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체의 신비 속에 살아간다. 인간은 평생 인체 중 뇌 기능의 50%도 쓰지 못한다고 한다. 인류가 정복을 못한 것은 우주가 아니라 사람의 ‘뇌’일 것이다. ‘뇌’를 연구하는데 청춘을 바친 한 젊은이가 있다.
이 젊은이는 앞으로도 ‘뇌’를 연구하는데 그의 많은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지난 1년간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강타로 온 나라가 흔들렸다. 이 와중에도 ‘뇌’에 빠진 이 젊은이는 꿋꿋하게 나아갔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꿈’을 져버리는 순간에, 그는 그가 지난 10년간 목표한 꿈을 이루었다.
‘뇌’에 빠진 젊은이, 박영균 교수와 만났다.
- 인터뷰이: 박영균 교수
- 인터뷰어: 글렌다박 기자
- 2020년 바람이 많이 불던 가을의 어느 날에 Zoom을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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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경과학을 연구한 신경공학자로서 미국 MIT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뒤, 지난 9월 1일 자로 카이스트의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조교수로 부임한 박영균이라고 합니다.
[toggle style=”closed” title=”박영균 교수 약력”]
1985년 4월 22일 전남 광주 출생
[학력]
- 2000-2002년 광주과학고등학교 졸업
- 2002-2006년 KAIST 생명과학 학사
- 2006-2011년 KAIST 생명과학 박사
[경력]
- 2011-2013년 KAIST 자연과학연구소 박사 후 과정
- 2013-2015년 스위스 Friedrich-Miescher Institute 박사 후 과정
- 2015-2019년 미국 MIT 박사 후 과정
- 2019-2020년 미국 MIT 연구원
- 2020년 9월~現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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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과학고 출신이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흥미가 있으셨나요?
어릴 때부터 어떤 사물이나 물체에 대해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유치원에 프리즘이 있었는데, 사물들의 색깔이 바뀌는게 신기해 몇시간씩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낮에 구름에 햇빛이 가려져서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게 되는데, 혼자 방에 누워있으면서 관찰하게되는 그런 현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점점 ‘과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는 저의 관심사에 대해 알게 되신 후 주말마다 서점에 가서 원하는 책을 사주셨는데, 한번은 서울과학고 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소개한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는 책을 사서 보게 되었어요. 서울과학고 학생들이 입학 후 어떻게 과학에 매진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좌절을 느끼며, 어떠한 과학자로 발전하는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과학고등학교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고, 제가 태어난 광주에 있는 광주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 광주과학고등학교를 1년 월반하여 2년 만에 조기졸업 후,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에 진학하셨어요. 많은 전공 중 ‘생명과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평소 과학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저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과학을 공부하는 대상 그 자체인 ‘생명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뇌’였습니다. 이는 ‘생명과학’으로 전공을 택하고, 훗날 ‘신경과학’을 선택하여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뇌’는 자연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연구하기 어렵겠지만, 대신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도전의식’도 제 전공을 선택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되었습니다. 전공을 선택하는데 있어 제가 대학 및 대학원 진학할 당시마다 저의 부모님은 무조건 제가 좋아하는 길을 택하여 걸어가는 것을 믿고 지지해주셨습니다.
= 대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선배로서조언한다면요.
