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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지금 당장 ‘마케팅 프로세스’를 검색해보라. 정석으로 여겨지는 필립 코틀러의 방법론부터 다양하게 변형된 프로세스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필립 코틀러의 R-STP-MM-I-C 프로세스 각 단계 중 코틀러의 순수 창작은 없다. 이미 존재했던 개념을 결합해 ‘마케팅 프로세스’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수학 공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방법론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다. 마케팅의 역사를 알면 익숙한 여러 기법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본질을 이해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스스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어설픈 컨설턴트를 걸러낼 능력도 생긴다.

이 연재 ‘마케팅의 역사’가 형식보다는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자)

  1. → 괴벨스, 마왕의 마케팅 
  2. 선전의 대가들 – 버네이스와 괴벨스
  3. 오길비, 브랜드 이미지의 탄생
  4. 마케팅 비긴즈 – 슬론과 드러커
  5. 마케팅의 아버지 – 필립 코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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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부대가 베를린을 차지할 것이다.

-스탈린

리발코 리발코(Pavel Rybalko, 사진)의 군세는 흡사 전쟁 초기 아르덴 숲을 돌파했던 나치의 기갑부대 같았다. 나치의 전격전을 흉내라도 내듯 그의 전차들은 굉음을 내며 베를린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 1945년 2월 13일, 리발코가 이끄는 소련 제3근위기갑군은 베를린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브레슬라우(Breslau)에 도달했다. 나치군은 순식간에 격퇴되었고, 브레슬라우는 이틀 만에 리발코의 군세에 의해 포위되었다.

리발코의 ‘붉은 군대’을 저지한 나치의 영웅 

리발코는 기세를 몰아 제4기갑군을 동원하여 괴를리츠(Gorlitz)를 침공했다. 브레슬라우는 저항이 극심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하고 포위만 유지한 상태였다. 괴를리츠를 점령하면 베를린은 200km 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파고든 탓일까? 나치의 역습으로 제4기갑군은 나이세 강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처한다. 리발코는 제3근위기갑군을 급파하여 제4기갑군을 구원했다. 괴를리츠 점령은 실패했지만, 리발코는 근처의 도시 루반(Luban)을 공격해 점령했다. 베를린은 앞으로 250km 남았다.

1945년 3월 1일. 나치군이 루반을 기습해왔다. 슈투크(Stug) 돌격포의 포격이 마을을 부수고 흔들며 기습의 시작을 알렸다. 늑대처럼 무리를 지은 나치의 판터(Panther) 전차 군단은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으스러트리며 마을 중앙으로 쇄도했다. 리발코는 허겁지겁 대응에 나섰다. T-34 전차들은 판터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포신을 돌리기도 전에 화염에 휩싸여 고철이 되었다.

그때 마을 북서쪽 숲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기습을 피해 도망치던 리발코의 전차들이 매복해있던 적에게 당한 것이었다. 불타는 숲을 뒤로하고 전차 부대를 해치운 자들이 나타났다. 판처파우스트(나치 독일의 휴대용 대전차화기)를 손에 쥔 그들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소년들과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었다. 이 전투로 소련은 전차 162대와 차량 106대를 잃었다. 포로로 잡힌 176명의 붉은 군대는 나치에 의해 모조리 처형당했다.

1945년 3월 9일. 나치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가 루반를 방문했다. 루반을 탈환한 전쟁 영웅들을 격려하고 선전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T-34를 두대나 격파한 전쟁 영웅이 괴벨스 앞에 섰다. 괴벨스는 영웅에게 2급 철십자장을 수여했다. 철십자 훈장을 받은 영웅의 이름은 빌헬름 휴프너(Wilhelm Hubner). 16세의 소년이었다.

괴벨스(좌)에게 훈장을 받은 16세 소년 빌헬름 휴프너(우)
괴벨스(좌)에게 훈장을 받은 16세 소년 빌헬름 휴프너(우)

나치의 항복, 하지만 끝내 소련군에 저항한 이유

괴벨스가 루반을 방문한 지 50일이 지난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브레슬라우와 루반은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접한 후에도 소련군과 싸움을 계속했다. 5월 8일, 나치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소련은 5월 9일에 항복을 인정했다.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되었으나 몇몇 도시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완전히 점령하자 베를린 시민 중 천여 명은 자살을 선택했다. 프라하는 5월 11일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소련군과 싸웠다. 보른홀름은 섬이 초토화되는 폭격 속에서도 끝까지 소련군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9월경 덴마크에 복속되었다.

