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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정치인인 울산 택시기사 김창현 님은 하루하루 겪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합니다. 이 택시 일기를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슬로우뉴스에도 연재합니다. 택시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만난 우리 이웃의 이야기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담담하게, 또 때론 깊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거울삼아 우리는 삶을 돌아봅니다. 그 삶의 풍경을 매주 조금씩 공들여 담아볼까 싶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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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의 택시일기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가 오려나 보다. 목이 붓고 기침을 한다. 으슬으슬하여 일찍 마치고 들어오는데 라디오에서 인디밴드의 음악 세계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온다. 갑자기 작년 여름 어느 날 만났던 젊은 간호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상쾌한 새벽이었다. 5시 30분경으로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활기차게 한 아가씨가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요?”
“고속버스 터미널이요.”

“서울 가나요?”
“예.”

“먼 길 가네요?”
“예. 친구들과 인디밴드 공연 보러 가요.”

“와. 좋겠네요.”
“예. 너무 좋아요. 오늘 금요일 월차 내고요. 주말 끼니까 사흘 동안 서울에서 실컷 놀다 오려고요.”

“인디밴드는 뭐가 좋은가요?”
“솔직함? 과감함? 뭐 그런 거지요.”

“정확히 인디밴드를 설명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요? 솔직히 잘 몰라서…”
“그러니까 메이저 음악에 대응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되요. 작사, 작곡, 연주, 제작, 판매, 심지어 포장까지 직접 하거든요. 진정한 음악인들이지요.”

“와. 대단하네요. 큰돈은 안 되겠지만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청년들이 하겠군요.”
“아무래도 공중파 출연 음악은 가사나 형식에 제한이 있잖아요. 그런데 인디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고집해요. 요즘 많은 아이돌 노래들이 사랑 타령이라면 인디밴드는 훨씬 내용이 다양하지요. 형식도 개성도 뚜렷하고요.”

아는 인디밴드 그룹이 없지만 그래도 물어보았다.

“특별히 좋아하는 인디밴드가 있나요?”
“‘브로콜리 너마저’ 라고 있어요.”

“브로콜리? 무슨 먹는 야채 같은데… 그런데 뭐 너마저 까지 붙어 있네?”
“맞아요. 이름이 특이하지요? 정말 괜찮은 그룹 이예요.”

“로마의 시저가 칼 맞고 죽으면서 자기가 평소 아끼던 부르투스에게 했던 말이잖아요. 부르투스 너마저!”
“무슨 거창한 의미를 두고 이름을 지은 건 아닐 거예요. 뭔가 튀어 보려고 한 것 아닐까요? 저도 이름의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공중파를 타지 않는데 어떻게 음악을 평소 들을 수 있지요?”
“인터넷을 통해 정기적으로 음원을 올리고 이를 다운받아 들을 수 있어요. 제법 마니아층이 있어요. 저는 아주 푹 빠졌어요.”

“난 인디밴드에 대해 잘 몰라요. 다만 공중파에 나와 공연하다가 느닷없이 바지를 까내려 시끄러웠던 사건만 기억나네요. 왠지 황당한 이미지가 제 마음속에 있는 것 같아요. 난 영락없는 기성세대지요?”
“호호 꼭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도 많이 놀랐어요. 또 문제의식도 많이 커졌고요. 사실 인디밴드에는 튀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것을 실험정신 혹은 전위예술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요. 자유, 방종, 반항 뭐 그런 거지요. 하지만 애정을 갖고 보면요, 그 안에 짙은 슬픔도 녹아 있고 인생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어요.”

“그렇군요. 기회가 되면 꼭 인디밴드 공연을 보고 싶네요.”
“그래 보세요. 저는 00병원 간호사거든요. 일이 피곤할 때도 음악을 들으면 다 녹는 것 같아요.”

“그래 서울에 가면 공연만 보고 오나요?”
“그럴 리가 있나요? 서울 구경할 거예요. 생각만 해도 신이나요.”

그 싱그러웠던 간호사와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감기 기운으로 일을 좀 빨리 마치고 집에 앉아 ‘브로콜리 너마저’를 검색해 보았다.