지금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전공을 택하며 고민을 할 시기인데 첫째로 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서 선호하는 직업군과 전공 역시 매번 달라집니다. 10, 20년에 한 번꼴일까요? 사람이 평균 80년을 산다고 가정해본다면 시대적 흐름은 적어도 5~6번은 바뀌지요. 그러니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분야와 전공을 찾아 택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으십시오’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지금 현시대에 사람들이 ‘누구나’ 원하는 직업은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 대부분이 지원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그 직업군 안에서 서로가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므로 결국에는 머지않은 시간에 ‘레드오션’이 되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분야가 유망할 것이다라는 본인의 뚜렷한 이유들에 기반해 블루오션을 찾아 그 분야에 종사한다면,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하고 독특한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 카이스트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치신 후 또 다른 박사후과정을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 마치셨어요. 카이스트에서 박사 이상의 경력을 지니셨기에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스위스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당시 외국의 유수한 기관에서 연구 경험을 쌓고 논문을 쓰는 것에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또 ‘대학교수’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수학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도(멘토링)하였을 때 그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보는 것이 굉장히 보람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국내 박사 학위로도 충분히 교수가 되는 것은 가능하나, 제 분야는 해외에서도 ‘박사후과정’(이하 ‘포닥’ PostDoc)을 마치고 타 분야 연구 경험을 쌓으며 저명한 기관에서 논문을 제출 및 발표하는 것이 국내외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포닥을 하기위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포닥을 해외에서 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위스로 가기 직전에 결혼을 하였고, 가서는 아이가 생기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기에, 그 무게는 만만치 않았지요. 힘든 포닥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꼭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버텼습니다.
= 시스템 신경과학 연구를 하시다가 신경공학 기술개발로 연구 분야를 바꾸셨어요. 학사-석사-박사-포닥까지 끝낸 분야에서 갑자기 연구 분야를 바꾼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큰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배경이 있나요?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의 포닥 생활을 마치고, 2015년 미국 MIT로 거처를 옮기면서 연구 분야를 바꿨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시스템 신경과학을 연구하였고, MIT에서는 신경 공학 기술 개발을 하였어요. 전공을 비교 설명해드리자면, 시스템 신경과학이란 뇌의 신경 세포와 그 사이의 연결, 뇌 전체의 네트워크, 이렇게 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분석해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한 연구이자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신경공학은 뇌 기능과 뇌 질병을 이해하는 연구기술을 개발하고, 뇌-기계 인터페이스(BMI; Brain-machine interface)처럼 뇌의 기능을 보조하는 장비나 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위스에서 시스템 신경과학을 연구하던 시절부터 신경 공학 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스위스에서 했던 연구는, 뇌가 어떻게 행동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하기 위해, 움직이는 생쥐로부터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생명 신호를 한꺼번에 측정하면서 뇌를 조절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쥐 행동의 동영상, 생쥐의 발성, 생쥐 뇌의 전기 신호, 근육의 신호들을 동시에 측정하면서 최근에 개발된 광유전학을 통해 뇌를 조절할 수 있고, 이러한 신호와 조절의 타이밍들을 동기화시켜 기록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었습니다. 이를 개발하면서, 제가 사용한 도구(tool)라던가 제가 그동안 몰랐던 뇌에 관한 여러 신경 공학에 관해 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스위스를 떠나 MIT에 가면서 전공 분야를 완전히 신경 공학 기술 개발로 바꾸었는데 그 계기는 또 다른 목마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뇌에 관해 연구할 때면 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반도체를 보면 너무 복잡해 보이지만 반도체 회로를 만든 전문가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 세세함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저도 그 복잡해 보이는 ‘뇌’를 정말 깊게 이해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고민 끝에 ‘뇌를 한차원 깊이 이해하려면 뇌를 연구하는 기술개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신경 공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 주 전공이 아니었던 신경 공학 기술 개발 분야에 뛰어들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실험실을 차릴 때 제 시스템 신경과학과 신경 공학 연구를 둘다 한 경험이 도움이 될것이라 믿었고, 올 9월에 연 저의 실험실에서도 두 분야의 연구를 융합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 2015년에서 올해까지 햇수로 6년간 미국 MIT에서 포닥 및 연구원으로서 어떤 기술 개발에 참가하셨는지 소개해주세요.