발터 벵크 전쟁 말기, 독일인은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병적으로 기피했다. 발터 벵크(Walther Wenck, 사진) 장군의 제12군이 독보적인데, 엘베강에서 다섯 대의 티거 2(Tiger II) 전차로 배수진을 치고 28만의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배수진의 목적은 오로지 독일인들이 엘베강 건너편의 미군에게 투항할 수 있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엘베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독일인들은 자살을 택했다. 발터 벵크는 그의 참모진과 함께 마지막 순서로 엘베강을 건넜다.

왜 독일인들은 나치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항복하지 않았던 걸까? 왜 목숨을 걸고라도 소련군이 아닌 미군에 투항하려 했을까? 소련군에게 한 짓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서? 아니다. 발터 벵크의 제12군만 하더라도 살아있는 미군 포로를 전차의 방패로 매달았었다. 그 상태로 엘베강을 건너온 미군 대대 병력을 전멸시켰고 미군을 엘베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불과 십여 일 전에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목숨을 걸고 미군에 투항한 것이다.

독일 포로를 대하는 각국의 태도를 보자. 프랑스는 13만, 소련은 42만의 독일 포로를 전후 복구에 혹사시키다가 죽였다. 프랑스가 착해서 덜 죽은 게 아니다. 단지 소련이 포로를 더 많이 잡았기 때문에 더 많이 죽은 것이었다. 미국은 잡은 독일 포로를 전후 복구에 동원하지 않았다. 미국이 착해서가 아니다. 파괴된 국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은 잡은 포로들을 돌보지 않았다. 약 5만의 포로들이 추위에 떨고 배설물의 바다에서 뒹굴다가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 연합군이 나치를 대하는 잔혹함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

독일인의 행동 동기는 단순히 보복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더 깊고 어두운 마음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의외로 전쟁 초부터 일관되게 유지되고 관리되어왔으며, 필요에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될 수 있었다.

피에 굶주리고 복수에 목마른 적에게 맞서려면 무엇보다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괴벨스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유럽 곳곳에 존재해왔던 정서였다. 괴벨스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나치 정권 창출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덕분에 독일은 유럽 내에서 유대인 혐오의 선도국가 비슷한 것이 될 수 있었다.

괴벨스가 독일 전역에서 벌인 캠페인은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다’였다. 1차 세계대전 패배도 유대인 때문이었고, 경제 대공황도 유대인 때문이었고, 하이퍼 인플레이션도 유대인 때문이었고, 맑시즘은 유대인이 독일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든 사상이었다.

나치의 경쟁 상대였던 독일 공산당은 괴벨스의 맑시즘 음모론으로 견제당해 점차 힘을 잃어갔다. 독일인들은 독일에 닥친 여러 문제들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며 똘똘 뭉쳤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나치당의 지지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독일인들은 스스로 나치에게 권력을 쥐여주었다. 독재자 히틀러는 그렇게 탄생했다.

마왕의 마케팅

에펠탑에 하켄크로이츠를 꽂고 마르스 광장을 걷던 히틀러와 나치 장성들. 그들이 느낀 우월감. 그 우월감은 열등한 유대 민족을 향한 증오심을 재물 삼아 성장한 것이었다. 우월감과 증오는 괴벨스가 선전술의 산통을 통해 낳은 쌍둥이였다. 괴벨스는 우월감과 증오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비결이며 앞으로의 승리도 우월감과 증오의 활용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소련에 대한 ‘계획된’ 분노와 증오  

괴벨스는 소련과의 전쟁을 앞두고 소련을 향한 독일인의 증오심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에 대한 분노는 독일 민족을 하나로 단합시키고 나치 용사들의 전투력을 상승시킬 게 분명했다. 그는 소련의 볼셰비키당이 유대인의 분파이며 소련은 독일 내 유대인과 손잡고 국가 전복 음모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치군은 승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을 몰아붙였다. 나치의 스몰렌스크 점령 직후 카틴(Katyn) 숲에서 소련군이 폴란드 양민 2만 5천여 명을 학살한 정황이 드러났다(카틴 학살). 괴벨스는 즉시 중립국 의사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파견하고 선전 영화를 만들어 소련군의 학살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카틴 학살 암매장지 중 하나 (1943)
카틴 학살 암매장지 중 하나 (1943)

카틴 학살은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명분이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나치군이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동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역사를 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라 주장한 바 있다. [나의 투쟁]에 따르면 독·소전쟁은 독일의 아리아 민족이 살아남느냐 소련의 슬라브 민족이 살아남느냐의 민족 생존을 건 투쟁인 것이다. 카틴 학살을 본 독일인은 독소 전쟁에서 패배하면 학살당한 폴란드 양민 2만 5천여 명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카틴 학살은 공포였고, 그들의 우월감은 공포를 증오로 변화시켰다.

