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참여연대는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에 대해 짚어보는 세 편의 판결비평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선거권, 장애인에게도 동등할까요?’
세 번째 특집은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지적∙자폐성 장애를 가진 유권자의 특성을 살려 투표 보조를 지원하기는커녕 방관하는 국가에 대한 임시조치를 내린 판결입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류다솔 변호사가 비평했습니다.
-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에 가고 싶어요 (ft. 대법원, 어림없는 소리!)
- 1층이 있는 삶: GS25 차별 시정 판결의 의미
- ‘말아톤’ 윤초원 씨는 지난 대선에서 잘 투표했을까
- 장애인 비하 발언도 국회의원 면책특권인가
[/box]
지난 3월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 가운데 ‘잃어버린 참정권’을 되찾아 투표소를 찾은 이들이 있다. 법원의 결정으로 투표보조 편의를 ‘다시’ 제공받게 된 발달장애인들이다.
[box type=”info”]
발달 장애란?
- 정의: 주로 발달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정신적 또는 신체적인 장애를 통틀어 가리킨다.
- 분류: 지적장애, 뇌성마비, 염색체 장애(다운 증후군 등), 전반적 발달장애, ADHD 등이 발달장애로 분류된다. (위키백과 ‘발달장애’에서 발췌)
[/box]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22년 2월 10일 대한민국에 대해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를 인정하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20년 4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가 돌연 투표 관리 매뉴얼에서 발달장애인 투표보조에 관한 내용을 삭제한 뒤 제기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구제조치인 임시조치신청에 따른 결과였다.
위 사건의 당사자인 발달장애인 A씨는 중앙선관위가 지침을 변경하기 전까지 10년 이상 보호자의 투표보조를 받아 별다른 문제 없이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등에서 투표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중앙선관위의 투표관리매뉴얼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에 관한 내용이 삭제되자 투표소의 투표사무원, 지방선관위와 중앙선관위의 공무원들은 모두 A씨가 걸어서 기표소로 갈 수 있어 신체적 장애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표보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10분이면 충분했던 투표 시간이 2시간 이상으로 늘었고, A씨와 그 보호자인 A씨의 어머니는 고압적인 투표사무원과 주변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가슴 찢기는 고통과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장애인 차별 말라’는 법, 그러나 현실은
헌법 제24조에 의하면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 제2항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보조원의 배치’를 포함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가입∙비준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는 장애인이 투표를 할 때 장애인의 요청에 따라 그가 선택한 사람에 의하여 도움을 받도록 인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즉 선거권을 가진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 유권자와 동등하게 선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지적∙자폐성 장애 특성을 고려하여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법에 따른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자 장애인 유권자의 권리인 것이다.
중앙선관위의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선거 투표 관리 매뉴얼에는 투표를 보조받을 수 있는 신체 장애의 대상에 “지적∙자폐성 장애”가 포함되었고, 지적∙자폐성 장애인인 발달장애인은 아무런 문제 없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선관위는 지적∙자폐성 장애인 중 스스로 투표가 가능한 사람에 대한 자기결정권 침해 등을 방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투표 관리 매뉴얼에서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이라는 문구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어떤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투표가 가능한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전혀 없었다.
지적∙자폐성 장애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지적∙자폐성 장애로 인해 단계별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일상 생활과 달리 투표소 등 낯선 환경에서는 그러한 판단이 더욱 힘들어져 충분한 신뢰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 함께 있지 않으면 의사표시를 포함한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중앙선관위가 지적∙자폐성 장애를 투표보조 대상에서 일방적으로 삭제한 것은 이와 같은 발달장애인의 특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조치였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소중한 선거권
중앙선관위가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를 삭제한 데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2021년 3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 제1항과 제2항, 장애인복지법 제26조와 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 공직선거법 제6조 제1항 등을 근거로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정당한 편의제공 방안 마련과 모든 선거사무원에게 관련 교육을 실시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아무런 대책이나 입장을 내지 않았고, A씨와 장애 단체들은 제20대 대통령선거를 100일 앞두고 이 사건 임시조치신청에 이르렀다. 법원은 분쟁 해결을 위해 양 당사자의 의견을 조율하여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으로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이 다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점은 큰 의의가 있다. 다만, 법원이 정부 측에서 제안한 투표 관리 매뉴얼 문구 수정안에서 장애를 의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증상’이라는 표현과 “과도한 간섭을 제지할 수 있다”는 등의 애매한 표현을 결정 이후 당사자 사이에 신의성실에 따라 협의하도록 한 점은 한계로 남았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 법원의 결정이 나온 이후에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 현장에서도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이 투표보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에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대응팀’에서는 지난 4월 13일 중앙선관위를 규탄하며 6월에 있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전까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다가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는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의 투표할 권리가 반드시 보장될 수 있도록 중앙선관위와 정부 관계자들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내 발달장애인 유권자는 약 20만 명에 달한다. 지난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득표율 1위와 2위 후보 사이에 차이는 0.73% 포인트, 약 24만표로 당선자가 결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발달장애인 유권자의 투표는 우리 사회를 바꾸는 캐스팅보트(casting vote)가 될 수 있다.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이 선거 관련 정보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제공받고, 자신의 의사에 기해 투표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가 제공되어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선거 기간 동안 큰 길과 굽은 골목, 각 가정의 우체통에는 선거 관련 각종 현수막과 홍보물이 넘실댄다. 이 떠들썩한 민주주의의 ‘꽃’에서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문명사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