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교권침해 피해자였습니다
교사인 아내가 학교에서 학생들 활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일진으로 유명한 한 아이가 그 공간 한 켠에 놓인 소파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전날 음주를 하고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당연하겠지만, 활동 중에 아이가 드러누워 있으면 교사는 상태를 체크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드러누워 자리 착석, 상태 체크도 거부하며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을 아내가 도우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키가 185가 넘는 거구의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밖으로 나오라고 했고, 벽을 주먹으로 치는 행동과 함께 20분에 걸친 욕설과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내뱉었고, 아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귀가해야 했다.
그렇다. 우리는 교권침해 피해자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당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아내는 건강이 매우 나빠져 6개월을 고생했다. 시름시름 앓는 아내의 상태가 가벼울 거로 생각하고 우선 주말만 지내보자고 말했던 것, 그리고 그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했던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처참하게 후회스런 일이 되었다.
결국, 가해 학생은 원래 집이 멀다는 이유로 곧바로 전학을 갔다. 물론 나 역시 그 가해자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생각이 있었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몇 년을 그저 끌어안고 살았을까. 아내는 왜 나를 말렸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교사’는, 누구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피해자의 신분조차 획득할 수 없는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성직(聖職)
우선, 여러분들께서 한번 숙고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만약 본인 또는 본인의 자녀가, 매일같이 쌍시옷이 남발되는 욕설의 한복판에서 일해야 하는 직장을 가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이 가해와 피해가 있는 폭력이라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 직장을 다니거나 다니게 하겠는가? 대한민국에 한 명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이 학교고, 교사가 그런 직업이다.
대한민국은 교권에 대한 보호수단이 교권위원회 이외에 전무하며, 교권위원회 역시 아동학대법에 의해 무력화되기 일쑤이다. 물론 병영국가 시절 우리나라에는 그런 보호수단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교사 집단 자체가 물리적 폭력 수단을 사회적 합의에 의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의 사례가 발생해도 교사는 제지조차 어렵다. 아동학대법 때문이다. 실제로 어제 같이 이슈가 된 초등생에게 폭행을 당한 교사의 경우, 그냥 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학교 현장에서는 일종의 매뉴얼이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만 때리라고 팔이라도 붙잡는 즉시 아동학대법으로 시비가 걸리기 때문이다.
물론 재판으로 가게 되면 정당방위로 인정이 되어 무죄가 나올 것인데, (이마저도 가해자 부모가 전관이면 장담도 어렵다.) 무고죄 역고소조차 불가능한 법의 특성, 그리고 고소와 재판이라는 절차 자체가 소를 제기한 쪽의 삶도 피폐하게 만든다는 점 등을 고려하였을 때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결사체는 교육자들을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있는지 의문이다.
슬로우뉴스는 올해 5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김동석 교권본부장과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중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참고로 교사의 ‘생활지도권’은 올해 6월 28일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칭찬 스티커도 마음대로 못 줍니다. 청소 잘했다고 칭찬 스티커 주잖아요. 못 받은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못 받았다고 정신적인 학대를 받았다고 신고해요. 또 가장 흔한 사례는 아이들이 싸우면 말려야 될 거 아닙니까. 아이들 싸움 말리는 가운데에서 손목 잡았다고 신체 학대라고 아동학대 신고하고요.
교육부에 학생 간에 싸움이 있거나 싸우는 아이들이 교사한테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문의하면 교육부 답변은 뭔 줄 알아요? 교권 침해 해설서에는요. 그 자리에 다른 선생님을 불러서 도움을 받거나 그 자리를 피하라고 나와요. 도망가라는 얘기잖아요. (= 그게 교육부 공식 매뉴얼이라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 이거 참 한심하네요, 진짜) 아니요, 그게 현실이예요. 그러다 보니까 신체적 접촉을 피하는 펜스 룰 있잖아요. 마치 펜스 룰처럼 문제 행동 학생들과의 접촉과 잠재적 갈등을 피하려고 하는 교육 방임 현상 벌어지는 거죠.
김동석 교총 교권본부장, 슬로우뉴스 인터뷰, 2023. 5.
교원지위법에 관해선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생활지도 부분과 교육활동 부분입니다. 이 영역은 학생 특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교총이 교육계 염원을 담아서 생활지도법 발의해, 교원에게 생활지도권을 달라 해서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됐고, 생활지도권에 관한 부분은 6월 28일에 시행이 됩니다.
학교 장과 교원은 법령과 학칙에 따라서 생활지도 권한을 가진다. 이렇게 법이 통과됐어요. 그러면 이제 생활지도권이 6월 28일부터 시행이 되는데요. 그에 따른 시행령을 교육부가 잘 만들어서 문제행동 학생에 대해서 즉각적인 제지를 통해 교실질서유지권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달라고 저희들이 4월 25일에 교육부에 요구했고요. 그게 제대로 송환되기를 저희들이 희망합니다.