소련에 밀린 독일, 그리고 괴벨스의 ‘총력전’ 

독일이 이기고 있는 동안은 우월감과 증오가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나치군이 패배하기 시작하자 우월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월감을 상실하면 증오는 극심한 공포로 돌변한다. 그 사실을 괴벨스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위기감을 느낀 것만은 확실했다. 괴벨스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총력전이었다.

https://youtu.be/42sp-6Vmv9U

1943년 2월 18일,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소년, 노인, 여성 할 것 없이 국민 모두가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대로 소련에 밀리면 독일 민족은 사라질 테니 민족 전체가 총력전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총력전을 수행할 권한을 주지 않다가 발키리 작전 실패 5일 후인 1944년 7월 25일에 괴벨스를 총력전 전권위원으로 임명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반격에 성공한 이후, 소련군은 수많은 도시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키며 진군했다. 1944년 10월 21일, 소련군은 드디어 독일 본토에 첫발을 내딛는다. 독일 본토의 도시 네메르스도르프(Nemmersdorf)가 소련군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나치군은 이틀 만에 네메르스도르프를 다시 탈환한다. 그리고 학살의 현장을 발견했다. 강간당해 널브러진 사체, 탱크에 머리가 으깨어져 죽은 아기 등 상상도 못 할 참혹한 사체가 마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괴벨스는 키틴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사위원회를 파견했다. 또한, 처참히 죽은 자국민의 시신을 촬영하여 선전 영화를 만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

네메르스도르프의 소식은 생생한 영상으로 독일 전역에 전해졌다. 자민족의 학살을 목격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한 부류는 우월감을 상실했다. 그들이 가졌던 증오는 공포로 변했다.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최대한 멀리 도망쳤다. 다른 한 부류는 증오의 화신이 되었다. 그들은 증오심을 불태우며 소련군과 싸우기 위해 국민 척탄병과 국민 돌격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최후의 날, 그들은 나치가 항복한 후에도 소련군과 끝까지 싸웠다. 소년도 여성도 노인도 소련군을 죽이는 것에 목숨을 내던졌다. 소련군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면 자살을 택했다. 그들은 더는 독일 시민이 아니었다. 나치 그 자체였다. 괴벨스의 의도대로였다.

전쟁뿐만 아니라 기업도 바꾼 괴벨스 

이제까지 사람들은 전쟁을 논할 때 무력을 어떻게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했었다. 전쟁에서의 전술과 전략은 단지 무력 사용의 미시적, 거시적 방법에 불과했다. 괴벨스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다. 괴벨스가 보여준 선전술은 독일 공산당의 몰락에서처럼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자국민에게 싸워야 할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그 동기는 어린 소년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도 굴하지 않고 일회용 대전차포를 들고 자발적으로 목숨을 던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전쟁에서의 선전은 괴벨스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그 실효성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괴벨스의 선전술은 그 의문을 깨끗이 해소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각국은 괴벨스의 선전 방법을 연구한다. 일례로 미국 CIA의 전신인 OSS의 초대 국장 윌리엄 도노반은 괴벨스의 선전술을 미국에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세계 각국은 심리전 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선전은 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상식이 되었다.

괴벨스는 기업이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까지 기업은 시장을 자사의 제품을 필요로 하는 대중으로만 생각했었다. 괴벨스는 기업의 관점을 바꾸었다. 그의 선전술을 시장 전략에 적용하면 제품이 필요하지 않던 사람에게도 제품을 구매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다. 괴벨스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선전의 중요성을 환기시켰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의 선전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괴벨스의 선전술 

1. 고통의 원인을 쉽고 간결하게 말해준다 

당시 유대인이 독일에 어떤 기여를 했었는지 잠깐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에서 약 10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군으로 참전했었다. 이 중에서 약 1만 2천 명이 독일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접어두고 경제 대공황이 닥친 독일에서 다음의 사실들만 나열하면 유대인은 순식간에 독일 경제를 빨아먹는 흡혈귀가 되어버린다.