저는 두 가지 기술 개발에 참가했습니다. 첫 번째는 쉴드(SHIELD)라는 것인데요. 이것은 뇌 전체를 투명하게 하면서 그 안에 있는 정보를 보전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두 번째 기술인 이플래쉬(eFLASH)는 투명화된 뇌를 아주 빠른 속도로 염색하는 기술입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쉴드[/dropcap]에 관해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포유동물의 뇌는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미경으로 한번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뇌를 볼 수 있는 깊이 만큼 얇은 절편으로 잘라서 본 다음에, 그 절편들의 정보를 합하는 방식으로 과학자들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뇌의 조직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인 조직투명화(Tissue clearing)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뇌를 투명하게 한 상태에서 그 안을 이미지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 투명화’ 기술은 단점이 있었는데, 뇌를 투명화시키기 위해 세제등을 사용해 뇌 조직의 지방을 없애는 과정에서, 단백질이나 핵산 혹은 세포구조같은 다른 필수적인 정보들도 왜곡되거나 파괴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개발한 쉴드는 특정한 에폭시(epoxy)라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여 뇌의 개개분자와 뇌 안의 세포 구조를 보존한 다음에 투명화 시킴으로써, 뇌 전체를 정보가 보존된 상태에서 3차원으로 시각화시킬 수 있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3차원으로 시각화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조직 내 정보들은 조직 염색을 필요로 합니다. 염색 중 가장 널리 쓰이는 기술 중의 하나가 항체를 통해 염색하는 것인데, 항체는 본디 분자가 크기 때문에 뇌와 같이 아주 큰 조직을 항체로 염색하려면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며, 또 조직의 겉면만 염색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33″]이플래쉬[/dropcap]는 제가 두 번째로 개발한 기술인데요. 아주 빠르고, 저렴하면서, 다양한 항체와 조직에 적용할 수 있는 3차원 면역 염색법입니다. 예를 들면 생쥐의 전체 뇌를 하루만에 면역염색할 수 있습니다.
이 쉴드와 이플래쉬의 개발 후 여러 공동연구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도네가와 스스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1987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교수님과 쉴드를 이용해 뇌의 ‘공포 기억 저장소’의 ‘지도’(map)를 만든 연구가 기억에 남습니다.
= 카이스트에서의 포닥, 스위스 프레드리히 미에셔 연구소에서의 포닥, 미국 MIT에서의 포닥. 총 세 번의 포닥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포닥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내가 정말 좋은 교수가 될 수 있을까?’, ‘존경받는 교수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저 자신을 의심하게 될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타지 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유학을 하는 본인도 힘들지만, 그 가족도 똑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포닥 시절, 특히 시스템 신경과학에서 신경 공학 기술 개발로 전공을 바꿀 때 저는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했습니다. 당시 아내는 “당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가라”며 지지해주었고, “잘할 수 있을 거다. 당신은 신께서 선택하신 능력을 준 사람이다”라며 꾸준히 격려해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제 아내는 지금도 그렇지만 제게 최고의 내조자이자 동료이고 동지입니다.
= 그동안의 힘든 시기도 이겨내고 지난 9월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의 조교수로 정식 임용되면서 ‘대학교수’의 꿈을 이루셨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기관에서 채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지원부터 임용까지 그 ‘여정’도 험난했을 것 같아요.
