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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메르켈 총리는 독일 총리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국제 정상과의 만남에서도 너무 수수하게 입고, 초라한 핸드백을 들고 다녀 국격에 맞지 않는다고 일부 사람들은 메르켈을 조롱했다. 가난한 동독 출신에 사교성이 떨어지는 물리학자라는 편견이 메르켈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메르켈은 한번도 스타일을 바꾼 적이 없고, 불필요한 논쟁에 대응하지 않았다. 메르켈의 스타일은 오히려 소박하고 친근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메르켈은 총리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집 근처 수퍼마켓에서 홀로 장을 보곤 한다. 메르켈은 ’68세대’와는 거리를 두었으면서도 FKK(나체자연주의)를 즐기는 사람으로 나체로 해변을 거니는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footnote]사진의 진위 여부에 관해선 논란이 있다. (편집자)[/footnote] 총리 직무와 상관없는 황색 언론의 이슈니까.

메르켈 총리 (2013년 모습, 출처: Martin_Rulsch, CC BY SA 4.0)
메르켈 총리 (2013년 모습, 출처: Martin_Rulsch, CC BY SA 4.0)

메르켈은 물리학 박사 출신이다. 98년 총선에선 기민당이 패배한 뒤 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이 되었고, 4선 총리였던 헬무트 콜이 99년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자 “기민당은 헬무트 콜 없이 걷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며 콜과 선을 그었다. 남성 중심의 독일 정치판에서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통독 이후 첫 동독 출신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가 됐다.

메르켈은 카메라와 대중 연설을 어려워하지만, 개인주의자로서 극우-파시즘과 선을 긋고, 좌파 정당들과의 대연정을 통해 탈핵 정책, 난민 문제 등에서 진보 정책을 대폭 수용하며,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헬무트 콜과 마찬가지로 4선 총리에 올랐다. 메르켈이 총리가 된 이후로 그 어떤 남성 후보도 메르켈 총리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남자도 독일 총리를 할 수 있으냐”고 남자 아이들이 묻는 분위기가 됐다. 최근 입지가 축소하면서 마지막 임기인 2021년까지만 총리직을 수행한 뒤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메르켈이 독일 총리로 재임한 지 벌써 16년이다.

파파라치들이 사르코지 전 총리의 불륜-데이트 현장을 찍어 보도 했을 때, 프랑스 시민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에게는 사생활도 없냐면서 파파라치들을 비난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4일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국회에 등원했다. 그리고 성희롱적 발언으로 공격받았다. 성적 모욕을 부추기는 기사들이 한 몫했다. 이들이 최소한의 윤리와 강령을 지키는 기자 맞긴 할까. 내가 보기엔 몰래 숨어 타인의 삶을 훔쳐 조롱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파파라치가 따로 없어보인다.

정파적 편견을 강화하면서 갈등을 조장하는 가십성 기사를 쏟아낸 조선비즈, 한국경제, 중앙일보, 매경... 정말 부끄러운 줄 알길 바란다.
정파적 편견을 강화하면서 갈등을 조장하는 가십성 기사를 쏟아낸 조선비즈, 한국경제, 중앙일보, 매경… 정작 이들은 종이신문에는 이런 ‘가십성’ 제목을 달지 않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정말 부끄러운 줄 알길 바란다.

류호정 의원은 27세다. 20대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다른 권위주의적인 의원들처럼 기 수백만원짜리 정장을 맞춰입어야만 할까? 20대, 30대들이 평소에도 즐겨 입는 9만 원짜리 원피스를 입은게 그만큼 몰상식한 일인가?

2020년이다. 왜 아직도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술집년”, “나가요”, “보도”, “노래방 도우미”, “시간당 3만 원 잘 챙겨주겠다”, “더 벗어봐라”, “성추행, 성희롱 당할만 하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할지 회의가 든다.

류호정 의원에게 성적 모욕과 인신 공격을 하는 사람들은 배현진 의원에게 성적모욕과 인신공격을 했던 사람들과 같다. 지금 류호정 의원에 대한 인신공격고 성적 모욕을 조장하는 일부 언론과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모습은 일베에서 류호정 의원을 비난하는 댓글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두발자유화? 현실은 여전히 ‘단속 중’ 

‘두발자유화’라는 학생운동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혹자는 두발자유화가 무슨 학생운동이냐 조소를 보낼지 모르겠는데,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드러서자 사회 전반에 인권 인식이 높아지고, 일본 문화 개방 등 열린 문화를 필두로 두발 자율화에 탄력이 붙었다. 민간은 물론 교도소와 학교 등 공공기관에서의 머리길이 제한을 없애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법무부는 재소자 두발제한 제도를 공식 폐지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98년부터 두발자유화를 학생운동으로 경험한 세대에게 외모, 복장에 대한 지적질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두발자유화가 보편화됐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여전히 중고등학생의 두발자유화에 대해 찬성(40%)하는 여론보다 반대(54%)하는 여론이 더 많다(2018, 리얼미터).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2018년 ‘중고생의 머리카락 길이, 파마, 염색에 제한을 두지 않는’ 두발자유화 방침을 밝혔지만, 여전히 대부분 학교들은 두발 단속과 징계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겨울에는 추운데도 외투를 못 입게 하고, 교복만 입기를 강요하는 학교들이 아직도 많다. 추운 겨울에 치마를 강요받는 여학생은 어떤가. 올해는 두발자유화 학생운동이 시작된지 22년 되는 해이다.

2005년 5월 19일 오후 2시, 송파공업고등학교 150명의 고교생이 '두발 제한 폐지'가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시위를 벌였다. (출처: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005년 5월 19일 오후 2시, 송파공업고등학교 150명의 고교생이 ‘두발 제한 폐지’가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시위를 벌였다. (출처: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내가 처음 피어싱과 타투, 모호크를 시작했던 2000년 언저리와 오늘의 20대들은 다르다. 2000년 당시는 머리에 브릿지만 넣어도 불량한 사람으로 보는 편견이 있었지만, 지금은 옷 소매 밖으로, 목으로 드러나는 타투에 대한 인식도 문화, 패션의 일부로 상당히 바뀌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모, 복장에 대한 지적질이라니.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최소한의 예의 

대리게임 논란, 확실히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런데 대리게임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대리게임으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게 사실이라면, 나도 당장 대리게임을 해줄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권고사직인데 해고노동자라며 거짓말을 했다? 권고사직이 IMF때 사측이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권고라는 이름으로 사직을 강요하며 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해고와 다를 바 없고, UN은 계속해서 한국정부에 비정규직 및 해고노동자의 노조활동을 인정하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건 청년세대가 아니라 조금의 예의도 없이 무례하게 상대의 외모, 나이, 성별, 출신 등으로 비하를 하는 기성세대다.

류호정 의원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청년과 여성을 대표하여 국회의원이 된 만큼 단순히 ‘대리게임’이나 ‘복장’이 아닌 앞으로의 행보를 보고 지지 여부를 판단하면 좋겠다. 외모, 복장에 대한 조롱과 비난, 성적 모욕은 상식 이하다. 20대 여성이 일상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모욕을 일삼거나 이를 가십으로 소비하는 언론을 보자니 구토가 밀려온다.

적어도 류호정 의원은 홍콩 국가보안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홍콩 시민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몇 안되는 국회의원이다. 조슈아 웡이 류호정 의원과 박용진 의원을 직접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여성과 청년을 위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지켜봐야 한다. 가십이 아니라 정책과 철학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이 그토록 요구했던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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