  • 유가증권을 최초로 만든 건 유대인이다. 베를린 주식시장도 유대인이 만들었다.
  • 독일 대부분의 주식과 채권은 유대인 소유다.
  • 독일 신문사의 50%는 유대인 소유다.
  • 독일 은행의 50%는 유대인 소유다.
  • 독일 백화점의 80%는 유대인 소유다.

괴벨스는 여기에 시온 의정서 음모론,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독일 공산당의 폭력성을 더한 후 독일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설명한다.

“독일의 경제, 정치, 언론은 모두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다. 유대인은 볼셰비키와 손잡고 독일을 삼키려 한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유, 독일 경제가 어려운 이유, 순수 아리아인 혈통의 고귀한 독일인인 당신이 실업자인 이유는 모두 유대인 때문이다!”

‘모두 유대인 때문이다.’ 이것이 괴벨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간결하고, 주장에 대한 설명은 몇몇 가지 사실에 기반하므로 설득력이 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피로는 간 때문이야.

이 CM송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근래의 선전 중에 고통의 원인을 간결하게 말해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루사의 효능을 줄줄이 나열하거나 배우가 CF에 등장해 간을 부여잡고 찌푸리는 것보다는 피로 공화국 대한민국의 원인이 간 때문이라는 주장이 훨씬 간결하고 공감하기 쉽다. 우루사는 간 기능 개선에 확고한 포지션을 가진 브랜드다. 이런 포지션이 확보된 상태에서 피로는 간 때문이라는 인식을 피로 공화국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면 피로할 때마다 당연히 우루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혹시 주변에 플라스틱 버튼이 달린 폰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에는 있다. 플라스틱 버튼은 사실 별로 불편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름의 장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래 사진처럼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 아이폰을 보여주면 플라스틱 버튼이 달린 모든 폰은 불편한 폰이 되어버린다.

잡스 괴벨스

잡스는 플라스틱 버튼을 달고 나오는 스마트 폰들이 전혀 스마트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폰이 스마트하려면 UI가 앱의 성격에 걸맞게 최적화되어야 하는데 플라스틱 버튼은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간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화면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화면이 작으니 영화나 게임을 즐기기도 별로다.

게다가 비싸게 주고 산 폰인데 버튼 하나만 고장 나도 못 쓰는 폰이 되어버린다. 당신이 스마트한 모바일 라이프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전부 플라스틱 버튼 때문이다. 이게 잡스의 주장이다. 플라스틱 버튼 때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파괴력 있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블랙베리가 사라졌다.

2. 공신력과 영향력이 있는 제3자를 통해 신뢰도를 높인다

괴벨스는 적국이 학살한 현장에 항상 중립국 의사들로 구성된 다국적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 결과는 타국에게는 전쟁에 대한 대의명분이었고, 자국에게는 나치가 정의로운 전쟁을 한다는 것을 제 3자를 통해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제 3자를 통해 메시지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은 오늘날에는 너무 흔한 선전이 되어버려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박카스는 ‘진짜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습니다.’라고 선전했다. 약을 파는 약국에서 박카스를 파니까 그만큼 박카스는 피로회복에 확실한 효과가 있다는 메시지다.[footnote]이 광고는 2011년 당시 보건복지부와 식약청이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며 시정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동아제약은 해당 광고를 중단했다.(관련 기사) – 편집자.[/footnote] 나이키는 스포츠 선수가 나이키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을 선전한다. 공신력 있는 스포츠 전문 브랜드라는 메시지다. 애플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애플 워치를 착용한다는 것을 선전했다. 애플 워치가 IT기기가 아니라 셀러브리티의 패션 아이템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박카스

위와 같이 비즈니스 영역에서 괴벨스의 선전술이 응용된 사례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괴벨스는 전쟁에서 무력 자체에 집중하지 않았다. 괴벨스는 아군이 적에게 무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집중했다. 비즈니스의 응용 사례를 보아도 제품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제품을 사고 싶게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괴벨스의 선전술인 것이다.

사실 괴벨스의 선전술은 괴벨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괴벨스에게는 스승이 있다. 1933년 히틀러는 괴벨스의 스승을 나치에 등용하려 했었다. 그러나 거절당했고, 그해 괴벨스가 나치의 국민계몽선전 장관에 임명된다. 히틀러의 등용이 성사되었다면 괴벨스의 스승이 나치의 선전부 장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괴벨스의 스승의 나라는 나치를 패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 그의 조국은 아메리카였다. 그리고 그는 뉴요커였다. 그는 자본가의 천국에서 광고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비즈니스 전사였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오늘날 PR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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