저는 2018년 중순쯤부터 대학 교수직에 지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미국과 한국 등의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 이력서, 연구계획서, 강의계획서 등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내면은 다부지게 단단해진 것 같아요. 이듬해 8월 즈음에 미국의 몇몇 대학 교수직에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대학도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그중 하나가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였습니다.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임용 지원의 서류 심사에 합격한 다음에 면접 기회를 받게 되어 2020년 1월, 한국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면접을 본 날짜가 1월 5일인데, 2주 후인 1월 20일, 국내 코로나19 환자가 처음 발생했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중국에 코로나19가 점점 퍼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면접을 현지 캠퍼스에서 본 이후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공대 학장님, 후에는 총장님과의 면접을 보아야 했는데 그때는 이미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번진 이후였기에 원격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카이스트에 오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수로 지원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의 커리큘럼을 찾아보고 공부했었는데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만큼 뇌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분들이 모여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하는 곳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학, 생명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화학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시며 시너지를 내는 학과입니다. 저는 이렇게 멋진 연구기관이자 학교인 모교에 다시 오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 말씀하신 대로 11년 동안은 ‘학생’으로 재학하다가 이젠 ‘교수’로서 다시 모교에 오게 되었는데 그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카이스트는 지금의 제가 있게 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입니다. 과학자로서, 공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출 수 있었고, 자유롭게 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제가 원하는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카이스트 생명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지만, 바이오및뇌공학과나 다른 과의 수업도 자유자재로 수강 및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배움에 한해서는 원없는 자유와 학구적인 분위기 때문에 제가 연구를 이어나가고 성과를 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 이곳에 교수로 부임하여 제가 그동안 연구하며 배운 것들을 후배들께 지도하며 전달하고 후배들이 꿈을 펼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 이번 학기에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수업은 많이 못하셨을 것 같아요. 부임 후 첫 강의인데 어떤 강의를 맡으셨는지 소개해주세요.
카이스트는 기본적으로 강의가 영어로 진행됩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Single Cell Brain Mapping]이라는 과목을 개설했습니다. 학과와 과목의 목표가 학제적이기 때문에 전산과, 생명과학과 등 바이오및뇌공학과 외에도 여러 전공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으며, 박사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이지만, 네 명의 학부생이 청강하고 있습니다. 이 과목은 뇌 전체의 지도를 만드는데 이용될 수 있는 최신 기술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대면 수업은 못하고 Zoom 프로그램을 이용한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 특별한 교육 철학이 있으시다고요?
저는 다른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는 ‘다원주의’를 교육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대학의 교육은 어떠한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때,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문에 대한 ‘열린자세’를 고양할 수 있는 교육과 멘토링을 대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뀌어 가는 사회 때문입니다. 사람이 쌓아올린 지식의 양은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하고,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배울 수 없기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가진 인재들은 협업에 참여하고, 혹은 협업을 리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다원주의’를 가지도록 하는 방법으로 제가 생각해본 하나는 과학 수업에 ‘역사 강의’를 접목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패러다임이 그 분야를 지배하다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됨으로써 과거의 패러다임이 폐기되는 과정이 반복되며 과학이 발전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누군가 수돗물에 납을 넣는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리겠지만, 납이 사람들에게 유해하다고 알려지기 전까지는 휘발유에도 납이 들어있었고, 심지어 수도관도 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특정한 발견을 소개할 때, 그 지식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정한 발견 전에는 과거엔 어떤 패러다임이 존재했었고, 그것이 왜 사람들이 맞는다고 생각했었고, 이 특정한 발견 이후 사람들의 반응과 사회적 반향들은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결국엔 어떻게 하여 사람들이 오늘날의 생활 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과학과 역사를 함께 소개한다면 학생들이 ‘다원주의’에 대해 훨씬 더 잘 이해하면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방법은 ‘디베이트 디스커션'(Debate Discussion)인데요.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세 팀으로 나누어 현 시국에서 결론을 못 내리고 논쟁 중인 사안에 대해 동의를 하든 동의를 하지 않든 상관없이 편과 입장을 나누어 토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사안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음에도, 지지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서 토론을 하다 보면 ‘왜 이것을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존중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다원주의’를 제 강의를 통해 고양시키고자 합니다.
= 연구를 정말 좋아하시지만, 모두의 삶이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 해소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스트레스 쌓인 것도 모르고 그저 저 자신에게 깊게 몰두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연구하는 순간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죠? 사람들은 제게 ‘넌 왜 화가 나도 과학을 하니?’,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연구를 하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제겐 아이가 둘이 있어요. 첫째는 7살이고 둘째는 2살이에요. 온종일 연구실에서 수많은 연구 자료와 씨름하다가 기운을 쭉 빼고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생기가 돌아요.
