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2017년입니다. 정치의 실패, 대통령의 타락은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 할 ‘역사의 복수’가 되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숨죽여 탄핵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한번 새로운 희망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반면 세계는 트럼프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정체는 불안입니다. 트럼프의 시대가 절망의 초석을 마련하는 것은 아닌가 전 세계는 우려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그 말은 어제 유명 TV쇼의 ‘엽기적인 농담’이었지만, 오늘 너무도 생생하고 진지한 현실입니다.
2017년 초입, 슬로우뉴스는 두 번에 걸쳐 트럼프 시대를 잉태한 역사의 흐름을 짚어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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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
–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중에서
어떤 사상이나 관념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할 때 그에 적합한 사상과 관념이 헤게모니를 잡습니다.
근대 평등주의
분배를 강조하던 근대 평등주의도 그렇습니다. 사실 약자나 피착취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진부한 수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한 것이 2천년 전입니다.
서양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있었고, 그 후에 이자성의 난과 러시아의 푸가초프의 난을 거쳐 프랑스에 최초의 근대적 평등주의적인 정치가인 바뵈프와 블랑키가 등장했습니다. 이 전통은 마르크스로 이어져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 카스트로로 이어졌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지금 몬트리올의 세계사회포럼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이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평등주의 운동이 가장 위협적인 세력을 갖추었던 때는 언제일까요? 1848년 공산주의 최초의 조직화된 정치운동을 추동한 강령인 [공산당 선언]이 나온 뒤부터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인 1953년까지의 약 100여년일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평등주의자들은 잠시 수도를 점령하고, 왕의 목을 칠 순 있었어도 결국 착취자들에게 반격당하여 사라지거나 본인이 새로운 착취자가 되곤 했습니다. 물론 성공 가능성 자체도 희박했죠.
스탈린 사후를 볼까요. 흔히 좌파가 마지막으로 위용을 떨치던 시대의 종말을 1991년 소련 해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리 보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서구권 사회 내부의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던 공산주의 운동은 스탈린 시대 이후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평등주의자가 선거경쟁에 참여하거나 세계대전을 통해 새로이 능력을 갖춘 시민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기존 질서에 포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위협이라는 것은, 그 실체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을뿐더러 그 위협은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계약을 위협하는 기존 형태라기보다는 그저 강대국 간의 경쟁, 훨씬 전통적이고 관리 하기 쉬운 위협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망한 뒤에는 아예 관에 못을 박아버렸죠. 지금은 세계사회포럼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실 테지만, 80년 전에 글을 아는 사람 중 코민테른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함께하면 우린 더 강하다!
그렇다면 왜 1848년부터 1953년까지 평등주의자의 목소리가 가장 강력했을까요?
제 생각에 이는 산업의 조직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1848년 이전의 제1차 산업혁명은, 아직 미숙한 빈곤한 농촌 인구를 무작정 흡수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초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의 현실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면이 있습니다. 대체 왜 이들은 도시에서 그런 비참한 삶을 견뎌내야 했던 걸까요?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영국 농촌의 현실도 그와 별반 다를 거 없을 정도로, 혹은 더 끔찍할 정도로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포머런츠는 [대분기] (大分岐, The Great Divergence, 2016)에서 1800년대 초까지 영국 농촌에서의 삶이 사실 동시대 중국 농촌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있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런던과 베이징의 실질임금이야 당연히 이 때 가면 큰 폭으로 벌어져 있긴 했고, 그런 차이가 산업혁명을 추동하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산업혁명 여명기의 영국은 극히 토지집약적, 노동집약적인 농촌으로서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footnote]토마스 맬서스(1766년 ~ 1834년)가 [인구론]에서 주장한 가설. 기술 발전으로 임금과 식량 생산 그리고 위생 여건이 호전되면 인구가 증가 → 인구가 생산 능력을 초월해 위생이 악화하고, 질병과 전쟁 등으로 다시 인구 감소 → 인구 감소로 다시 임금과 식량 상태 및 위생 환경 호전되면 인구 증가… 이와 같은 주기가 반복된다는 이론. 