김동석 교총 교권본부장, 슬로우뉴스 인터뷰, 2023. 5.
기계가 아니라 사람 취급을 하셔야죠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조치를 시행하고 있사오니, 따뜻한 마음으로 대화 부탁드립니다. 지금 통화하고 계신 직원은 누군가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전화를 하면 나오는 문구다. 2010년대 중후반 한국은 감정노동이 큰 이슈가 되었고, 몇 사람이 목숨을 끊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이 법이 제정이 되어 고소와 고발이 가능해졌으며, 최근에는 다행히 유사한 소식은 들려오고 있지 않다.
교사들은 아직도 개인 휴대전화로 카카오톡 프로필까지 학부모들에게 간섭을 받는 동안 말이다.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학부모들의 전가의 보도이다. 물론 그들이 가정 내에서 자녀에게 좋은 영향만 끼치는 행동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은 너무 확실하다. 하지만 많은 학부모들은 교사는 기계처럼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얼마 전에는 교사가 교실에서 커피를 마신다며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의 이야기가 뉴스에 뜬 적이 있었다. 아이가 보고 배운다는 이유였다. 코메디 같은 일이다. 아이가 아무리 어른을 따라한다고 한들, 그것을 교정해야 하는 의무는 부모에게도 있다. 부모의 관점에서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교사는 그 수백 가지의 요구사항을 가진 아이들 수십 명을 매일 만난다.
그럴 것이면 학교에는 인간 교사가 아닌 로봇이 있어야 맞는 거다.
이기심도 적당히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해자 신분도 갖지 못하고, 대가도 없이 어른의 의무를 학교에 외주를 주는 학부모들, 보호대책은 전무한 사회 시스템 때문에 교사가 죽었다. 참고 참던 교사들이 폭발하여 서이초 정문에 꽃다발과 추모의 포스트잇을 붙인다.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교사 ‘개인 휴대전화’ 로 문자를 보낸다.
사람은 이기심을 적당히 가져야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직업적 공간에서 겪었을 힘듦이 그 죽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내 아이’ 가 볼까봐 무서우니 슬퍼하지도 말라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더글로리에서 하도영은 분노에 몸을 떨며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너가 얼마나 안전한지 그것부터 궁금하냐.’라고. 교사들은 지금 그런 심정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 수 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도 부모다. 아이가 성장할 때 그런 관념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라고 부모가 있는 것이다. 자녀가 없는 나도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안다. 그렇게 가르칠 생각을 해야지, 사람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말라니 어느 정도로 이기적이면 그렇게 될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이러면, 너는 애가 없어서 모른다. 애는 진짜 말을 안 듣고 부모가 가르친다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고… 라고 하며 라떼를 들이킬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실 분들은, 그러면 본인 말도 안 듣는 아이를, 20명이 넘는 아이들을 매일 봐야 하는 교사가 교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셨으면 한다.
삶보다 죽음을 창출하는 시스템
2000년대 초중반에는 버스기사 폭행 문제가 한창 이슈였다. 술을 곱게 먹지 못한 사람들이 버스만 타면 기사를 때렸다. 기사는 사고가 날 수 없으니 맞으면서도 운전을 했고, 그러다가 한 버스 기사가 심정지로 사망했다.
그러고 나서 폭행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생기고, 대중교통 운수업무 종사자에게 위해를 가하면 중대한 처벌을 받게 법이 개정되었다. 이는 유관 노동조합의 대대적인 요구가 컸다. 실제로 노동조합은 의회에 의원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교사 출신 장관도, 교사 출신 국회의원도 찾아보기 어렵다21대 국회에서는 강민정 의원이 유일하다(편집자). 교사들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가 그 이유다.
사람이 죽어야 피해자가 되는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고작 개인에 대한 엄벌에서 모든 것이 그치는 것은 시스템이 원천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대의제 체계 안에 집어넣지 않기 때문이다. 전 정권의 김상곤·유은혜 부총리 그리고 현 정권의 박순애·이주호 부총리 모두 교직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각 광역지자체 교육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체계 하에서 어떻게 교직을 보호하나.
소가 전부 죽어도 외양간도 못 고치는 사회
사건 발생 하루만에 일부 언론에서는 물타기를 시작했다. 예전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다 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고인이라서 만만한지 개인 행적을 탈탈 털어 ‘누군가‘ 를 보호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너무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소가 죽으면 외양간이라도 고쳤다. 그러나 이제는 소가 죽어도 외양간 탓이 아니니 내버려 두자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사회의 메신저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제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사실은 그저 아무래도 좋은 것인가.
딱히 그냥 기대도 안 된다. 이 나라는 이제 소가 모조리 죽어도 외양간조차 고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고, 메신저들은 윤리를 저버렸으며, 오로지 이기주의만이 횡행한다.
그래도 어찌저찌 살아지기는 할 것이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너’ 가 ‘나’ 가 되었을 때에도 가만히 계시면 된다.
어차피 다 우리가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