제가 학부 때 카이스트에서 두 개의 동아리에서 활동했어요. 하나는 ‘가오리’라는 수영 동아리와 ‘코러스’라는 합창 동아리예요. 미국 연구실은 사생활을 존중하는 문화라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고, MIT 수영장에서 수영을 많이 했어요. 수영을 하다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상쾌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노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아내를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오르네요. 지인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함께 축가를 하며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앞서 언급했듯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카이스트 합창 동아리에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합창 동아리에서는 뮤지컬 공연도 자주 했어요. 뮤지컬을 좋아했는데 당시 아내는 미국의 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우연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는 아내와 만나 그렇게 뮤지컬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있지요. 가끔 연구를 하며 막히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뮤지컬 노래를 듣고 부릅니다.
= 2000년 과학고등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올해 2020년. 20년간 과학도의 길을 걷고 계시는데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했을 것 같나요?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무엇이 되어있을 것 같나요?
저는 2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과학고 진학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과학고는 특수목적을 둔 학교의 특성상 과학과 수학 과목을 배우는 시간이 긴데, 저 같은 경우는 과학과 수학을 좋아하니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아요. 또한, 과학고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친구들과 함께 자고 한솥밥 먹으며 오랜 시간 모여앉아 토론하고 문제를 풀며 시간 보내었던 것이 추억으로 깊이 남아있고, 그 친구들은 지금도 아주 소중한 인연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늘 손으로 무언가 하는 것을 즐겼는데요. 만약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의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당시 생쥐의 뇌수술을 많이 했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시는 외과 의사분들이 하는 수술과는 천지 차이지만, 만약 과학자가 되지 않았으면 외과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른 직업은 잘 상상이 안 갑니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민첩성이 떨어지고. 합창은 10년을 했지만,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고… (웃음) 그래서 외과 의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과 꿈은요?
꿈과 목표는 교육과 연구 두 가지로 나눠서 있는데요.
우선, 교육적인 부분은 카이스트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과 함께 일하면서 학생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뇌 혹은 뇌 기술 개발,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면서 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꿈입니다. 만약에 제가 연구실을 열고 10년, 20년이 지나 다섯 명 정도의 학생이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저보다 나은 교수가 되어 있다면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구적인 부분은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한가지 목표이고, 그 기술들로 인해 신경과학이나 신경 공학의 연구들이 촉진되고, 우리 뇌에 대한 지식이 한 차원 깊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해서 20년, 30년, 그 후 언제라도 치매나 우울증, 자폐증 같은 질환에 실제로 제 연구가 적용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
저는 모든 학문의 종착역은 그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의 ‘궁금증’, 즉 ‘본인에 관한 궁금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최근에 신경과학, 뇌에 관한 과학이나 공학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제 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므로 ‘뇌’에 관한 연구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 인터뷰를 읽고 계실 독자, 특히 학생분들께서 신경과학 및 신경 공학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두시고, 연구에 참여해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과학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뺄 수 없지요. 코로나19의 창궐 이후 과학 연구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사회적으로 많은 분이 실감하셨으리라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19는 언젠가 정복되겠지만 그전에 사스와 메르스가 있었듯 이런 대유행 질병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나게 될 것인데 이런 질병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과학과 공학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11여 년간 학생으로, 지금은 교수로서 제가 서 있는 ‘카이스트’라는 대학은 굉장한 뛰어난 학생들과 교수진이 서로 활발히 의사소통하면서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게 모인 학교라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얼마 전 제 학과의 학생이 창업하였습니다. ‘연구하기 위해서’는, 또한 ‘연구하기에’는 정말 좋은 학교이며, 이룬 연구를 바탕으로 창업한다거나 발전시킨 기술을 가지고 의학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과학이나 기술을 연구하는 의사가 되는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카이스트는 연구’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쌓은 과학 지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의 문은 많은 뛰어난 여러분을 위해 열려 있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2021년 3월, 카이스트에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