현재 관점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혁파된 이론이지만, 멜서스의 인구 이론은 당대 뿐 아니라 후세에도 여러 분야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footnote]의 무게를 버겁게 견디고 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혁명으로 유의미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절망적인 영국 농촌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단조로운 삶을 사느니 살기 팍팍하고 비참한 도시생활을 견뎌야 한다고 치더라도 런던이나 맨체스터, 리버풀에 가는 게 낫게 된 것입니다. 즉, 당시 노동자들은 선택권도 없었고, 당연히 교섭능력도 없었으며, 비참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이 나올 때쯤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사 이래로 영국의 임금이 가장 높았던, 흑사병 직후의 임금을 돌파한 첫해였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있던 것입니다. 산업의 성장이 폭발적으로 시작되고, 노동자들이 자신을 조직하여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상대로 파업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더하여, 노동자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직이라는 다른 형태로 공장을 위협할 수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노사 간의 교섭이 시작되는 노동시장이 탄생하게 될 전조였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그 호소력 있는 명문장들이 노동자를 각성시킨 게 아닙니다. 그저 이전에는 없던 힘을 갖게 된 노동자에게 그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켜줄 호소력 있는 명문장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산업혁명의 파급과 그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도 이런 흐름을 부추겼습니다. 19세기 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진앙지가 독일이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대서양 건너 미국과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 산업혁명의 물결에 제일 잘 적응한 두 나라 중 하나가 독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독일인은(더불어 다른 하나였던 미국인은) 영국에서 배워온 산업혁명의 정수를 자신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진화시켰는데 바로 2차 산업혁명에 발동을 건 것입니다.
국가 주도 하의 국민교육은 기술교육을 잘 받은 효율 좋은 인적자원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냈습니다. 지금껏 세계의 학교를 규정짓는 프로이센 교육 모델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소규모 기업들이 아닌 콘체른(Konzern) [footnote]유럽, 특히 독일에 흔한 기업형태이다. 법적으로는 독립된 여러 회사가 통일된 관리 아래 하나의 단일한 경제체를 이루는 것. (출처: 위키백과)[/footnote]이라는 형태의 기업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건 전기, 화학이라는 신산업이었고 특히 전기가 가지고 온 동력 상의 새로운 혁명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작업장을, 그것도 고도의 자본이 집적된 기계화된 공장을 탄생하게 합니다. 대기업이 중심이 된, 굴뚝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공단은 그렇게 독일과 미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대공장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경제구조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줬습니다. 자본집약적인 단일 대공장에서 모여 있는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 소작업장에 분산된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자본에 타격을 입히기도 쉽습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최고 존엄이었던 디트로이트의 포드 공장이라든가 플린트의 GM 공장 하나만 잡고 노동자가 파업하면 그냥 임금 올려주는 것 빼고는 사실상 답이 없던 겁니다. 이를테면 소위 ‘점거 투쟁’은 2차 산업혁명이 궤도에 올라있던 1932년 미국의 자동차 공장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아래 화면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전설적인 노동 영화 [노마 레이] (Norma Rae, 1979)의 파업 장면입니다. 노조 조직가인 주인공 노마 레이가, 마침내 공장에 올라가서 ‘노동조합’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든 채 침묵으로 호소하자 동료 노동자들은 모두 기계 전원을 꺼버리죠.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건 실제로 제2차 산업혁명을 거쳐서 형성된 작업장의 속성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고정비용이 상당히 많이 투자된, 자본집약적 단일 대공장을 노동자가 장악할 때 자본가로서는 대처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19세기 말에 가면 독일 노동자들의 힘은 절정에 이르렀고, 총파업 위협만으로도 사회를 뒤흔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주도 하의 제1차 산업혁명이 그랬듯 제2차 산업혁명은 독일과 미국에서 다시 다른 선진 산업국가들로 확산되었고, 많은 산업도시에서 막강한 노동조합이 탄생합니다. 이들이 가진 조직력과 자금은 사회주의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동원됐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진짜로 친목질 조직에서 본격적 정치조직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공산당과 사민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의회에 진출하거나, 정치권 밖에서 투쟁을 전개하거나 하는 식으로 기존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러시아와 같이 2차 산업혁명을 구질서의 한계로 인하여 애매하게 받아들인 나라에서는 전쟁의 혼란에 이어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조직화된 대공장 노동자들이 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수도를 봉기로 먹어버린 겁니다. 노동자 조직과 정치세력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절정에 달한 때였죠.