브로콜리 너마저 EP앨범 "1/10"
브로콜리 너마저 EP앨범 “1/10” (출처: 브로콜리 너마저 페이스북 페이지)

향기, 덕원, 잔디, 류지 이렇게 네 사람이 하는 밴드. 왜 밴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살펴보니 예상대로 그냥 별 뜻 없이 지었다고 한다. 당연히 멤버들이 먹는 브로콜리에게 큰 감정도 없는 듯하다. 식상한 이름을 피하려다 지었다고 한다. 원래 여러 밴드 이름 후보를 두고 선택한 것이다. 그 후보들 면면을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구파발 물미역’, ‘덩기덕 쿵덕’, ‘엄마 쟤 흙 먹어’, ‘저 여자 눈 좀 봐’

그냥 박근혜 취임식 소식 혹은 정치, 노동, 사회면으로 넘어가려다 갑자기 한 곡 듣고 싶다는 생각에 미쳤다. 듣다 보니 몇 곡 더 듣게 되었는데, 작년 12월에 홍대 한 카페에서 새 앨범 ‘1/10’을 발매하면서 네이버 뮤직으로 생중계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24명의 특별 초청된 관객과 게스트로 한효주가 나오는 잔잔한 음악발표였다. 제목도 잔인한 4월, 춤,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손 편지 등이었는데 노래가 전체적으로 너무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이 아니라 점점 더 관심이 생겨 밴드의 보컬이고 리더라 할 수 있는 덕원의 인터뷰기사를 훑어보았다. 2005년 민중가요 동아리에서 만난 덕원과 잔디가 대학가요제에 응모한 것이 밴드의 발단이라고 한다. 예선에서 탈락했는데 녹음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줄 알고 악기도 없이 나갔다가 빈 페트병으로 드럼을 쳤단다. 물론 그들의 그런 모습은 인정받지 못했으리라.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졸업’이라는 노래 가사인데 참 찡하게 와 닿았다. 지금 우리나라 이십 대가 겪는 좌절과 방황, 불안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었다. 노래로 그들과 소통하고 함께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KBS는 방송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방송에서 많이 틀어주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은 없지만 부당한 재단에 침묵할 수만은 없어 손 안 대고 다시 재심을 요청했단다. 물론 여전히 방송 불가 상태라고 한다. 이 정도 가사도 용납을 못 하는 참 답답한 사회. 꽉 막힌 문화 포용력.

“20대는 보수화되지 않는다. 다만 보수의 길이 아닌 삶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지지 않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즉 보수화보다는 패배기피 경향이라고 보아 달라. 정치성향은 진보적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뚜렷한 희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구조적으로 권위적이고 기득권이 횡행하는 사회에 반대하는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시민운동 참여에 대한 꿈은 있다. 물론 시민운동의 지평이 보다 넓혀지기를 소망하면서.”

덕원의 말이다.

브로콜리 너마저
브로콜리 너마저 (출처: 브로콜리 너마저 페이스북 페이지)

컴퓨터를 끄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왜 그동안 이런 밴드를 몰랐을까? 다년간 곡을 발표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는데… 세상은 관심 두는 분야만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세상의 절반만 보고 사는 것인가?

단둘이 나온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느끼던 그 황당한 심정과 비슷하다. 50% 지지를 얻고 있으면 곳곳에서 당선분위기를 감지하게 되어 있다. 둘 중 한사람이 지지를 표시하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낙선 후 요술에 걸린 것 같은 심정이 된다. 모두 우리 표 같은데 도대체 누가 상대를 찍었을까? 나는 왜 떨어졌을까?

‘브로콜리 너마저’를 발견하면서 약간의 답을 찾는 기분이다. 그래. 발견이다. 원래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나만 몰랐을 뿐이니까.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일방적으로 설득하고 가르치려 들고, 자기의 낡은 습관, 사고방식, 게으름은 그대로 보존하고. 그러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다. 나이와 직업과 정견을 넘어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그 곳에 무슨 꿈과 희망이 있는지 진지하게 존중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감기약 기운이 돌면서 약간 몽롱해진다.

2013년 2월 25일 맑음. 박근혜 대통령 취임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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