 정책,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의 폐기입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앗아간 근본적인 원흉이 바로 중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몰락한 석탄산업 종사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기후변화와 탄소배출을 얘기하는 것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 몇 달 전에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미국인들이 벨트웨이를 포격하겠다고 한 것처럼 영국인들은 런던의 심장부인 ‘The City’를 포격했습니다. 바로 브렉시트입니다. 보리스 존슨과 트럼프가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브렉시트 이전의 영국 정치구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시 새롭지만 낡은 사람인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을 다시 왼쪽으로 돌려놓고, 캐머런이 포괄 못하는 영국독립당의 나이젤 패러지나 보리스 존슨이 세몰이를 하던 것은 미국과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브렉시트

유럽에서 3차 산업혁명이 가장 격렬히 진행된 곳이 영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의 어머니지만, 선발주자의 함정 때문에 2차 산업혁명에는 독일과 미국에 밀려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수도 런던은 세계 최강국의 수도로 쌓아놓은 자산과 네트워크가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 최대 금융중심지의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금융의 시대가 왔습니다.

또한, 영국은 세계적 소비도시로서 창의적인 컨텐츠를 배출해내는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영국 드라마도 세계인을 사로잡았고, 막스 플랑크와 함께 런던은 유럽 학문 연구의 최고 중심지로 남아있었습니다. 유럽에서 3차 산업혁명에 제일 잘 적응한 나라 중 하나는 영국일 겁니다. 그러나 1차 산업혁명의 후계자들은 그만큼 철저히 박살 났습니다. 대처는 그 시작을 끊었을 뿐입니다. 리버풀, 맨체스터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도 이민자와 자신들을 신경 써주지 않는 기존 정치인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진짜로 유럽연합에 나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겁니다. 3차 산업혁명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드디어 제대로 놀랐습니다. 런던의 세계시민은 세계화와 유럽연합을 통해 많은 이익을 본 승자들입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승자 위너 1등

실제로 미국이든 영국이든 국민소득은 세계화 이후에도 엄청나게 올랐는데, 정작 중위소득은 20년 째 변함이 없습니다(최근 이걸 개선한 게 오바마라는 것이 역설이라면 역설이겠습니다). 사회의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고 정치는 불안정해져만 가며, 이는 기존 질서의 승자들을 또다시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정은 샌더스와 트럼프, 코빈과 존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극단화한 정치 시스템에서 시스템 외부에서 출몰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지세력 내부에서 선명성을 무기로 활약하려고 합니다. 샌더스는 분명 상식인입니다. 그는 소신과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샌더스는 과거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 위기를 해소해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올 사람은, 분명 샌더스보다 더 막나가는(혹자는 소신 있는 이라고 평하겠지만) 사람이 틀림없을 겁니다.

공화당에서 정상인 취급 받았던 테드 크루즈도 티파티의 일원으로 트럼프급은 아니지만, 역시 만만찮게 기존의 상식에 위배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화당 사례를 참조해보자면 결국 개인적 카리스마를 통한 대중동원의 전략이 레벨을 높여가며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좌파에서는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시리자의 치프라스입니다. 젊은 패기로 등장한 시리자 정권이 얼마나 놀랍도록 무력했는지를 떠올려보세요.

민중은 개돼지가 아니라 말(馬)이다

이는 2차 산업혁명기와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1815년부터 1913년까지 이어져 온 자유무역이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근린궁핍화정책에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발호했지요. 하지만 그때와 같은 불안정의 시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2차 산업혁명기의 조직노동은 점차 늘어만 가는 자신들의 경제적 중요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여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의 피해자들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점차 쓸모없어지는 사람들이 결성한 연합이라는 것은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창을 던질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그 죽창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샌더스와 트럼프, 코빈과 존슨은 그들의 인기가 얼마나 높든 간에, 마르크스와 스탈린, 독일 사민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해냈던 것만큼 사회의 권력관계를 재편해내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창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뭔가에 기여를 그만큼 해야 하는 법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발언권에는 기여도와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99%의 인간은 이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평등주의를 폐허로 만들어버렸고, 평등주의의 폐허 위에 탄생한 지도자들 또한 필연적으로 허약하게 만듭니다.

Jamelle Bouie, "trump making a face", CC BY https://flic.kr/p/yCXPEo

Jamelle Bouie, “trump making a face”, CC BY

브렉시트는 아마 최종적으로 통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벌써 의회의 거센 저항을 맞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야심 차게 등장해 모두를 충격 속으로 빠트렸지만, 그의 정책이 장기적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가 자신의 색깔을 버리면 평범한 기성 공화당 정권이 되겠죠. 만약 그가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추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적어도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진짜 그렇게 된다면 트럼프를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불러줄 겁니다).

바실리 레온티예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바실리 레온티예프(사진)는 인간의 노동이 향후 어떻게 될지 탐구한 바가 있습니다. 레온티예프는 역사 속에서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찾아봤습니다. 바로 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철도가 마차를 경주로 이긴 직후에 말이 교통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뉴욕, 런던, 파리할 것 없이 19세기 말의 도시들은 마차를 끄는 말들과 그 말들의 분뇨로 가득 찼던 도시였습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기업 네트워크가 지구를 뒤덮고, 전자와 빛이 거리를 휘저어도 국가와 민족은 사라지지 않은 근미래”라는 문장으로 배경을 던져줍니다. 19세기 말 미주와 유럽의 도시는 “철도와 전신이 지구를 뒤엎고, 가스등이 도시를 밝혀주어도 말들과 마차들은 사라지지 않은 가까운 과거”였던 셈입니다.

오히려 인류 사회 간의 연결망과 교류가 늘어나자 말의 수요는 훨씬 늘었습니다. 1840년부터 1900년까지 말과 노새는 미국에서 6배가 증가해 2,100만 마리가 됩니다. 기술이 발달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말을 필요로 할 것으로 보였죠. 그러나 내연기관이 확산하고, 대공장 체제를 설계한 포드가 T형을 미국 전역에 꽂아주기 시작하자 말의 운명도 거기까지였습니다. 1960년 말은 2,100만 마리의 놀라운 위용에서 300만 마리로 90%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말

레온티예프는 인간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봤습니다. 알파고가 한창 흥했을 때,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는 것 아니냐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산업혁명 때도 인간의 노동을 자동화했지만, 결국은 새로운 산업이 고용을 대규모로 창출하지 않았는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온티예프의 생각대로라면 산업혁명으로 확대된 인간의 노동은 마치 철도의 도입으로 말의 사육이 부수적으로 확대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무언가가 진정 찾아온다면 그때 인간이 말의 운명을 맞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나향욱은 민중을 개돼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개돼지가 아니라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들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린 말들에게 투표권을 주진 않았죠. 인간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한 선진국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 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하고 투표로 정치인들을 교체할 권리를 줍니다. 즉, 2차 산업혁명기의 노동자들처럼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나름의 주도권을 잡고 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들을 진정 말의 운명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반격할 수 있습니다.

영국인과 미국인은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는 우매한 자폭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폭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것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 뒤에는 끝없는 사회발전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사이의 경주가 있는 것입니다.


  1. beltway; (특히 워싱턴 주위의) 순환도로. 이 글에서는 워싱턴의 기성 정치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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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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