이때가 바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평등주의 운동이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 국가로서 소련이 무지막지한 군대를 보유한 채 서구의 좌파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사실 스탈린은 현실 정치인이기에 훨씬 현실 파악을 잘했지만요). 막강한 노조 조직은 여전히 강력한 쟁의행위로 자신들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기에 자본가들로서는 타협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정부구성에 참여한 뒤로 압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그렇게 복지국가가 탄생했고, 일본은 주도적으로 노동자들을 포섭해 공산권 이외 국가 중에서는 최고의 고용안정성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대중정치로서 좌파정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각자가 추진한 2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혈투를 벌였던 양차 대전이 정리된 뒤, 그렇게 전후 ‘영광의 30년’이 시작됩니다.
너희들 너무 설쳤어
그러나 시대는 계속 변하게 마련입니다. 1차 산업혁명이 2차 산업혁명에 자리를 내줬는데 2차 산업혁명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포드주의의 시대는 사회발전의 새로운 물결을 타게 되는데, 바로 세계화와 아웃소싱이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BWS) [footnote] 국제적인 통화제도 협정에 따라 구축된 국제 통화 체제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튼 우즈에서 열린 44개국이 참가한 연합국 통화 금융 회의에서 탄생 (위키백과) [/footnote]로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와 IMF(국제통화기금), IBRD(국제부흥개발은행)가 등장하고 적어도 제1세계에서는 미국이 제공하는 세계안보라는 공공재로 정치적 안정을 이뤄내자 경제통합에 다시 시동이 걸린 겁니다.
마침내 공산권도 무너졌고, 결정적으로 중국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변동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과거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교통과 통신의 비약적인 성장이었습니다. 이제 공장을 기존의 공업중심지 바깥에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공단들은 70년대에는 에스파냐로, 그 뒤에는 동유럽으로, 최종적으로는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자동차 공장들, 피츠버그의 제철소는 독일과 일본과 경쟁하는 것도 버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선벨트로, 멕시코로, 그리고 역시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이런 걸 어떻게 가능하게 해줬을까요? 첫째로는 러스트 벨트(미국 중서부의 이제는 몰락한 산업도시들)가 흥하게 된 입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오대호 연안의 풍부한 광물 및 목재에 더하여 오대호를 중심으로 한 수운 네트워크를 따라 발달했습니다. 시카고를 비롯한 중서부의 도시들은 북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권인 뉴욕 메갈로폴리스의 시장과 대서양 항구 너머 유럽 시장에 대한 우수한 접근권이 최대 장점이었습니다. 이리 운하를 비롯한 수운망을 통해 타 지역보다 훨씬 싼 운송비가 이 지역의 최대 강점이었죠. 이런 입지 조건을 다른 데서 찾을 수 없고 이미 상당한 자본을 투자한 대공장이 있는 한 노동자들은 교섭상의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시기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라 [footnote]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 시스템[/footnote]는 미국 역사상 마지막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루어지자, 러스트 벨트가 갖는 마지막 이점인 운송비 비교우위는 사실상 최초의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미국 남부로 공업단지의 이전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제 자본가들은 굳이 높은 임금을 노동자에게 주면서까지 사업을 디트로이트에 유지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사형 선고라고 함은 두 번째 사형선고도 있다는 셈인데 운송상의 대규모 혁신이 바다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준화된 컨테이너의 등장은 항만의 물동량 처리를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이제 미국 내에서의 산업 이전을 말도 안 되는 규모로 넘어서는 대규모 산업 이전의 시대를 만들어낼 교통상의 예비 단계는 거의 갖춰졌습니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 통신의 발전, 정보기술의 발전입니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 컴퓨터가 생산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북한이 자랑하는 CNC입니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절삭가공을 시작으로 공장에 자동화 물결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구태여 말도 안 듣는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고용할 이유가 자본가로서는 또다시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두 번째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디지털화되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공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계 도면, 디자인, 제품의 기능, 사용자들의 피드백, 기계의 사용법 등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변환되자 이 정보들은 곧바로 새롭게 문을 연 중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게 됩니다. 기존에 러스트 벨트나 라인-루르 지역의 대공장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정보 이동의 한계 때문도 있습니다. 제조업의 최고 존엄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을 수직적으로 통합해야 하고 몹시 많은 공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한데 모아야 집적의 경제도 달성할 수 있고 하청업체들 간의 커뮤니케이션도 빨리 이루어져 여러모로 효율적입니다. 사실 이는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무시 못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넘게 된 공간의 제약에 더하여, 전산화가 가능하게 해준 경영 및 관리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기술적인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많은 공정을 이제는 분리해 세계 각지에 배치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진 타이어와 일본에서 만들어진 전자장비를 중국으로 모아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잡다한 부품과 함께 조립시키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이런 무시무시한 업무량을 처리할 조직력 자체가 확보가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위성통신과 해저 케이블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해졌고,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대공장 체제를 유지할 마지막 유인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토에서는 자동화된 공장이 고부가가치 생산품을 찍어내면서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대량생산 제품은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 자리 잡게 되면서 역시 유럽이나 미국의 대공장에서 고용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나마 미국이나 유럽에 남아 있는 제조업이래 봤자 남부 미국, 동유럽으로 이전할 것이었고, 그조차도 대공장과는 거리가 먼, 단일 공정에 전문화된 훨씬 작아지고 최적화된 공장이었죠. 노동자들에게 전이되는 부는 점차 쪼그라들었습니다. 생산에서 노동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게 적어졌기 때문이죠.
그 대신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상 사람들은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의 금융가로 모이거나 실리콘밸리와 같은 테크노폴로 가서 공장 수십 개를 모은 것보다 많은 돈을 창출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대공장 노동자의 아이들은,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 특히 인공지능 영역에서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컴퓨터에 쉽고, 인간에게 쉬운 일은 컴퓨터에 어렵다)로 인해 자동화하기도 당분간 어려운 서비스업에 종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업 직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도 어려워서 소득 양극화가 본격화하고, 실업이 만연했습니다. 안정된 직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임시직만 넘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계층 이동은 이제 과거의 꿈이 되어버렸고, 고등교육 받은 사람들은 더욱 넓은 세계와 연결되는 반면 저학력 저소득층은 자신들의 지역사회가 황폐화되는 걸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선진 산업사회는 세 개의 나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 뒤에 머무르는 나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다른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나라로 말입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일반적인 우파의 서사대로 무지몽매한 개돼지 대중을 선동시켜 말도 안 되는 이상향에 사람들의 돈과 시간과 그리고 생명을 낭비하게 한 좌파란 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위해, 처음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조직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도널드 서순은 “설령 마르크스주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정치가 강력한 힘을 쓸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노동자의 힘이 만들어낸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각 시대는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좌파의 서사대로 자신들을 끝 간 데까지 쥐어짜려고 하는 악의적인 자본가들도 찾기 힘듭니다. 물론 세계화는 개발도상국들로 하여금 위대한 탈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선진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몰락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몹시 비극적인 이야기를 수없이 양산해냈습니다. 하지만 좌파의 서사대로 자본주의 ‘돼지들’의 악의적 획책보다는 자본가가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득을 추구한 결과물(그리고 아무리 대공장 노조들이 강하다고 해봤자 그들이 최종적 권력관계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현재 상황인 겁니다.
거기에 더하여, 당시 2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경제모델은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만연한 파업, 그리고 실업, 낮은 성장, 인플레이션 등이 선진사회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그다지 일관된다고도 할 수 없는 모종의 흐름은 그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일 뿐입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진짜로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면 저는 이러한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종교적, 도덕적 서사보다는 계급 간 이익관계의 충돌로 드라이하게 바라보았다는 점을 그중 하나로 꼽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이 근대 평등주의의 역사를 더 잘 설명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뉴욕, 런던, 도쿄라는 세계 3대 도시의 자본가들이 승리하는 것이 역사의 귀결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언 모리스는 역시 그의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다른 문장도 썼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사회발전의 지속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또한 만들어낸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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